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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6화 (6/178)
  • Chapter3. 매소드(2)

    진호는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서훈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래저래 혼자서 고민하는 것보다야 도움을 받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다른 사람의 방식을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라.”

    진호 자신의 방식은 타인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캐릭터에 이입하고 빠져 나오는지를 경험하고 나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대본인데······”

    서훈에게서 얇은 대본 하나를 받았다.

    이 중 진호가 맡게 될 배역은 늙은 여우.

    한때는 사자 옆에서 동물 세계를 호령하던 존재였으나 후에는 버림받는 캐릭터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신 고사에서 나오는 ‘토사구팽’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한다고 그 인물이 딱 집어서 전생으로 나타나리란 보장은 없다.

    나타난다 하여도 극중 여우와 한신은 차이가 있다.

    “한신은 그 권세와 명성이 지나쳐서 유방이 잘라냈다면 여우는 늙고 병든 자신을 돌보지 않아 내쳐졌다는 차이가 있지. 나이가 들어 머리가 굴러가지 않는 걸 이해하지 못한 캐릭터인가.”

    대본은 얇고 캐릭터 자체는 간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각해 볼 구석은 충분했다.

    사자는 굳이 왜 여우를 쳐냈을까, 여우는 자신의 후일을 왜 염두 하지 않았을까.

    너구리와 곰은 어째서 여우를 돕지 않았을까.

    몇 분 안 되는 분량임에도 많은 갈래들이 튀어나왔다.

    “내가 여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진호였다.

    #

    최근 연예계에서는 영역에 경계를 두는 것이 무의미하다. 아이돌이 연기하고 스포츠 스타가 예능을 하고 배우가 노래를 하곤 한다.

    박 은서도 그런 경우였다.

    18살에 아이돌로 데뷔.

    그럭저럭 인기를 끌다가 적당한 시점에 해체 수순을 밟으면서 개인 활동으로 연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도 나름 재능은 있어서 ‘연기돌’이라는 명함도 받았다.

    “그러니까 이런 행사는 꼬박꼬박 참여하는 게 좋아.”

    “귀찮은데. 내가 굳이 이런 행사까지 와야 해?”

    “야. 그래도 모교잖아. 너 입학 할 때만 해도 열심히 다닌다고 하지 않았어?”

    “치. 말만 그렇게 하는 거지.”

    매니저의 말에 은서가 툴툴거렸다.

    모교. 정확하게는 한 때 발을 담갔던 동아리 연합 행사에 그녀가 초청된 것이다.

    행사 페이도 있고 이미지 상 좋은 일이기에 회사에서는 넙죽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급’이 이런 대학 행사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니. 나도 이제 연기 좀 하잖아. 저번에 민태식 선배님도 나보고 재능이 있다고 했고. 좀 더 고급 진 스케줄 없을까?”

    “고급은 무슨. 아직 멀었어, 야. 민 배우님이야 그냥 립서비스 한 거지. 너 저번에 방영한 드라마에서 연기 못한다고 욕 먹은 건 기억 안 하지?”

    “그거야 날이 추워서 그런 거고. 입 풀린 후반기에는 나름 호평 받았다고.”

    “퍽이나. 그때는 대사 없이 죽은 시늉만 해서 그런 거 아니냐. 연기 돌 이미지 관리하려면 더 열심히 해. 그 정도 실력으로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워.”

    “체. 언니는 꼭 사람 기분 망치더라.”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다.”

    “네, 네.”

    은서는 하는 듯 마는 듯 답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축제 기간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저 멀리 강당에서 연습하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한창 학교를 잘 다닐 때는 그녀도 그 무리에 섞여서 연기 연습을 하곤 했다.

    ‘재미있었나?’

    떠올려 보자면 나쁜 기억은 아니다.

    연기를 가장 열심히 연습한 것도 그 때고.

    “뭐, 이번에 가면 후배님들한테 연기가 뭔지 가르쳐 주는 것도 재미있겠네.”

    “어? 뭐라고 했냐?”

    “아무것도 아니야. 언니는 운전이나 열심히 하세요.”

    “아오. 요 싹퉁머리 없는 것.”

    “히히. 그 매니저에 그 배우라고.”

    창에 몸을 기대며 실없이 웃었다.

    귀찮음은 많이 사라진 후였다.

    #

    “아니, 이게 뭐야.”

    귀찮음.

    아니, 짜증이 다시 몰려 온 건 차에서 내린 직후였다.

    연예인 선배가 온다면서 쫄랑거리는 후배들이 잔뜩 몰려 올 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연예인 은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에서 싸움이 난 모양이야.”

    “싸움? 동아리 방 안에서?”

    “어. 객원 배우 때문에 그런가 본데?”

    “나, 나?”

    “아니. 너 말고. 다른 사람 하나를 섭외했는데 후배 하나가 빡친 모양이야.”

    “아. 어? 다른 사람이라고? 나 말고 누구를 섭외했는데?”

    본디 행사 특성 상 객원 멤버는 최소화 하는 편이다.

    해 봐야 은서 같은 휴학생 정도.

    추가로 다른 사람을 섭외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서훈 선배가 그랬다고?’

    게다가 이런 행사에 서훈이 자주 개입하는 걸 그녀는 안다.

    졸업생이며 현직 방송국 직원.

    그런 사람이 대충 아무나 끼워 넣었을 리는 없다.

    호기심에 까치발을 들고 방 안 쪽을 살폈다.

    “어? 진호 씨?”

    동아리 방 중심에 서서 누군가와 대치하고 있는 사람.

    그는 은서가 아는 인물이었다.

    #

    은서가 기억하는 진호라는 사람은 유약했다.

    광고 아이디어를 자신이 냈다고 설명하면서도 회의실 내에서는 이렇다 할 발언을 하지 못했다.

    얼굴에는 살짝 그늘이 져 있고 어깨도 굽었다.

    당시가 그룹 해체 후 막 활동을 재개 할 때라 사람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접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기억하지 못했을 거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어요?”

    “아. 아. 은서 씨. 맞죠? 전에 광고 건으로 오셨던.”

    “헤헤. 기억하고 계시네요? 전에는 덕분에 좋은 광고 찍었어요. 사람들도 이미지에 잘 맞는다고 호평했죠.”

    “그만큼 은서 씨 이미지가 좋았던 거죠.”

    하지만 오랜만에 본 진호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전보다 표정도 밝고 어깨도 굽어있지 않았다.

    말투에도 힘이 실려 듣는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은서 언니. 오랜만이에요.”

    “우리 아영이도 안녕. 잘 지냈어?”

    “저야 뭐 잘 지냈죠. 그보다 언니. 언니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분위기를 슥 보다 아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에 광고 건으로 만났지. 진호 씨 광고 회사에서 일하잖아. 설마 몰랐어?”

    “오. 광고회사. 그랬구나. 전혀 몰랐어요.”

    “응? 그럼 진호 씨가 여기서 뭐하는 건데? 무슨 광고나 이벤트 같은 걸로 불러 온 거 아니었어?”

    딱히 행사에 광고 업체가 붙을 이유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진호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설명이 안 된다.

    “그건 내가 설명하지.”

    “아. 서훈 선배. 와 계셨네요?”

    “자식이 선배 보면 인사부터 해라. 연기 좀 한다고 콧대만 높아져서는.”

    “에이, 제가 언제 또 그랬다고. 하여튼 나만 보면 만날 잔소리야.”

    서훈과 은서는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서훈이 졸업하기 전, 짧은 실험 영화에도 출연 한 적이 있었다.

    “군소리는 됐고······아, 그 전에 구경꾼들 좀 내보내라. 가뜩이나 시끄러운데 연예인 왔다고 하면 더 복잡해져.”

    “와. 연예인 막 굴리시네요.”

    “넌 좀 굴려도 돼.”

    은서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안 된다고 거부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사람들 앞 연예인의 이미지는 중요한 거니까.

    “여러분······”

    간드러진, 연예인 목소리를 내며 구경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진호 씨가 이번 무대의 객원 배우?”

    대충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서훈의 추천으로 진호가 객원 배우로 들어오면서 이에 불만을 가진 후배가 따지러 온 상황.

    “진호 씨. 원래 연기를 하던 사람이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어쩌다 보니? 그럼 연기 경험도 없는데 객원으로 쓰는 거예요?”

    은서의 시선이 아영과 서훈 쪽으로 향했다.

    연합 행사 무대의 배역 관리는 회장의 역할.

    경험 없는 사람을 배역에 넣는 건 이해 할 수 없는 처사였다.

    “경험은 없어도 실력은 확실해. 아마 연기를 한 번 보면 다들 알 거다. 내가 괜한 생각으로 추천을 한 게 아니야.”

    “아 진짜.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선배? 졸업했으면 그냥 행사에 관심 끄세요. 왜 자꾸 끼어 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야, 진혁. 말조심해.”

    “뭘 또 조심합니까. 맞는 말 아닌가요? 연예인이라고 객원에 포함 시키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후배, 진혁의 시선이 은서까지 닿았다.

    애초에 객원 맴버 자체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짜증나네. 쥐방울 만 한 게.’

    물론 은서는 그 눈빛이 짜증났다.

    “그럼 직접 테스트 해 보면 되겠네요.”

    “테스트라고?”

    “우리 잘나신 후배님은 실력 없는 객원이 들어 올까봐 걱정하는 거잖아. 안 그래?”

    “아, 네. 매우 걱정되네요. 어디서 연기 흉내나 내 보고 기웃거리는 사람이 많아서.”

    “아하하. 우리 후배님 평소에 화가 많나 봐? 어디 산에라도 들어가서 도 좀 닦지?”

    “이쪽은 그렇게 여유가 없어서요. 연예인 선배님은 스케줄이 널널한가 보네요.”

    은서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화를 겨우 잠재웠다.

    ‘이미지. 이미지.’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고는 재수 없는 후배 놈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시간 절약도 할 겸 테스트를 하자고. 그쪽 후배님 나. 그리고 여기 진호 씨까지. 실력으로 인정하면 다 되는 거 아니겠어?”

    “하. 직접 테스트를 하시겠다?”

    “보아하니 객원 멤버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 같은데. 왜 연기 물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을 쓰는지 알려줘야 할 거 같아서.”

    “발연기라고 욕먹은 주제에 퍽이나.”

    “뭐?”

    “아. 그냥 지나가는 말입니다. 그래서 테스트는 뭐로?”

    은서는 혓바닥까지 올라온 욕설을 겨우 삼켰다.

    “연기라면 즉흥연기지. 설정 하나 주고 합을 보자고. 우리 잘난 후배님이 얼마나 실력 좋아서 선배들을 개똥처럼 보는지 한 번 알아봐야겠어.”

    “아이돌출신 연기자와 광고업체 회사원이 말이죠. 거, 퍽이나 기대가 되네요.”

    “끝나면 우리 후배님하고 술 한 잔 꼭 해야겠어. 내가 아주 사회생활이 뭔지 좀 가르쳐 주게.”

    은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애초에 학교 행사나 동아리 기강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신의 연기를 얕잡아 보는 건 못 참는다.

    발연기라도 죽어라 노력해서 예쁜 발연기로 만든 건 자신이니까.

    “진호 씨, 이쪽으로 와 봐요.”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

    진호는 조금 난처하던 차였다.

    무대에 서고 연기 합을 맞추는 것이 자신의 상태를 호전시키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고 싶진 않았다.

    후배라는 진혁이 조금만 더 공손했어도 그냥 말끔하게 포기하고 물러났을 것이다.

    “연기 경험이 없다고 했죠?”

    때문에 은서가 개입해 준 것이 꽤나 고마웠다.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어요. 몇 번 상황에 합을 맞춰 본 게 전부입니다.”

    “푸후. 근데 무대에 서겠다는 거예요?”

    “저도 나름의 사정은 있는 터라.”

    “그 사정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테스트 들어가면 두 가지만 딱 기억해 둬요.”

    은서가 진혁이 안 보이는 쪽에 서서 진호에게 속삭였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진혁이 물 먹는 꼴은 꼭 보고 싶었다.

    “하나는 시선. 시선처리를 따로 해야 할 상황 아니면 반드시 상대를 바라봐요. 눈과 눈이 마주치면 없던 교감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시선. 시선. 명심하죠.”

    “두 번째는 호흡. 사람은 숨 쉬는 걸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불편해져요. 연기도 비슷해서 대사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면 숨 쉬는 타이밍이 꼬이곤 하죠. 이번에는 즉흥 연기라 따로 숨 쉴 타이밍을 재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감정이 온다고 해도 대사를 너무 쏟아내지 마요. 그러다 숨이 막혀서 붕 뜨게 되니까.”

    감정의 과잉을 헐떡임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수용이다.

    초급자가 호흡에 휘둘리면 그보다 추한 것도 없다.

    “거기, 언제까지 속닥이고 있을 겁니까.”

    “후배 님. 인내심도 없네. 경험 없는 분 배려 정도도 못하나?”

    “못할 거면 객원으로 오지 말았어야죠. 사회생활 하신 분이 그런 것도 모르나요?”

    “······주둥이를 비틀어 버리고 싶네.”

    “네?”

    “아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 후배님 입술이 참 예쁘다 싶어서. 그럼 남자 둘에 여자 하나니까 삼각관계로 가자고.”

    은서가 말을 맺으며 진호의 등을 툭 두드렸다.

    나지막한 속삭임을 더하며.

    “캐릭터를 설정해요.”

    “······캐릭터를?”

    “삼각관계에 포함 된 남자에요. 어느 쪽입니까. 뺏는 쪽, 뺏기는 쪽. 강한 쪽, 약한 쪽. 어떤 캐릭터가 주도권을 가져 올 수 있는지 정해요.”

    쏟아지는 속삭임에 진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는 이런 쪽의 지식이라고는 전무했다.

    연기라고는 전생체험을 바탕으로 끌려갔던 것이 전부.

    ‘삼각관계. 연애 쪽 인물이라 이거지?’

    다급하게 여러 사람을 떠올려 봤다.

    연애에 강한 캐릭터.

    — 앙투아네트. 그대의 입술은 붉게 핀 장미와 같구려.

    그러자 무언가 느끼한 대사와 함께 확 번지는 장미 향. 중세풍의 복장을 한 여인이 요염한 얼굴을 한 채 한 발자국 앞선 곳에 나타났다.

    — 혓바닥은 언제나 달콤하군요, 카사노바.”

    아. 그 사람.

    진호가 절로 납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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