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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10화 (10/178)
  • Chapter5. 이렇게 한 걸음(1)

    지글지글.

    불판 위에서 삼결살이 익어갔다.

    빨갛게 버무린 파 무침과 구워 둔 양파도 그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 술이 어찌 빠질까.

    테이블 빈 곳 마다 잔들이 자리 잡고 온 몸 가득 소주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술자리였다.

    “응하하하! 이제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네!”

    “죄송합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가고 말았네요.”

    “아이고, 죄송은. 이해하네. 이해해. 그 정도 감정 연기를 했으면 추스르는 것도 일이지. 암. 그렇고말고.”

    크게 웃으며 잔을 건네는 것은 박종찬이었다.

    그는 연극 무대가 끝났을 당시에 진호를 만나보고 싶어 했으나 무산됐었다.

    무대를 끝낸 진호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서 혼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겨우 감정을 정리하고 술자리 약속을 잡은 것이 오늘.

    연극이 끝나고 딱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자자, 군소리는 그만 됐고. 한 잔 받게.”

    자리 한 건 박종찬과 서훈.

    진호 세 사람이 전부였다.

    아영은 수업이 은서는 스케줄이 있었다.

    “그래. 이 친구에게 듣자니 원래는 회사원이라고?”

    “아. 회사원이었죠. 얼마 전에 그만 두고 나왔거든요.”

    “아, 그래? 연기를 위해서 그만 둔 건가?”

    “하하. 전혀 아니에요. 그냥 뭐, 평범한 이유였죠. 연기에 대해서 관심 가진 건 그 이후고요.”

    가득 채운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로 진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가 회사를 그만 둔 이유, 그 이후의 행적, 연기에 대한 관심이나 배움 정도.

    “익히 알고 있는 캐릭터에 이입해서 연기를 한다. 이건 또 재미있는 방식이군.”

    “선배도 봤다시피 그 이입 정도가 남달라요. 이 정도로 깊은 매소드 연기는 원로 배우들 중에서도 진짜 몇 명 못 봤다니까요.”

    “흠. 확실히 대단하긴 해지. 하지만 매소드 연기라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니야.”

    “······아. 그런 겁니까?”

    연기에 대해서라고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쌈 위로 마늘을 올리며 진호가 물었다.

    “극 중 캐릭터에 완벽하게 몰입한다면 이론상으로야 최상이지. 하지만 생각을 해 보게. 모든 배우가, 모든 상황이 정해진 시나리오를 다 따라 갈 수 있으리라 보는가?”

    “한계가 있다?”

    “그렇지. 자네가 완벽을 추구해도 상대가 따라오지 못하면 그건 이질적인 장면일 뿐이네. 연기는 결국 합이야. 요즘에야 CG범벅에 개별 연기를 교차 편집으로 우겨넣는 일이 많아졌지만 결국 극 전체를 만드는 건 배우간의 호흡이거든.”

    진호는 문뜩 그 날의 연극을 떠올렸다.

    깊은 허무감에 휘감겨 여우를 연기하던 순간.

    갈피를 못 잡아 흔들리던 은서의 얼굴이 여실했다.

    “딱, 짚이는 곳이 있구만. 은서 양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지?”

    “귀신이네요. 네, 맞아요. 마지막에 호흡이 차오르는 시점에서 감정의 흔들림이 있었어요. 간신히 연결은 했지만 못내 아쉬운 부분이었죠.”

    “그야 어쩔 수 없지. 자네는 완벽하게 몰입을 했다지만 은서 양은 그러지 못했거든. 아니, 은서 양만이 아니네. 보통은 못 해. 그런 거.”

    박종찬은 딱 잘라 말하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면서도 눈빛은 칼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럼 제가 몰입을 덜 했어야 하는 건가요?”

    “웅하하하! 그렇게 할 수 있나?”

    “······글쎄요. 어려 울 거 같은데.”

    “그래, 그래. 자네 같은 태생적인 연기자들은 그런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있지.”

    “태생적인 연기자?”

    “그냥 타고난 거. 연기가 개쩔어서 타인과의 눈높이가 안 맞는 거. 이 바닥에서 일하다 보면 가끔 그런 사람을 보곤 하지. 뭐, 자네 정도는 나도 처음이지만.”

    박종찬은 낄낄 거리며 술을 넘겼다.

    벌써 테이블 위에는 빈 술병이 다섯이었다.

    ‘천천히 좀 마셔요.’ 서훈은 나직이 타박하면서도 술 주문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요?”

    “글쎄. 그것까지야 나도 모르지. 내가 영화감독이긴 하지만 연기자인 건 아니니까.”

    “아······그렇군요.”

    진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흐흐. 아쉬워하는 건가?”

    “뭐, 그렇죠. 그 무대. 더 멋지게 만들 수도 있었는데. 호흡만 더 잘 맞았어도 감정이 새지도 않았을 거고. 아쉬움은 어쩔 수 없네요.”

    “자네는 연기자도 아니지 않은가. 동아리를 찾아 온 것도 자신의 성질을 조절하기 위함이었지 않나. 이번 연극을 통해서 그 정도는 다 이룬 것 같은데?”

    “그야 그렇죠······”

    확실히 늙은 여우로 연기하면서 전생에 대한 걸 어느 정도 조절 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조조가 되든 조운이 되든.

    심지어 살인마 잭더리퍼가 되더라도 완전히 그 캐릭터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바라던 바는 이루었다.

    ‘분명 그럴 텐데.’

    가슴 속에 남은 깊은 아쉬움은 무엇일까.

    조조나 조운 같은 비범한 사람을 흉내 내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게 된 걸까?

    늙은 여우를 통해서 알게 된 캐릭터의 창작?

    자신이 원하는 색을 더해서 또 다른 존재를 만들어가는 그런 즐거움?

    답이라면 이미 알고 있다.

    “연기가 재밌어요. 연습하는 것이 즐거웠어요. 그런 걸 알아 버렸는데 이제 와서 만족하고 그만 두라는 건 너무해요.”

    “웅하하하! 연기에 훅 빠져 버렸구만.”

    “······네. 아무래도 그런 거 같네요.”

    평생을 ‘전생 체험’에 휘둘려 왔었다.

    스스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 ‘미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것이 일상.

    하지만 연기는 다르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 그 삶을 그려낸다면 박수와 환호를 받을 수 있다.

    드디어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전생 체험’을 사용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야 겨우 사는 보람을 알게 되었는데.

    “흐흐흐. 좋구만. 좋은 눈이야.”

    박종찬이 남은 잔을 탁, 내려놓으며 웃었다.

    연기에 대한 재능뿐만이 아니라 마음 역시 마음에 든다.

    적지 않은 나이?

    배우 같지 않은 얼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여기,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연기의 본질에 가장 깊이 닿아있는 보석이다.

    “어때. 엑스트라부터 해 볼 생각 있나?”

    갈고 닦으면 어떤 광채가 나올까.

    박종찬은 두근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

    은서는 조금 짜증나는 얼굴로 거울을 봤다.

    메이크업 상태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스텝으로 따라 온 애가 새로 들어온 것 같았다.

    이걸 불러서 말해 말아.

    고민하고 있던 차에 매니저, 소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씬 끝났다. 30분 내로 네 차례 올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어휴, 드디어.”

    “앓는 소리 마. 스케줄 뺀 건 너잖아.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누가 뭐래. 그냥 그렇다는 거지.”

    대학 공연 때문에 스케줄을 조정해야 했다.

    덕분에 하루를 이틀같이 살고 있다.

    “그래도 덕분에 평가는 좀 올라갔다. 평단에서도 널 새롭게 봤다더라.”

    “진짜? 코멘트 나온 거 있어?”

    “월간 극단에서 짤막하게. 윤호중 선생님이 연극을 봤나 봐. 몇 마디 적어 주셨어. 전보다 연기가 나아 졌다고 하더라.”

    “아싸! 내가 그러니까 무대에 선 거지. 하여튼 우리 사장님은 장기 비전이 없다니까.”

    윤호중이라면 연극 무대 쪽에서는 잔뼈가 굵은 인물.

    그런 사람에게 호평을 받았다면 연기 경력에 있어서 청신호가 켜진 격이다.

    “아. 진호 씨는? 진호 씨 평가는 없어?”

    “헤에. 갑자기 그 사람이 궁금해진 거냐?”

    “뭐, 뭐래. 같이 호흡 맞춘 사람이잖아.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하지.”

    “주연은 따로 있었는데?”

    “아, 진짜. 있어 없어!?”

    빽 소리치는 은서에게 얄궂게 웃어 보이며 소윤이 스크랩한 평가를 보여 주었다.

    한 두 줄에 불과한 다른 사람 평가와는 다르게 진호에 대한 평가는 무려 다섯줄이었다.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 아직은 다듬어 지지 않은 재능.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될 자질이 엿보인다. 와. 이건 극찬 정도가 아닌데?”

    “다들 놀랐잖아. 윤호중 선생님이 후배들에게 덕담을 자주 하긴 하지만 이 정도까지 칭찬하는 사람은 없었거든.”

    “다른 선생님들도 코멘트 하셨어?”

    “아니. 일단은 말을 아끼는 분위기야. 어찌 됐든 연극 하나일 뿐이잖아. 인생 연기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많아.”

    “인생 연기는. 그런 게 그냥 불쑥 나올 수 있나.”

    은서가 입술을 비죽였다.

    평가는 진호에 대한 것이었는데 왠지 그녀가 불만스러웠다.

    “어쭈. 요것 봐라?”

    “뭐, 뭐뭐뭐. 내가 뭐 어쨌다고.”

    “아이고? 아주 말까지 절절 저시네? 이거 너 팬들이 보면 오열한다?”

    “아 진짜. 뭔 소리래! 가서 씬 얼마나 남았는지나 보고 와!”

    “네, 네. 우리 배우님이 말하시면 들어야지.”

    소윤이 잘게 웃으며 빠져나갔다.

    ‘뭐래, 진짜.’ 은서는 혼자 남아서도 한 동안 얼굴에 올라온 열기를 식혀야 했다.

    거울로도 얼굴이 붉어진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

    은서는 케이블 N-TV에서 하는 청춘 드라마 ‘바람 부는 공원’의 여주인공으로 낙점 되었다.

    꿈 많고 낙천적인 여자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온갖 굴곡을 다 겪게 된다는, 어찌 보면 뻔 한 스토리의 인물이었다.

    “컷! 오케이!”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씬에 오케이 싸인이 나오고 은서가 물러났다.

    서브 남주와의 감정 교류가 있는 장면이었다.

    “은서 씨. 연기 많이 늘었는데?”

    “진짜요, 감독님?”

    “전하고 시선 처리부터 다른데 뭐. 그 사이에 연기 수업이라도 받았나?”

    감독인 서남길과는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한창 아이돌을 하고 있을 무렵에도 드라마에서 짧게나마 만난 이력이 있었다.

    당시 서남길이 은서를 평가하기를 ‘아이돌이라도 잘 하면 다행인 아이.’

    지금의 호평은 이례적인 거였다.

    “제가 또 열심히 배우는 타입이잖아요.”

    “어이구, 그 사이에 또 기고만장한다.”

    “헤헤. 감독님 칭찬이 어디 뭐 흔한가. 이럴 때 콧대 좀 세워 둬야죠.”

    “푸하. 농담도 늘었네? 뭐, 그래도 이왕 실없을 거면 실력 좀 챙기고 없는 게 낫지. 나머지 촬영도 지금처럼 쭉 가자고.”

    “예써!”

    장난처럼 답하지만 은서의 두 주먹은 피가 안 통할 만큼 꽉 쥐어져 있었다.

    근래 들어 찍은 드라마에서 연기로 호평 받아 본 적이 있었을까?

    의례적으로 하는 ‘수고했어요.’ 말고는 처음일 것이다.

    “언니. 들었지? 나 연기 늘었데.”

    “어, 야. 진짜 늘었어. 이상한데. 우리 은서 연기 실력이 갑자기 늘리가 없는데.”

    “아, 뭐래.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어쩌냐?”

    “어우 야. 발연기가 갑자기 사람답게 변했잖아. 혹시 그 연극하고 나서 연기에 대해서 뭐라도 깨달은 거냐? 대오각성?”

    “대오······그게 뭔지는 모르겠고. 그냥 좀 편해. 연기하는 게.”

    태풍을 겪고 나면 산바람 정도는 쉬운 느낌?

    그 날 연극 무대에서 진호가 뿌렸던 아우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걸 버티고 서서 감정선을 연결하지 않았는가.

    그 수준까지 해 냈는데 고작해야 평범한 감정선 연결에 어려워 할 이유는 없다.

    ‘그럼 이것도 다 진호 씨 덕분인가?’

    조금은 어수룩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왠지 숨이 조금 가빠지는 느낌이었다.

    “자, 그럼 다음 씬. 엑스트라 분들 입장할게요.”

    “야. 다음 씬 촬영 들어간다.”

    “어, 어. 성환 오빠 추격씬인가?”

    다음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은서가 물러났다.

    주인공인 김 성환이 같은 반 일진에게 쫓기는 씬이었다.

    일진 역의 조연과 엑스트라 10명이 동원되었다.

    “······어?”

    그런데 그 엑스트라 10명 중 어딘가 낯익은 사람이 있다.

    은서가 눈을 깜빡이며 앞으로 다가갔다.

    “컷! 컷! 은서 씨. 앵글에 들어와.”

    “야, 야! 뭐하는 거야!?”

    “어? 어머! 죄송합니다, 감독님.”

    너무 깊이 들어갔던 모양이다.

    은서가 황급히 카메라 앵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선은 뒤에 선 엑스트라들에게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급발진이야? 갑자기 뭔데?”

    “아니. 언니, 언니. 저기 엑스트라 중에 진호 씨 닮은 사람 있지 않아?”

    “뭐? 너, 증상이 심각하구나? 여기에 진호 씨가 왜 있······어머나. 진호씨네?”

    소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은서의 손짓 따라 도착한 곳에 고등학생으로 분장한 진호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늙었는데, 라고 따져 묻고 싶은 비주얼이었다.

    “······설마 나 있는 줄 알고 온 건가?”

    “야. 정신 차려. 너 스케줄을 진호 씨가 어떻게 아냐? 그리고 저건 아무리 봐도 엑스트라잖아. 그냥 아르바이트 삼아서 나온 거 아닐까?”

    “엑스트라로? 진호 씨 연기면······”

    주연도 모자라다.

    은서가 뒷말은 삼켰다.

    연기력과 주연 자리에 큰 거리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연차였다.

    “그럼 혹시 본격적으로 연기에 뛰어들 생각?”

    “그럴 수도 있겠네. 엑스트라부터 하는 거면 완전히 본격적인 거니까.”

    “응. 응. 연기를 제대로 하는 거지.”

    은서가 들뜬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연극 무대가 끝나고 난 뒤.

    진호와는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다.

    스케줄에 치이고 연예인이라는 입장에 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배우라면?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같은 입장이 된다.

    “아. 맞다. 그럼 이럴 때가 아니지. 언니, 언니. 빨리 사장님한테 연락 해. 다른 사람들이 채가기 전에 얼른 진호 씨 계약하라고.”

    “헐. 진심이냐?”

    “어. 당연하지. 언니도 진호 씨 연기하는 거 봤잖아. 우리가 연기 전문 회사는 아니지만 나름 서포트는 되잖아. 냉큼 잡아서 키우자 이거지.”

    “사장님이 좋아할까?”

    “에이 씨. 사장 오빠는 내가 설득할게.”

    정말로 진호가 연예계에, 연기에 뛰어들 마음이 있다면 뜨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회사 사정이나 이런 건 다 부차 하더라도 그런 사람을 다른 회사에 뺏기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연기를 하고 싶었다.

    “아, 씬 시작한다. 엑스트라 뛰네.”

    “진호 씨 연기력이······!?”

    “어? 되게 못 뛴다. 진호 씨 달리기 느리네.”

    “어, 응. 그냥 뭐 달리기니까.”

    비록 지금은 조금 초라할지라도.

    은서는 엉성하게 달리는 진호를 속으로 응원했다.

    참 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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