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15화 (15/178)

Chapter7. 한층 더 깊이(1)

문제점을 발견했으니 이제 해결하면 된다.

진호는 주왕이 가진 성정을 차근차근 분석해서 남호의 캐릭터와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했다.

가져가도 좋은 점은 무엇인지, 버려야 될 점은 무엇인지.

연기를 위해 캐릭터를 재정립 했다.

“그럼 이걸 구현하는 방법인데.”

기본적으로 주왕이 튀어나온 이유는 진호의 내재적인 욕망 때문이다.

바라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아주 심플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은 방식이면 되지 않을까?

“내가 바라는 건 남호의 캐릭터. 소시오패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한 여자를 사랑함에 포기 할 줄도 아는 성격. 판타지적인 설정이지만······”

필요하다면 그런 캐릭터도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캐릭터를 상상했다.

— 나의 꽃, 달기여.

— 죽여라. 서주의 인간이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 내 길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죽어 마땅하다.

— 너만은 살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 그대들이 내 상장이구나. 날 위해 싸워 다오.

주왕과 조조의 얼굴이 번갈아 스쳐갔다.

그들의 감정, 경험, 마음가짐 따위가 낱개로 분해되어 진호가 바라는 캐릭터 위로 덧씌워졌다.

여기에 만약이라 할 수 있는 상상까지.

“······아니 부족해.”

캐릭터를 구축하는 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원하는 남호와 상상의 산물이 얼마나 일치 할 수 있을까.

분해하고 합치고 상상하기를 반복했다.

거대한 동상을 제작하던 도공의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는 장인의 심정으로.

“조금 더······”

진호는 남호라는 사람을 만들어갔다.

한 땀 한 땀.

#

지남운은 짜증 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의 직위는 감독.

연출과 캐스팅에 대한 재량을 인정받고 현장의 권위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1에서 10이 드라마의 전체라고 한다면 그는 5이상을 쥐고 있어야 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하지만 실제로 그의 권한은 4이하였다.

드라마 제작사 측에서는 협찬사인 AJ그룹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입김이 들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연 배우인 남일수였다.

지남운은 남일수라는 배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드라마에 맞는 배우가 아니었다.

얼굴은 잘 생겼고 발성도 나름 튼튼하지만 결정적으로 감정 연기가 약했다.

이번 드라마의 중요 쟁점은 여주인공인 미호를 둔 두 남자의 감정싸움.

연기가 약하면 극의 긴장감이 약해지고 결국 맥 빠지는 흐름으로 갈 수밖에 없다.

“또 한 소리 듣고 나오셨나 보네요.”

“아. 윤 작가님.”

일그러진 얼굴로 담배를 무는 지남운에게 윤숙주가 다가왔다.

감독과 메인 작가의 위치였다.

“촬영이 얼마나 남았다고 또 뜯어 고치라는 건지.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건지 홍보물을 만들고 싶은 건지 도통 모르겠네요.”

“윤 작가님도 고충이 많네요.”

“하하. 어디 지 감독님만 할까요. 배역 비중 문제로 또 싸우신 거죠?”

지남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구상에서 이번 드라마 쟁점은 어디까지나 미호를 중심에 둔 두 남자의 갈등이다.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는 두 남자가 극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유발해야 시청자가 따라오는 것이다.

헌데, 제작사 측에서는 무조건 남일수의 분량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비율로 치자면 5:1 수준.

이래서야 적은 분량에서 진호의 배역인 남호가 매력을 살리기 어렵다.

“아, 진짜 더럽죠. 가끔은 짜증나서 때려 치고 싶다니까요.”

“윤 작가님도 그런 겁니까? 저도 가끔은 감독이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건지 제작사 꼭두각시가 되는 건지.”

“아마 제작사 말 안 듣고 진호 씨를 조연으로 캐스팅 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에요.”

“캐스팅 전권을 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참나. 아, 그러고 보니 작가님은 진호 씨를 직접 봤죠? 어때요? 저도 직접 보러 가야 하는데 일이 이렇다 보니.”

감독은 배우를 직접 보고 살펴야 한다.

하지만 제작사와 싸우다 보니 그 중요한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사람은 괜찮아 보여요. 배역에 대한 집중도도 높은 거 같고. 전에 봤던 것처럼 연기력만 뽑아 낼 수 있으면 확실히 주목도는 보장 할 거 같네요.”

“그래야죠. 그래서 밀어붙인 건데. 주연 두 사람이 모두 전문배우가 아닌데 여기서 서브 남주까지 그럭저럭인 사람을 뽑아 버린다? 그냥 어설픈 하이틴 드라마 되고 마는 거죠.”

“하하. 감독님이라면 그런 것도 잘 하실 거 같은데.”

“어휴. 그런 건 상상만 할게요. 예쁘고 멋진 애들 나와서 블링블링하게 시청률 뽑아먹는 것도 물론 재밌는 일이지만······전 역시 배우는 연기로 증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올드한 고집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지남운의 철학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손을 거쳐서 좋은 배우들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럼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적어도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 할 환경은 만들어 줘야지 않을까요?”

“싸우고 깨지는 건 익숙하니까요.”

“하하. 꼭 투사같네요.”

왜 아닐까.

감독은 왕이 아니다.

제작사와 싸우고 출연자와 싸우고 스텝과 싸우고.

계속 싸우고 투쟁해야 하는 직업이다.

“황소처럼 일 해봅시다.”

적어도 그의 지론은 그러했다.

#

진호는 두 번이나 수정 대본을 받았다.

그때마다 대사와 장면이 미묘하게 바뀌고 전체 분량 역시 수정되었다.

굉장히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다행히 캐릭터 자체는 건들지 않았다.

바뀐 장면과 상황을 숙지하고 연습을 반복했다.

“이제야 대본 리딩을 하네.”

“본래 이정도로 하는 게 아닌가 봐?”

제작사 스튜디오로 이동하는 길에 은서가 진호를 픽업했다. 둘 다 대본 숙지 때문인지 얼굴에 피곤이 역력했다.

“보통은 대본 리딩을 먼저 하면서 씬을 보지. 장면이 괜찮은지, 배우의 호흡은 좋은지, 극의 흐름은 완만한지. 중간에 대사 같은 것도 좀 바꾸고.”

“하기도 전에 대본을 갈아치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거지?”

“위에서 얼마나 싸우고 있다는 거냐. 애초에 외주 제작사에 입김 넣는 게 AJ 그룹이잖아. 그 대표 배우가 덜컥 주연인 거고. 예정된 일이지.”

이런 내막까지는 알 리 없는 진호는 고개만 끄덕였다. 드라마라고 하면 그냥 방송사에서 제작하고 감독이 전부 총괄하는 줄 알았다.

“뭐, 어쨌든 우리는 우리 일만 하면 되지. 오빠, 준비는 다 된 거지?”

“응. 캐릭터도 잡았고 지금이라면 제대로 연기 할 수 있을 거 같아.”

“오. 제대로라. 이거 완전 기대가 되네. 또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이런 비중 높은 배역은 처음이잖아. 제대로 해야지. 정말로 연기를 업으로 삼고 살 거라면.”

평범한 회사원에서 배우로.

극적인 인생 반전에 그냥 웃고만 있을 수는 없다.

세상에 연기력은 좋았지만 그냥 묻히는 배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항상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다 왔다.”

이곳이 첫 번째 전장이다.

#

스튜디오 위쪽에 위치한 컨퍼런스룸에 관계자들이 모였다. 감독, 작가를 비롯한 출연진 전원이었다. 진호는 이때 처음으로 다른 배우들을 만났다.

“여긴 성 근호 배우님. 불같은 경찰에서 조연으로 나오셨지.”

“처음 뵙겠습니다. 진호라고 합니다.”

“이쪽은 윤문호 배우님. 전에 나랑 드라마 같이 한 적 있어.”

돌아가며 인사하는 것도 일이었다.

다행이라면 은서가 제법 인맥이 있다는 점.

18살에 아이돌로 데뷔해서 차근차근 배우 쪽 커리어를 밟아 온 덕분에 견문은 넓었다.

“오. 자네가 그 친구구만. 연극 잘 봤네.”

“감사합니다. 부족한 연기로 괜히 눈만 버리게 한 건 아닐까 싶네요.”

“어이쿠, 부족한 연기라고? 거기서 더 나가면 뭐가 되려고 그러나. 난 우리 극단 애들한테 좀 보여주고 싶던데.”

“오호라. 이 친구가 그 친구였어? 자네가 보여준 연극?”

“그렇다니까. 화면보다 실물이 더 낫구만.”

그러다 몇 명이 진호를 알아봤다.

고작 대학 축제 연극 무대 영상에 불과했지만 알음알음 퍼진 소문은 꽤 영향력이 컸다.

특히, 연극판에 위치한 사람들이 더 그러했다.

“이거 용돈벌이나 하나 싶었는데 재미있겠어.”

“자넨 마주치는 씬도 없지 않나?”

“없으면 감독님한테 하나 만들어 달라고 떼라도 써 보게. 그렇게 연기하는 배우는 오랜만에 봐서 말이지.”

어느새 진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드라마 주 조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연차 있는 배우들이었다. 서로 안면도 있고 대화를 나누는데 어색함이 없었다.

“자자. 배우님들 사담은 그 정도로 하시고 자리에 착석해 주시죠.”

“어이쿠, 감독님이 하라면 해야지.”

“군소리 말고 들어나 가셔. 이렇게 뭉쳐 있으면 괜히 사람들 뿔낸다고.”

“아니 우리가 뭐 어쨌나?”

결국 감독인 지남운이 상황을 통제했다.

리딩 전 잠깐 사담을 나누고 분위기를 훈훈하게 하는 건 크게 상관없는 일.

하지만 지금은 중재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또 저 새끼네.”

독이 잔뜩 오른 듯 보이는 남일수였다.

그는 이번 드라마의 주연이며 협찬사인 AJ에서 밀어주는 주력 상품.

어떻게 따져도 그가 상황의 중심이 돼야 한다.

하지만 보다시피 중심이 되는 건 진호였다.

“이번에는 전처럼은 안 될 거다.”

이미 AJ쪽에서 드마라 자체에 압력을 넣고 있다.

주연 분량을 확보하고 남일수라는 캐릭터를 밀어주기 위해서.

연기력?

다 떠나서 진호가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무리 연기력이 좋아도 분량이 확보되지 않으면 결국 의미 없는 일.

이번에야 말로 누가 주연인지를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씬 1-1. 시작하겠습니다.”

남일수가 대본을 움켜쥐었다.

#

남일수의 극중 캐릭터와 진호의 극중 캐릭터 남호가 만나는 건 씬 6-2가 처음이다.

아직 미호에 대한 감정을 깨닫지 못한 남주와 미호를 흥미롭게 여기기 시작한 남호의 대척 지점이었다.

표현하자면 라이벌간의 긴장감이 시작되는 부분.

“사장이라고 일을 그렇게 막 시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남일수의 극중 캐릭터, 진수는 정의감 넘치는 열혈 소년 느낌. 친구인 미호가 아르바이트에서 시달림 비슷한 걸 당하자 남호에게 따지러 온 것이다.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요! 사장이라는 지위로 미호를 계속해서 괴롭히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겁니다!”

남 일수의 연기는 제법 그럴싸했다.

초반 연기를 상당히 많이 준비 한 듯 쏘아붙이는 발성이 강력했다.

주변의 배우들 중 몇 몇도 ‘이놈 봐라.’라는 얼굴이었다.

“미호 양과 그쪽은 무슨 관계인 거죠?”

하지만 진호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다.

극중 캐릭터 남호는 차갑고 냉정한 성격.

그의 시선에서 미호는 흥미를 끄는 대상에 불과했고 진수는 시끄러운 날 파리였다.

시선은 차갑고 대응은 무가치했다.

“친구입니다, 친구! 내 얼굴 똑똑히 기억해 두십시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까.”

“가만히 안 있는다.”

약간의 분노.

하지만 이건 주왕의 그것처럼 난폭한 것이 아니다.

남을 깔보는 오만함이 기본에 있으나 타인의 시선과 명분을 중요시 여기는 냉정함도 섞여 있다.

이 쥐새끼는 무엇일까.

눈매가 가늘어졌다.

“미호 양은 아르바이트생 신분입니다. 그녀의 실수를 가게주인인 제가 지적하는 것은 상리에 맞는 일. 타인에 불과한 당신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만.”

“친구라고 했을 텐데요? 그쪽이야 말로 가게주인이라는 말로 사람을 막대하지 말라 이겁니다.”

“당신 참 귀찮군요.”

날 파리에서 귀찮은 장애물로 인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남호 자신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미호에게 관심을 주던 상황.

그런 그에게 진수라는 존재는 거추장스러웠다.

치워버리고 싶은.

길가에 놓인 돌멩이 같은 존재였다.

“진수 씨. 이름이 진수 맞죠?”

“그, 그런데요?”

거리는 멀었지만 서로의 목소리는 가까웠다.

“정말로 미호 씨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철없이 날뛰지 마세요. 이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 미호 씨가 좋아할까요?”

“그건 당신이 상관 할 바가 아닙니다! 나는 미호의 친구고 당연히······”

“멋모르고 설치다가 파리채에 깔려 죽는 파리도 자신이 나는 건 당연하다 여겼겠죠. 명심하세요. 당연한 건 없습니다.”

날 파리의 날개를 뜯어서 죽이는 건 쉽다.

하지만 그 날 파리를 죽여서 손이 더러워진다면 그게 더 귀찮을 뿐이다.

그냥 쫓아내면 되는 일.

창백한 얼굴의 저 날 파리처럼.

“일수 씨, 대사.”

“아, 아! 죄송합니다.”

호흡이 깨어지고 상황이 다시 본래의 것으로 돌아왔다. 진호는 눈을 깜빡이며 몸에 스며든 남호의 캐릭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바로 다시 갈까요?”

“아뇨. 잠깐 쉬었다가 가죠. 일수 씨도 수습을 해야 하고. 진호 씨도 호흡을 정리해야 하니까요.”

흐름을 정리한 건 감독, 지남운이었다.

그는 진호와 일수가 씬을 연기하는 순간부터 진지한 얼굴로 관찰하고 있었다.

그가 본 일수의 연기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조금 다급하고 열형인 진수의 캐릭터를 그럴싸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역인 진호의 연기였다.

“압도됐죠?”

“네. 처음에는 그럭저럭 팽팽했는데 어느 한 순간부터 잡아먹히더군요.”

“감정의 깊이에서 차이가 심해요. 단순하게 목소리 높이는 정도로는 진호 씨의 저······뭐라고 해야 할까. 살기? 위압감? 하여튼 저런 거에 맞설 수가 없겠네요.”

“무시무시하네요.”

지남운 뿐만이 아니라 메인 작가 윤숙주도 같은 입장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일수의 연기가 나쁜 것이 아니다.

이번에는 진호의 연기가 지나치게 좋은 것이었다.

주인공이 단번에 화면에서 집어 삼켜질 정도로.

“이래서야 누가 주연인지 모르겠네.”

누군가의 속삭임이 속마음을 대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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