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만 전생 배우-7화 (7/178)
  • Chapter3. 매소드(3)

    설정은 주어졌다.

    여자, 은서를 중심으로 하는 삼각관계.

    과거인지 현재인지 어떤 만남인지, 세부적인 내용은 없었다.

    모든 건 즉흥에서 이루어지는 연기.

    “진혁아. 이제 우리 그만 만났으면 해.”

    선공은 은서가 먼저 했다.

    애달픈 얼굴을 한 채 진혁을 떠나보내는 연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무슨 소리야, 은서야. 이제 다 끝났다고. 그 인간하고는 정리하기로 했잖아. 약해지지 마.”

    진혁은 그런 은서를 ‘연인을 보내고 갈아타는 여인’으로 설정해 버렸다.

    덕분에 애달파 보이던 은서의 얼굴이 조금 퇴색되었다.

    “그만 해. 잠깐 흔들렸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이를 떠날 수는 없어. 날 더 이상 나쁜 여자로 만들지 말아 줘.”

    은서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설정을 덧붙였다.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여자.

    하지만 본래의 연인을 배신하지 못하는 그런 설정이었다.

    “이제 와서? 그럼 그날의 하룻밤은 뭔데? 날 향해 속삭이던 말은 뭔데?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말 하는 거야? 웃기지 마, 은서! 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진혁은 은서의 설정에 구멍을 파버리며 자신의 감정을 극화시켰다.

    순식간에 감정의 중심이 진혁 쪽으로 옮겨갔다.

    ‘이 새끼. 조금 하네?’

    은서는 살짝 움찔했다.

    “하하. 그대의 사랑은 굉장히 편협하구려.”

    그 순간이었다.

    침묵하고 있던 진호가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다만, 그 어투가 너무 연극톤이라 이질적이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보던 아영과 서훈의 미간이 꿈틀 할 정도로.

    “어찌하여 아름다운 이를 두고 다투는 것이오?”

    “너······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은서의 마음은 이미 내게로 향하고 있으니까.”

    진혁이 살짝 흐트러지던 흐름을 바로잡았다.

    그리고는 대놓고 진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톤 봐라.’

    지금 상황에서 연극 톤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연기적인 면에서 완전 빵점의 대사였다.

    “마드모아젤의 마음은 바람과 같은 것. 한때의 흐름에 취하여 그것을 사로잡으려 한다면 그대 손에 남는 건 아쉬움뿐일 것이오.”

    “뭔······크흠. 그렇게 변명이나 하는 건가? 은서가 널 떠난 것이 그저 변심일 뿐이라고? 웃기지 마. 네 우스운 꼴을 보라고. 결국 네 잘못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시오?”

    진호는 대사와 함께 한 걸음 은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금 벙쪄 있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숨이 닿을 거리로 좁혔다.

    그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누구도 막지 못했다.

    “은서. 마드모아젤. 그대의 마음이 바람에 흩날리는 꽃무리 같다 하여도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오. 햇빛을 보며 기뻐하는 해바라기처럼 흐르는 강물에 기뻐하는 연어처럼. 그대가 그곳에 있음에 내 마음은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이오.”

    “······저, 정말인가요? 날 원망하지 않는 건가요?”

    은서가 간신히 대사를 이어갔다.

    분명 진호의 연극 톤은 극과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조금씩 그 분위기에 상황이 잠식되고 있었다.

    “오, 은서. 그대의 속눈썹이 떨 때면 내 마음은 요동치오. 그대의 입술이 떨어질 때면 내 영혼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이오. 나는 이미 그대의 포로이거늘. 어찌 주인 된 자를 원망하리오.”

    “그······정도로 절 사랑하시는 건가요?”

    “사랑하오. 내 영혼이 불타, 세상 끝 먼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그대가 날 짓밟고 간다 하여도 그 흔적을 되새기며 난 사랑할 것이오.”

    이런 말 따위 느끼하고 역겹다.

    은서의 머리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잡은 진호의 얼굴, 눈빛, 말투.

    그리고 알 수 없이 뜨거운 분위기까지.

    한 번 휩쓸리니 벗어 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그, 그만! 이제 그만 포기 해! 구차하게 말로 은서를 꿰어내는 것이 네 사랑인 것이냐!?”

    진혁은 다급해졌다.

    그도 분위기가 진호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았다. 강하고 무거운 반전으로 흐름을 자신에게 끌고 올 필요가 있었다.

    “어디 말만이 구차할까. 내 얼굴, 표정, 말. 모든 것이 마드모아젤을 향한 마음에 비교하면 구차할 뿐이지.”

    “궤변이다. 말 뿐인 걸로 은서를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어. 그렇기에 은서가 내게로 온 거잖아. 배고픈 예술가 따위는 행복의 초석이 되지 못해.”

    관계를 다시 정립했다.

    은서가 떠나는 이유와 흔들린 이유를 진호의 현실로 구속한 것이다.

    이건 꽤 설득력이 있었다.

    “사랑에는 빵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 하는 거요?”

    “그래. 허울뿐인 말로 사랑을 채워 줄 수는 없어.”

    “그렇다면 그대가 마드모아젤의 빵이 되어 주시오. 나는 시와 그림. 노래로 그녀를 채워 줄 테니.”

    “뭐, 뭐?”

    “내 사랑은 마드모아젤을 위한 것. 결코 구속하지 않는 것이오. 그녀의 행복을 위해 그대와 내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또 다른 사랑이겠지.”

    터무니없는 설정이다.

    이런 막장 드라마 같은 걸로 설득력이 생길 리 없다.

    ‘그래야 하는데······’

    생긴다.

    놀랍게도 설득력이 생기고 있었다.

    진호의 연극 톤의 말투나 과장된 태도가 이런 막장 설정을 그럴듯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지, 집어 치워! 그딴 말에 내가 설득 될 것 같아!?”

    “화내지 마시오. 그대의 마드모아젤을 향한 마음이 진실하다면 나 역시 그대에게 진실하리라. 사랑하는 자는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에는 죄가 없으니. 어찌 우리가 다퉈야 하는 것이오?”

    진호는 이제 진혁에게 다가갔다.

    그 걸음은 바람같이 가볍고 말투는 솜사탕처럼 달콤했다.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볼을 붉혔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소. 내가 마드모아젤을 사랑하는 것도, 그대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도. 나와 우리가 모두 사랑하는 것도. 오직 아름다움과 행복만이 이곳에 있거늘. 구속 할 필요도, 나눌 필요도 없는 것이오.”

    진호는 한 술 더 떠, 은서까지 당겨왔다.

    이제 세 사람은 한 곳에 뭉쳐 서로를 바라보는 관계가 됐다.

    전에 있던 설정은 모두 폐기 돼 버렸다.

    지금 이 상황을 이끌어 가는 건 진호였다.

    “나, 나는 남자를 사랑 할 마음 따위는······”

    “아름다운 것에는 경계가 없다 하지 않았소. 그대 눈동자 안에 내가 비쳐 보이거늘. 마음을 부정하지 마시오.”

    “그······”

    두근두근.

    진혁의 자신의 볼에 닿은 진호의 손길에 심장이 거칠게 뛰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했다.

    모든 기준을 다 가지고 와도 진호는 이상형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완전한 이성애자였다. 그런데도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다.

    당장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입을 맞추고 싶을 정도로.

    “그만! 여기까지만 하지.”

    “헉!”

    “꺅!”

    그 에로틱한 분위기를 깬 것은 서훈이었다.

    그의 말이 창이 되어 흐름을 깨고 정신 차린 은서와 진혁은 기겁하며 물러났다.

    둘 다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베드씬은 허락 못 한다.”

    세 사람 모두 답하지 못했다.

    #

    진혁은 도망쳤다.

    ‘배역이든 뭐든 알아서 하라지!’라는 토라진 여중생 같은 대사를 남기고.

    연기의 여파가 큰 터라 한 동안은 나타나지 않을 기세였다.

    “굉장한 연기였어요. 그건 누굴 떠올리고 한 겁니까?”

    “······”

    “진호 씨?”

    진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사노바에 대한 여운이 남은 탓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 표정, 자세까지.

    모든 것이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여, 연기였잖아요. 부끄러워 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은서도 비슷했다.

    그나마 경험이 있는 그녀가 조금 더 빠르게 스스로를 수습했을 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붉어진 볼은 쉽사리 돌아오지 못했지만.

    “······연기하시는 분들은 다 이런 걸 극복하고 있는 거겠죠?”

    “자기가 했으면서 그런 말을 해요?”

    “할 때는 몰랐는데 이거 굉장히 부끄럽네요.”

    “그게 부끄러운 사람의 연기인가요? 난 완전히 심장이 터질······”

    “터질?”

    “악! 시끄러워요. 그보다 당신. 아까 연기 해 본 적 없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죠?”

    부끄러움을 속이며 은서가 역정을 냈다.

    그런 연기가 경험 없이 나온다는 건 믿기 어려웠다.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건 사실이에요.”

    “거짓말. 그런 사람이 그렇게 연기를 해요?”

    “사실이야. 어떤 면에서 진호 씨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서훈 선배. 무슨 말이에요, 그건.”

    서훈이 동아리 벽면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진호라는 글자와 캐릭터라는 글자를 나란히 썼다.

    그리고 두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며 한 곳으로 모았다.

    “캐릭터에 대한 완전한 이입. 완벽한 매소드. 지금까지는 없던 새로운 타입의 연기자거든.”

    “매소드······?”

    “어때? 이번 행사에서 같이 연기 할 마음이 생겼어?”

    은서는 서훈의 말을 흘리며 진호를 바라봤다.

    여전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 뒤편으로는 자신에게 사랑을 속이던 그 캐릭터도 있을 터였다.

    “스케줄 조정하고 올게요.”

    망설임은 없었다.

    #

    배역이 정해지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진호의 배역은 늙은 여우.

    숲의 실세였다가 늙고 병약해지면서 첨차 그 힘을 잃어가는 캐릭터였다.

    전체 비중은 낮은 편이었지만 주인공인 사자와의 접점이 많아서 임펙트는 상당했다.

    “사자. 사자여. 어찌 하여 네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만 두시게, 여우. 이유라면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 자네의 말을 따라주는 동물 따위는 없네. 이제 그만 모든 걸 내려놓고 물러나게.”

    “내가 얼마나······”

    “그만. 그만. 잠깐 멈춰 보죠.”

    문제라면 캐릭터에 대한 이입.

    배역을 맡고 연습을 시작한지 벌써 삼일이 되었음에도 진호는 마땅한 전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느낌이 안 와요?”

    “밤낮으로 생각은 해보고 있는데 뭔가 느낌이 안 오네요.”

    “아, 이러면 곤란한데. 대사야 대충 칠 수 있게 됐지만 전혀 여우같지가 않단 말이에요.”

    여우의 중심 감정선은 분노에서 허망함으로 이어진다. 권세를 잃은 것에 분노하던 여우가 다른 동물들의 생각을 알게 되며 자신이 누리던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알게 되는 흐름.

    얼핏 보자면 꽤 많은 역사 속 인물이 이것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으나 딱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잠깐 쉬고 할까요?”

    “네. 그편이 나을 거 같네요.”

    진호는 셔츠를 풀며 밖으로 나갔다.

    가슴이 좀 답답했다.

    “생각만큼 연기가 잘 안 되나 봐요?”

    “아. 은서 씨.”

    그런 진호의 옆으로 은서가 다가왔다.

    그녀는 스케줄을 조정하고 이번 연극을 위해서 꽤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회사에서는 당연히 반대했지만 강행 했다.

    연차 쌓인 전직 아이돌의 힘이었다.

    “연습하는 거 봤어요. 전의 그 연기력이 아니던데.”

    “음. 아무래도 반쪽짜리라서 그런가 봐요. 제때 몰입 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계속 제자리인터라.”

    “흐응. 천부적인 재능의 단점?”

    “하하.”

    진호에게 있어서 연극 무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이번 제안을 받아들인 건 어디까지나 ‘전생 체험’ 자체를 제어 할 요령을 찾기 위함.

    무대의 성공이나 좋은 연기는 주요 쟁점이 아니었다.

    ‘그게 맞는데······’

    손과 다리가 잘려나간 기분이다.

    조조가 되었을 때, 조운이 되었을 때, 카사노바가 되었을 때. 그들은 감정을, 생각을, 표현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었다.

    그 자연스러움이, 해방감이 그립다.

    하나의 그림이 완성 될 때의 충족감이 그립다.

    지금의 팔 다리가 잘린 연기로는 얻을 수 없으니까.

    “그럼 이렇게 한 번 해 볼래요?”

    그런 그에게 은서가 조언을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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