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 이렇게 한 걸음(3)
하윤은 걱정어린 시선으로 촬영장을 바라봤다.
진호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린 자신을 얕잡아 보거나 일하는 것에 어중간함이 없었다.
그렇기에 잔뜩 모인 단역들 중에서 그에게 말을 건 거였다.
“불안한데.”
그런 사람이 이런 씬에 투입되는 것이 불안했다.
하윤은 단역으로 여러 곳을 다녀본 만큼 배우들이 생각만큼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감정을 소모하는 직업답게 다혈질이고 날카로운 사람이 많았다.
주연인 남일수가 전형적이었다.
한껏 바람이 들어가서 ‘배우님, 배우님’소리에 콧바람 뀌고 다니는 인간. 자기도 오디션 출신이면서 단역이나 조연을 무시하기가 일쑤인 인간이었다.
감정의 골이 생긴 이상 진호에게 무슨 일을 할 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걱정 할 거 없어. 진호 씨라면 능숙하게 받아 낼 거니까.”
“아, 저기. 은서······”
“누나라고 불러. 그편이 편하지?”
“그, 그래도 돼요?”
불쑥 다가온 은서에 하윤이 바짝 얼었다.
“넌 진호 씨 제대로 연기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지?”
“네, 네. 무슨 연극이 유명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본 적은 없어요.”
“그래. 그걸 봤으면 저기 있는 얼빠진 놈하고 씬 하나 찍는 걸 걱정 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일수 배우님이요?”
“배우님은 무슨. 내가 저딴 놈 하나 둘 본 줄 아냐? 반짝 떠서 자기가 잘난 줄 아는 놈. 어차피 거품 걷히면 사라질 놈이라고.”
거침없는 말에 하윤이 되레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촬영 준비에 바빠 두 사람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더 잘 알지.”
“네?”
“나도 아이돌 출신이잖아. 이 바닥 처음 들어왔을 때 저 인간하고 비슷한 모양새였어. 아니, 최근까지도 그랬지. 헛바람 잔뜩 들어서.”
아이돌을 연기 판에 가져다 쓰는 건 거의 대부분이 인지도 때문이다.
감독이나 연기자의 생각이 어떻든 아이돌은 그 자체로 일반 배우보다 훨씬 많은 티켓파워를 가지고 있다.
소속사나 협찬 회사 등과의 금전적 관계도 그러하고.
하여튼 그런 속물적인 이유 때문이라도 연기 판에 뛰어 든 아이돌은 신주단지가 된다.
어르고 달래서 어떻게든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배우님, 배우님 하고 스텝들이 괜히 수발 드는 게 아니다.
‘나도 그랬으니까.’
진짜 연기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아, 시작하네요.”
“백 마디 설명하는 것보다야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때마침 촬영이 시작되었다.
카메라 앞에 배우들이 자리를 잡고 감독의 신호 하에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저건 거의 연기가 아닌데요?”
일진을 향해서 숨겨 두었던 힘을 내보이는 주인공.
그 손속이 정해진 합보다 거칠고 말투도 훨씬 강경했다.
어찌 보면 지금껏 보인 연기 중 최고.
“저럴수록 진호 씨만 돋보이지.”
하지만 은서는 코웃음만 쳤다.
그녀도 당해봤기 때문에 진호의 연기가 어떤 것인지를 대충 알고 있다.
어설프게 감정을 실어봐야 쓸려 갈 뿐이다.
진호의 연기는 단순한 흉내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니까.
“커······커어어엇!!!”
감독의 비명에 가까운 사인이 이를 방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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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일수는 이해 할 수 없었다.
이 씬에서 주인공은 자신이었다.
한껏 억눌려 있던 주인공이 힘을 뽐내면서 카타르시스를 내보이는 장면이었다.
“컷. 컷. 다시 한 번만 가자. 일수야 힘 빼고. 너무 힘이 들어갔어.”
헌데, 왜 자꾸 포커스를 빼앗기는 걸까.
힘을 주면 줄수록 자꾸 카메라 앵글에 진호의 모습만 크게 담기고 있다.
감독, 카메라맨, 다른 스텝들 모두.
주연인 자신이 아니라 단역에 불과한 진호를 바라봤다.
“나, 난 그동안 참았을 뿐이야. 이제부터는 참지 않아.”
“커엇! 일수야, 대사. 그걸 더듬으면 어떻게 하냐? 어려워? 좀 쉬었다가 할까?”
“아뇨! 할 수 있습니다.”
“잘 좀 하자. 기껏 진호 씨가 좋은 장면 뽑아주고 있는데.”
뒤의 말은 거의 중얼거림에 가까웠지만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남 일수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났다.
고작 단역 때문에 자신에게 핀잔을 주는 것이 말이 된단 말인가.
무려 오디션 프로그램 우승자란 말이다.
당장 예능 게스트로만 가도 동시대 시청률 탑으로 뽑을 수 있는 히든카드.
“화 좀 풀고 가자고. 그렇게 몸에 힘이 들어가서야 제대로 연기가 되겠어?”
“······너. 지금 나한테 조언을 하는 거냐?”
“하루 종일 이 씬만 찍을 셈이냐? 부족하면 다른 사람 충고도 좀 들을 줄 알아야지. 회사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입 조심해라. 단역 따위가 어디라고 나한테 입을 털어? 어?”
“그렇게 억울하면.”
진호가 카메라를 정면에 둔 채 주저앉았다.
눈은 살짝 풀어져 있고 표정에서는 분노와 황당함 등이 뚜렷하게 드려지고 있었다.
“연기를 제대로 하든가.”
“그렇지! 지금 딱 좋습니다! 일수야 이대로 한 장면만 제대로 건지자!”
“······으으.”
“감독님 말 들었지?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하자.”
이미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진호의 말대로 억울하면 연기로 맞대응을 해 줘야 한다.
‘시팔! 시팔!!’
하지만 말이 쉽다.
대체 이 눈은 뭐란 말인가.
왜 단역에 불과한 놈이 저런 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분노와 허망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시선.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여실하게 느껴지는 눈동자의 흔들림.
무엇을 어떻게 쥐어짜도 저것에 맞출 수 있으리란 생각이 안 든다.
“자, 잠깐만 쉬었다가 할게요.”
결국 연기로 맞불을 놓는 건 포기했다.
실망한 감독의 한숨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씬을 제대로 완성 한 건 그로부터 2시간 뒤.
그마저도 주연인 남 일수의 연기를 카메라 워킹으로 덜어낸 후였다.
“이 씬. 누가 주인공인지 모르겠는데?”
“그러게요.”
잠시나마 주연이 바뀌는.
기괴한 씬이 완성되었다.
#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은서가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가며 감독과 스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들 후련한 얼굴로 덕담을 전해 주었다.
“수고했어. 고생 많았지?”
“소윤 언니. 나 마지막 씬 어땠어?”
“최고. 내가 넌 네 연기 중에서는 최고였어.”
“진짜? 농담 없이.”
“정말로. 요즘 완전히 연기 물올랐다고. 감독님도 깜짝 놀랐다고 하잖아.”
소윤의 말에 은서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에는 입 발린 말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연기가 확실히 늘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야 하나 봐. 나 이제 연기가 뭔지 좀 알겠어.”
“어이구, 그러세요? 사장님이 들으면 아주 박수 치면서 춤추겠네.”
“진짠데. 적어도 저기 저 멍청이 보다는 내가 연기에 더 진지하잖아.”
“뭐, 그건 사실.”
소윤과 은서가 나란히 키득거렸다.
두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어딘가 축 늘어져 있는 남일수가 있었다.
그는 진호와의 씬 이후로 기세를 회복하지 못했다.
여주인 은서와의 씬에서도 밀리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덕분에 후반 씬은 은서가 주가 되어 극을 이끌어갔다.
“제작사 측에서는 뭐라고 안 하겠지?”
“들어보니까 그쪽에서도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던데? 후반에 연기력이 싹 올라오니까 처음부터 네가 주인공인 느낌도 들고.”
“좋았으. 아, 근데 이거 방영이 언제라고 했지? 인터넷으로 동시 송출이었나?”
“어. 방영은 2주 후. 플렛폼 몇 개 동시에 탈거야.”
사전제작에 인터넷 송출이 주력인 드라마지만 그래도 나름 인지도는 있다.
주연 싸움에서 먹고 들어가 연기력 인정을 받으면 다음 작품에도 도움이 된다.
실패한 남일수는 반대 경우고.
“아, 그러고 보니 너 진호 씨한테 연락 왔더라. 촬영 스캐줄 끝나면 연락 달라고. 그때 연극 함께 한 사람들 모여서 회식 한 번 하자는 거 같던데.”
“진짜? 어디 봐봐.”
은서가 냉큼 폰을 빼앗아 살폈다.
한 시간 전 즈음에 진호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건조한 문장으로 고작 세 줄이 전부였지만 은서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언니, 나 스케줄 조정 되지?”
“안 되면? 펑크내고 가려고?”
“아, 언니. 언니. 언니. 된다고 말 해 줘. 응?”
“에휴. 아직 애다, 애. 진호 씨랑 연락해서 시간 잡아 봐. 나머지는 내가 사장님한테 말해서 조정해 볼 테니까.”
“히히! 역시 언니밖에 없다니까.”
“아오, 징그러워. 달라붙지 마.”
달라붙는 은서를 떼어내며 소윤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얼굴은 웃고 있었다.
최근 들어 은서는 일이면 일 연습이면 연습 소홀하게 하는 것이 없었다.
근 몇 달 내로는 아마 최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동기부여가 다른 거니까.’
이유라면 뻔하다.
“그렇게 좋을까.”
“뭐, 뭐가!?”
“아니다, 요것아.”
아직도 어리게만 보이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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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시선이 달라졌을 느꼈다.
전에, 동아리 객원으로 연기 연습을 할 때는 솔직히 반 반 이었다.
잘 한다며 감탄하는 시선이 절반에, 동아리 사람도 아닌데 불편하다는 시선이 절반.
하지만 지금은 동경의 시선으로 통일됐다.
“아, 진호 오빠. 왔어요?”
“어. 오늘 사람이 많네?”
사적으로도 제법 친해진 아영이 가장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오빠 온다고 하니까 다들 구경 왔죠. 인사 한 번 해 줘요.”
“인사?”
“손이라도 흔들던가.”
그래야 하는 걸까 싶어서 진호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일제히 환호성을 쏟아냈다.
반응이 연예인 팬클럽 못지않았다.
“뭐야. 다들 왜 이러는데.”
“뭐긴 뭐에요. 다들 오빠 팬이죠. 그날 연극보고 싹 다 반했다잖아요.”
“그, 그래?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팬 카페 생긴 거 알면 더 부담스럽겠네요?”
“팬 카페? 야. 내가 뭐라고 그런 게 생겨?”
“에이. 팬 카페가 뭐 별거 있나. 그냥 만들고 싶으면 만드는 거지. 참고로 카페 회장은 접니다.”
아영이 손으로 브이자를 만들었다.
동아리 회장을 맡을 만큼 행동력 하나는 발군이었다.
“어쩐지 난리 났다 싶더니. 온 거냐?”
“아. 서훈 선배. 오늘 일 있어서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우글거리는 팬 무리를 가르며 서훈이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퀭 한 것이 썩 편안한 일상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자리에 내가 없으면 되냐? 불태웠지.”
“오. 열혈 직장인. 술자리를 위해서라면 능률이 몇 배가 되는 거군요.”
“자식이. 이 오빠의 카드가 필요하지 않은 거냐?”
“어머. 장래의 PD님. 고생이 많으셨죠? 야야, 다들 뭐하냐. 와서 어깨 좀 주물러 드려.”
가난한 대학생들 눈에는 직장인의 카드가 금보다 귀하다. ‘아이고 사회인 님.’이라며 후배들이 우르르 몰려와 서훈을 파라오처럼 모셨다.
낄낄 거리며 즐기는 모양새가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그보다 진호 오빠. 은서 연기랑 같은 드라마에서 연기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은서 언니가 엄청 자랑했죠. 오빠 연기가 어떻고 저떻고. 아주 그냥 새벽에 톡이 쏟아져서 잠도 못 자게 하고.”
“푸하하. 너만 그런 줄 아냐? 나한테는 아예 진호 너 드라마든 뭐든 섭외하라고 아주 강매야. 누가 보면 낭군님 외조하는 줄 알겠어.”
두 사람의 말에 진호가 머쓱하니 뒷머리를 긁었다.
은서의 이런 행동이 고맙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는 아직 지연에 대한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그보다 좀 들어보자. 단역으로 뛰어보니 어때? 도움은 되냐?”
“일단 단역이라는 거. 생각보다 굉장히 힘들더군요.”
“하하. 힘들지. 대기도 길고 단순한 행동을 무리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내야 하니까.”
“게다가 단역은 몰입이 쉽지 않았어요.”
후반에 대사를 받은 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병풍 역할이었다. 뛰고, 서 있고, 스쳐서 지나가고. 이 역시 캐릭터라면 캐릭터지만 이입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은서 언니는 오빠가 주연배우도 발랐다고 하던데.”
“아, 그건 사연이 좀 있어. 대치하는 연기이기도 했고. 그 전에 한 단역에서는 솔직히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
“오. 진지해, 진지해.”
진호는 자신의 한계점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전생을 통한 캐릭터의 이입은 사기에 가까운 능력.
하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단역 아르바이트를 뛰는 하윤이보다도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그걸 느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우리 대단하신 박 감독님이 괜히 널 단역부터 시킨 게 아니니까.”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배우라?”
“연기라는 건 마라톤이야. 몇 장면 정도야 좋은 감정이나 호흡으로 끌어 낼 수 있겠지. 하지만 장편은? 몇 시간이 넘는 촬영은? 그런 걸 소화하기 위해서는 극이 요구하는 다양한 요소들도 이해 할 필요가 있어.”
“으아. 선배, 진지하니까 재수 없어요.”
“카드 아직 내 손에 있다.”
“야, 뭐하냐. 세게 주물러.”
분위기는 장난스럽지만 말 자체는 그렇지 않다.
진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훈의 말을 새겨 들었다.
그 역시 단역을 하면서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그보다 은서 요것은 왜 안와?”
얼추 충고 비슷한 말이 지나가고 서훈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은서를 찾았다. 오늘 회식 자리는 그녀가 소집한 것과 다름없었다.
“제가 연락해 볼까요?”
“어. 요것이 아주 연예인이라고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알어. 지각이면 1차 쏘는 거라고 전해.”
“애들아, 일단 카드부터 뺏어 놔.”
굶주린 후배들을 출동시키고 아영이 은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응?”
하지만 상대 쪽에서 통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문장 하나가 톡으로 날아왔을 뿐이다.
못 가. 미안해.
아영의 얼굴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어머. 세상에! 아영 언니! 뉴스 봐요, 뉴스! 가쉽면!”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다른 후배가 알려 주었다.
던질 듯 폰을 들고 와서는 연예면 기사 하나를 떡하니 보여 주었다.
[아이돌 출신 배우 박 은서. 핑크빛 열애설?]
촬영장 배경.
뒷모습만 보이는 한 남자와 다정히 앉아 환하게 웃고 있는 은서의 사진이었다.
사진 아래로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제보자의 두루뭉술한 말들이 늘어서 있었다.
“회사. 나 죽음.”
뒤이어 톡으로도 상황에 대한 부연설명이 전해졌다.
내용은 짧았지만 앞뒤를 맞춰보기에는 충분한 길이였다.
“이거 진호 오빠 아니에요?”
“······그런 거 같다.”
그리고 동아리에 남은 모두는 사진 속 뒷모습이 누구인지 한 눈에 알아봤다.
은서의 스캔들 상대는 진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