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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만 전생 배우-2화 (2/178)
  • Chapter1. 전생의 기억(2)

    누구일까.

    진호는 지연을 쫓던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봤다.

    “허?”

    그곳에는 잘생긴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사극에서나 볼 법한 갑주에 한 손에 들린 장창.

    그린 듯 한 장군의 모습이었다.

    술집에서 사극 촬영이라도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 봤지만 눈앞의 남자를 제외하고 이상한 건 없었다.

    — 아버님. 이곳은 적진입니다. 계집의 미모에 홀려서 군을 방치함은 옳지 않다 여겨집니다.

    또 다시 남자가 말을 했다.

    그의 시선은 완전히 진호에게 닿아 있었다.

    걱정과 근심이 온전하게 느껴 질 정도였다.

    — 악래가 있거늘 무슨 걱정인 게냐.

    이번에는 진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말투 역시 낯설었다.

    아니, 애초에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한국어가 아니었다.

    이건 중국어.

    진호가 이해하기로는 그러했다.

    — 하지만 아버님! 저 계집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분명 무언가 수작을······

    그 순간.

    팍 하고 무언가 진호의 몸을 흔들었다.

    눈앞의 장수 같은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고 진호를 빌려 말을 하던 어떤 존재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건 ‘죄송합니다.’라며 스쳐가는 다른 손님 한 명.

    보고 듣던 기묘한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얼빠진 얼굴로 진호가 중얼거렸다.

    수십, 수백의 전생체험을 겪어 봤지만 이렇게 생생한 적은 없었다.

    그 순간에 있는 듯 한 느낌이라니.

    마치 자신이 전생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게 왜?”

    전생의 경험을 되살리는 방법에는 일종의 스위치가 있다. 비슷한 무언가를 강하게 떠올리면 얽힌 전생의 경험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지금처럼 뜬금없는 등장은 처음이었다.

    ‘아니. 뜬금없는 게 아니라면?’

    진호가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응. 응. 자기야. 여기는 대충 마무리 됐어. 저 새끼 완전 진상이지 뭐야. 지금도 술 좀 더하자고 달라붙는데 징그러워 죽겠어. 우리 자기 진급 문제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짓까지는 안 하는데.”

    지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듣던 나긋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여튼 이번 일만 끝나면 약속한 백은 확실하게 사 주는 거지? 걱정? 무슨 걱정이야. 진호 그 인간은 나한테 완전히 푹 빠졌다고. 적당히 구슬려서 입 닫게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지끈—!

    갑자기 지독할 정도의 두통이 밀려왔다.

    진호는 벽을 부여잡은 상태로 미끄러졌다.

    이명이 쏟아지고 주변 사물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 아버님!!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 주군! 먼저 도망가십시오!!

    — 이곳은 지나 갈 수 없다!!

    — 도망치십시오!!!

    데일 듯한 열기와 머리를 파고 드는 목소리들.

    머리가 깨질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소리 없이 몸만 비틀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모든 고통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명료함만이 머리에 남았다.

    마치 태풍의 중심에 들어 온 것처럼.

    “누가 감히 나 조맹덕을 이용하려 한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진호는 확신하지 못했다.

    #

    진호는 자리로 돌아가서 남은 술은 털어 넣었다.

    화끈한 기운이 밀려오자 눈에서 빛이 돌았다.

    취기는 그대로였지만 머리는 되레 명료했다.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뚜렷해진 것이다.

    “진호 씨. 주문하고 왔어요.”

    그 순간, 지연이 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통화 할 때 보여주었던 표정은 감춘 채, 착하고 마음 넓은 동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앉아라, 계집.”

    “······진호 씨?”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가? 난 이곳에서 네 목을 쳐도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내 아량이 하해와 같아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하니 잘 생각하거라.”

    지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혹시’ 라는 일말의 의문은 품고 있었다.

    “내 주변을 알랑거리며 잘도 적과 내통을 했었군.”

    “진호 씨. 지금 뭐 술주정이에요? 계속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통화 하는 걸 봤다.”

    “아, 네? 그, 그건 그냥 친구랑 통화 한 거예요.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본데······”

    “닥쳐라. 뱀 같은 혓바닥을 계속 놀리려 한다면 창자까지 꺼내서 죽여주마.”

    살벌한 말에 지연은 입을 닫았다.

    이 말이 진호에게서 나왔기에 더 무서웠다.

    평소 얌전하던 사람이 꼭지 돌면 더 무섭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계집 같으니. 적과 배를 맞대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거냐?”

    “배, 배를 맞대다니요!”

    “잘 생각해라. 팀장이 승진을 한다고 네게 뭐가 떨어 질 것 같나? 어차피 넌 계속 팀원일 뿐이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모든 뒷감당은 네가 하게 되겠지.”

    “뒷감당이라니요?”

    진호는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훑었다.

    눈앞의 계집을 손으로 쥐어짜고 싶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뱀의 심장이 이를 눌렀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둘 테니까.”

    “그, 그만 두다니요? 왜요!?”

    “뱀 같은 년 놈들이 우글거리는데 내가 계속 다닐 이유가 있을까? 그리고 너라면 알 테지? 부서 내 실적의 대부분은 나한테서 나왔다는 걸. 내가 나가고 난 뒤에도 계속 그런 실적이 유지 될까?”

    지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진호의 말대로 팀의 실적은 대부분 그가 맡고 있었다.

    팀장이야 승진해서 벗어 난다 쳐도 그녀는 계속해서 팀에 남아 있어야 한다.

    “이제야 머리가 굴러가는 모양이군. 그래. 넌 뱀 사이에 낀 양일뿐이다. 살고 싶다면 처신을 잘 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제가 뭘 어떻게 하라고?”

    “간단하다. 한 번 배신이 어려울 뿐, 두 번이 어려울까. 내일. 해가 밝거든 팀장이 기획안을 훔쳤다고 사장에게 고발을 해.”

    “뭐, 뭐라고요!? 내가 그럴 거 같아요? 그이랑 나는······”

    “허튼 소리 그만 하고. 알량한 사랑 타령 할 거면 이 이야기는 없는 걸로 하지.”

    탕. 진호가 술잔을 내리쳤다.

    움찔, 하고 몸을 떤 지연이 그의 눈을 바라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은 거짓의 흔적조차 없다.

    술기운을 빌려서 헛소리 하는 건 아닐까.

    잠시 기대해 보지만 그 조차 이내 무너졌다.

    ‘선택해야 하는 거야?’

    사랑하는.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남자와 출세 사이에서.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웠다.

    지연은 선택을 했다.

    #

    “아, 시팔. 뭔 일이야?”

    팀장, 윤석호는 이른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잠결에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발이라 들은 것 같았다.

    대체 누가?

    아니 왜?

    그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장님. 부르셨습······어?”

    그렇게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회사.

    가장 높은 곳 사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윤 팀장 드디어 왔군. 그쪽에 앉게.”

    “아, 네. 근데 무슨 일이죠? 저희 팀원들은 왜 이곳에?”

    “끄응. 자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몰라요? 뭘 말입니까?”

    “에잉. 대체 뭐하자는 건가? 이번에 올린 기획서. 여기 있는 홍 사원이 전부 했다면서? 그걸 자네 기획안이라고 날름 올렸던 건가?”

    덜컥,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윤석호는 굳은 얼굴을 한 채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스쳐가는 시선으로 맞은 편 지연과 진호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장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여기 둘에게 다 들었네. 준비 자료랑 그동안 있었던 대화 내역도 다 보여 줬다고.”

    “······”

    마른 침을 삼키며 석호가 지연 쪽을 흘겨봤다.

    ‘감히 네가?’라는 시선이었다.

    지연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눈을 피했다.

    “자넨 팀장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지금까지 실적이 전부 그랬던 건가?”

    “아, 아닙니다 사장님. 이번 일은 진짜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아. 진호. 저기 홍 사원이 저 진급 점수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자발적으로 한 거예요.”

    “자발적으로 했다?”

    “네. 그렇다니까요?”

    석호가 진호 쪽으로 강하게 시선을 던졌다.

    그에게는 쥐고 있는 패가 하나 있었다.

    동조하지 않으면 그걸 풀어버리겠다는 강한 압박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제가 왜 그걸 자발적으로 합니까? 기획안은 어디까지나 제 작품입니다. 팀장님이 뭐가 예쁘다고 제가 그걸 넘겨주겠어요.”

    “너, 너! 그렇게 나와도 되는 거냐!?”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확 말해!?”

    “하시든가.”

    진호는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바라봤다.

    그 태도가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석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씁. 윤 팀장. 설마하니 무슨 약점 같은 거 잡아서 직원 실적을 빼먹고 그랬던 건가?”

    “아, 아니······”

    “됐네. 더 들을 필요도 없겠군. 자네 승진 건은 취소네. 그리고 그 동안 있었던 실적 도 전부 다 조사를 해 봐야겠어.”

    “사장님!!”

    “그만 두게. 나머지는 인사과에서 연락 할 걸세.”

    석호는 무너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승진, 성공, 연인 등.

    손에 쥐었던 것이 한 번에 날아간 것이다.

    “······진호. 홍 사원.”

    그러자 천천히 분기가 치고 올라왔다.

    이렇게 된 거 같이 죽자, 라는 저열한 분기였다.

    “사장님. 저 인간 정신병 있는 거 알고 있습니까?”

    “뭐?”

    “정신병력 말입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정신병원 다니고 있는데. 그건 모르고 채용하셨던 거죠?”

    석호가 진호를 노려봤다.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라는 의미였다.

    “네. 저 정신병원 다니고 있습니다.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한······대충 그런 거죠.”“홍 사원? 정말인가?”

    “숨기고 싶었던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그걸 빌미로 잡아서 저 인간이 절 협박했던 거죠. 하지만 더 이상은 참고 있기가 힘드네요.”

    하지만 진호의 반응은 석호의 예상과 달랐다.

    그는 숨기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되레 그걸 덤덤하게 늘어놨을 뿐이다.

    “어, 어 그런가. 그런 사정은 몰랐네.”

    “몰랐다고 하면 끝입니까? 사장님. 정신 병력입니다. 미친놈이 회사에서 무슨 짓을 할 지 어떻게 압니까?”

    “크, 크흠. 윤 팀장. 말 좀 조심하게나.”

    “아니, 솔직하게요. 사장님도 좋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애초에 미친놈이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게 알려지면 우리 이미지는 어떻게 합니까?”

    “끄응······”

    사장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다.

    실적을 빼돌린 팀장을 타박 할 만큼 업무에 강단이 있기는 했으나 ‘미친 사람’이라 딱지 붙인 누군가를 옹호 할 만큼 품에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역시 달갑지 않은 모양이군요.”

    “아, 음. 미안하네, 홍 사원. 아직도 증세가 심한 건가? 통원 치료 할 정도로?”

    “음······뭐. 심하다면 심하죠.”

    “아니, 지금 농담 할 때가 아니네. 아무리 그래도 회사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을 두기는 좀 그렇다네.”

    사장의 반응에 석호가 이를 악물었다.

    ‘넌 무사 할 줄 알았냐?’ 라고 눈으로 진호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니 전 그만 두겠습니다.”

    “······뭐?”

    “뭐라고?”

    “자, 잠깐만요!”

    차례대로 반응이 터져 나왔다.

    진호는 다리를 꼰 채로 소파에 몸을 기대며 그 반응을 즐겼다.

    그의 시선은 영활하며 또 오만했다.

    “저 같은 사람을 두지 못 하겠다 하시니 그만두는 수밖에요.”

    “자, 잠깐. 지금 그만두면 이번 광고건은 어찌하나?”

    “그야 뭐 알아서 하셔야죠.”

    “자, 잠깐! 진호 씨! 어젠 그런 얘기 없었잖아요! 갑자기 그만 둔다니 무슨 소리에요!?”

    “딱히 남는다는 말은 안 했습니다만.”

    “야! 임 지연! 너 어제 저 새끼랑 무슨 말을 한 거야!?”

    “오빤 좀 조용히 해 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 이 창녀 같은 계집이!”

    “뭐라고!? 애초에 오빠가 능력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무능한 인간주제에!”

    꼬리를 문 뱀처럼 뒤엉키기 시작했다.

    격식을 벗어 던지고 서로를 향해 독설을 쏟아냈다.

    그 혼란 속에서 진호만이 유일하게 웃었다.

    “이것이 맹달의 방식인가.”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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