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컷—!”
우렁찬 사인과 함께 감독이 뛰어나왔다.
그는 양 팔을 벌린 채 하회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 우리 대 배우님. 어떻게 이리 연기를 잘 하십니까? 아주 그냥 대사가 착착 붙어서 전율이 오네요.”
“그냥 흉내를 잘 낼 뿐이죠.”
“어우, 흉내라니. 보고 있는데 내가 다 칼을 맞은 거 같더이다. 혹시 남몰래 어디 가서 칼 맞아보고 온 건 아니겠죠?”
감독이 자기 딴에는 농담이라고 슬쩍 던졌다.
그도 그럴 것이 ‘흉내’라는 말로 일축하기에는 연기가 너무나 실감 났다.
진짜로 칼을 맞고 쓰러진 것처럼.
그 고통과 아픔.
두려움 따위가 절절하게 전해졌다.
“뭐, 전쟁터에서 다른 장수들과 싸우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린 경험은 있죠. 그때 느낌을 흉내 내 봤더니 비슷하게 나온 모양입니다.”
“전장터······푸하하! 역시 대 배우님은 농담도 잘하시네. 웃겨. 아주 그냥 유머가 넘치셔.”
감독은 박장대소하고 진호는 그냥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사실을 말해도 안 믿어주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럼 다음 장면은 제가 왕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경험을 살려 보도록 할게요.”
“오, 오. 그렇죠. 기업 합병을 해서 총수 자리에 오르는 거니까. 크. 역시 센스가 있으셔.”
“그냥 경험이 조금 많을 뿐이죠.”
백년 단위던가, 천년 단위던가.
진호는 가물가물한 시간을 되짚으며 다시 촬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씬 8-3!”
또 다시 누군가를 흉내 낼 시간이었다.
Chapter1. 전생의 기억(1)
한때 전생 체험이 유행 한 적이 있다.
TV에서도 속칭 전문가라고 칭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으로 모습을 드러냈었다.
전생에 왕이었다, 노비였다, 장군이었다.
근거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그 결과에 따라 나름의 희비는 갈렸다.
[지금 시청하시는 분들도 한 번 따라해 보세요]
아마 연말 프로그램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유명세를 탄 최면술사가 나와서 대국민 전생체험을 시켜 준다는 기획이었다.
촛불 하나를 놓고 숫자를 셈하여 자가 최면을 거는 방식.
“우리도 해볼까?”
“재밌겠네. 진호야 너도 할 거지?”
“전생? 에이. 그런 거 안 믿는데.”
관심이 없던 나지만 가족들의 성황에는 이기지 못했다. 작은 식탁에 둘러앉아 티비에서 나오는 지침을 따라했다.
“뭐야. 딱히 뭐 없는데?”
“그러게요. 그냥 방송이니까 하는 말인가 봐요.”
“쯧쯧. 괜한 짓 했네. 응? 진호야 뭐하고 있어?”
부모님은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티비를 보고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했다.
이 방송 이후 최면술사는 사기꾼 타이틀을 얻고 금세 방송에서 퇴출되었다.
하지만 한 사람 만큼은 달랐다.
“진호야?”
“어머, 어머! 진호야, 왜 그래!?”
나는 그 날 내 전생을 엿볼 수 있었다.
아니, 전생을 경험했다.
수십, 수백, 수천가지의 전생을.
#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어릴 적, 전생 체험 같은 걸 시도해 보지 않았으면 어떨까 하는.
그랬으면 무당을 찾아다니지 않았을 테니까.
정신과를 수시로 오가는 일 따위는 없었을 테니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거나 재수 없는 놈이라고 따돌림 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제 와서는 그저 공상일 뿐이지만.
담배 한 대 태우며 시간을 녹일 때면 문득 그렇게 상상을 하곤 한다.
“진호 씨. 언제까지 나가서 쉬고 있을 거야. 오후 중으로 기획안 확인해서 올리라고 했지?”
“아, 아. 지금 들어갑니다.”
하여튼 몇 분 쉬는 걸 못 본다.
진호는 황급히 담배를 끄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각형 테이블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는 삭막한 환경.
이곳이 그가 일하는 공간이었다.
“또 서 팀장님한테 한 소리 들었죠?”
“좀 쉴까 하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네요.”
자리에 돌아가자 입사 동기인 지연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건치에 웃는 얼굴이 예쁜.
남 몰래 진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자였다.
“자요. 확인해야 할 곳 표시 해 뒀어요.”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고마워서 어쩌죠?”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술이나 한 잔 사요.”
찡긋 웃는 얼굴까지 참 예쁘다.
꼭 사겠다, 라는 말을 건네며 기획안 쪽으로 눈을 돌렸다.
두서없이 늘어선 문건 사이로 붉은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와. 진짜 엉망이네.”
진호의 회사는 광고업체다.
케이블이나 모바일 쪽을 주력으로 삼는.
규모도 작고 회사 직원들 숫자도 상당히 적은 편.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적은 건 아니다.
한 사람이 두세 명 분 하는 건 기본이었다.
“판타지 컨셉인가. 너무 전형적이네.”
기획안을 슥 훑던 진호가 품평했다.
대충 누가 초안을 작성 한 건지 가늠이 됐다.
팀장이라고 어깨에만 힘주는 놈.
컨셉도 촌스러운데 전체적인 방향성도 고루했다.
요즘은 이런 식으로 광고 내보내면 되레 악영향만 끼칠 뿐이다.
‘컨펌 받을 수도 없고.’
나직이 한숨 쉬며 기획안을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판타지 모바일 게임이라면 차라리······”
진호가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붉은 산. 오래된 검을 한 손에 쥐고 나는 힘겹게 올라갔다. 이미 산중에는 피로 온 몸을 덮은 오크 무리가 자리를 하고 있는 상황.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이건······]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기억.
아니, 다른 삶의 경험들이다.
산길의 흙냄새, 풀벌레 소리, 그렁거리는 오크의 숨결까지 전부 느껴졌다.
“······큭.”
길게 유지하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숨이 차오르고 손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깊이 심호흡 하며 서랍을 열어 약통을 꺼냈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후. 빌어먹을.”
약을 입에 털어먹고 나서야 증상은 멈췄다.
휴지로 식은땀을 털어내고 심호흡을 연거푸 했다.
남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 탓에 ‘미친 놈.’, ‘병자’ 취급 받는 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전사와 오크라.”
하지만 덕분에 새로운 기획안 컨셉이 잡혔다.
짧은 순간이지만 경험 할 수 없는 어떤 순간을 직접 경험했다.
이것은 단순한 공상보다 보다 명료한 이미지를 제공해 준다.
어린 시절을 날리고 청춘을 어둡게 만든 빌어먹을 전생 체험의 유일한 장점.
남들은 가지지 못한 수많은 경험이었다.
#
기획안 초안이 재가를 받았다.
세부 내용 조율을 거쳐서 광고주의 최종 컨펌까지 갈 길은 멀지만 그래도 한 고비 넘은 건 맞다.
기획 단계에서 버벅거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끝나고 다들 한 잔 하자고.”
아마 이 말만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혼자서 일이란 일은 다 한 듯 기지개 펴며 소리치는 팀장을 진호가 고깝게 흘겨봤다.
술자리는 피곤하기만 하다.
“아. 진호 씨는 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보고.”
“저요?”
“잠깐이면 돼.”
일적인 걸 제외하고는 딱히 접점이 없다.
일 잘했다고 칭찬 해 줄 사람도 아니고.
무슨 용건일까.
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팀장의 뒤를 쫓았다.
“담배?”
“아, 네.”
옥상 발코니에 한 자리 차지하고 담배를 쥐었다.
처음 정신과에 발을 들이고 난 뒤 부터 피우기 시작했으니까 벌써 10년이던가.
담배만큼 익숙한 물건도 몇 없었다.
“이번 기획안은 수고했어. 사장님도 좋다고 하더라. 아마 세부 내용만 잘 조율하면 광고주 쪽에서도 만족 할 거야.”
“잘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래. 이게 다 진호 씨 덕분이지.”
정말로 칭찬하려고 부른 걸까?
뜻하지 않은 덕담에 진호가 의아해했다.
“그래서 말인데, 진호 씨. 내가 한 가지만 좀 부탁해도 될까?”
“부탁이요?”
“어. 이번 분기에 인사이동 있는 거 알지? 조만간 사장님이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대대적으로 움직이잖아.”
“들어는 봤어요.”
관심은 없지만 알고는 있다.
규모가 작다고는 해도 회사는 회사.
높은 직급을 노리는 건 대기업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실적이 살짝 부족하거든. 그래서 이번 기획안을 우리 팀이 아닌 내 개인 걸로 보고했어.”
“······네?”
“알잖아, 우리 사장님. 팀이든 개인이든 딱히 신경 안 쓰는 거. 이번만 나한테 실적 좀 몰아 줘. 내가 올라가면 우리 진호 씨 잘 챙겨 줄 게.”
어깨를 툭툭 치며 친근하게 웃는다.
이미 이야기가 다 끝난 듯 한 분위기였다.
진호는 담배를 문 채 잠시 멍하니 멈춰있다 타들어가는 불꽃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 만요, 팀장님. 그런 건 미리 상의를 해야 할 문제 아닙니까? 갑자기 덜컥 정해버리면······”
“에이. 그러니까 이제 말하잖아. 다 돕고 사는 건데, 이번 한 번만 나한테 양보 좀 해 줘.”
“지연 씨는요? 석호 선배는 뭐라고 안합니까?”
같은 부서 나머지 둘을 거론했다.
일은 진호가 다 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같은 팀 소속이다.
“그 둘은 이미 이야기가 끝났지. 잘 되라고 다들 응원해 주더라. 진호 씨도 그렇게 해 줄 거지?”
“······”
생각해보니 어차피 둘은 상관없다.
최초 기획안은 싹 다 갈아엎고 새롭게 만들었으니까.
노동력을 송두리째 뺏기게 생긴 진호와는 입장이 다른 것이다.
“제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에이. 안 그럴 거잖아. 우리 사이도 좋은데 괜히 일 키우고 그럴 거야?”
“그래도 그 일은 제가 다 했고, 팀적으로 보고하는 거면 몰라도······”
“그러면 나도 진호 씨 보호 못 해 주는데?”
“보호요?”
팀장이 진호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은 그다지 친근한 것이 아니었다.
“회사 사람들은 진호 씨가 정신 병원을 집처럼 드나드는 거 모르지?”
“뭐라는 겁니까, 지금.”
“그냥 뭐 우연하게 들은 거지. 그래도 난 진호 씨 나쁘게 안 봐.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에 들어 온 거잖아? 안 그래?”
“······”
작은 회사.
정신병 이력 따위를 숨기고도 들어 올 수 있는 곳을 힘들게 찾아서 합격했다.
진호는 울컥하고 넘어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자자. 우리 이야기는 다 된 거지? 그럼 부탁하자고.”
툭툭. 팀장이 어깨를 두드리며 스쳐갔다.
진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몸이 다 부들부들 떨렸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정신병자.’, ‘미치광이’ 같은 눈빛은 지긋지긋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
다 타버린 담배가 발등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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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는 멍한 상태로 퇴근을 했다.
밖에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거리를 걸었다.
문뜩 깨어나 보니 자주 가던 선술집 앞이었다.
술이라.
목 너머로 술이라도 쑤셔 박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독한 걸로 한 병 주세요.”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안주도 시키지 않은 채 빈 속에 술만 털어 넣었다.
몸이 화끈거리고 머리는 더욱 몽롱해졌다.
“······빌어먹을 새끼.”
일이라면 혼자서 다 했다.
아이디어를 내고 세부 사항을 조정했다.
두 사람 분을 넘어서 팀을 혼자서 이끌었다.
억울할 법한데도 아무 말 없이 일만 했던 건 그래도 여기서는 괜찮았기 때문이다.
미친 놈 소리 안 듣고, 병자 취급 안 받았으니까.
그런데 여기서도 같다.
미친놈은 미친놈이고 병자는 병자였다.
어디를 가든 어떻게 숨겨도 결국 드러나는 것이다.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뜨거운 술로도 씻겨나가지 않았다.
“세상에. 진호 씨. 무슨 술을 이렇게 마셨어요?”
“지연 씨······?”
술에 취한 걸까.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보이는 것 같다.
“저한테 전화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제가요? 제가 그랬나요?”
“네. 완전 취한 목소리로. 무슨 술을 이렇게나······”
진호는 창피함에 고개를 숙였다.
술김에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그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로.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 앞에서 무슨 치태일까.
속에 쌓인 화 위로 부끄러움이 덧씌워졌다.
“무슨 일 있어요? 괜찮아요?”
“······그냥 힘든 일이 있어서요. 제가 실수로 전화했나 보네요.”
“괜찮아요. 힘들면 전화 할 수도 있고 그러죠. 그보다 안주라도 좀 시켜요. 빈속에 술만 마시면 속상해요.”
지연은 진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손짓으로 안주 몇 개를 주문하고는 자신도 잔을 받았다.
반 절 남아 있던 술을 나눠 채웠다.
“지연 씨는 참 좋은 사람이네요.”
“같은 회사 동료잖아요. 힘들 때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돕겠어요.”
“그러게요. 회사 동료. 서로 돕고 사는 건데.”
“자자. 뜨거운 국물이라도 좀 마셔요.”
지연은 어묵탕 국물까지 퍼 옮기며 진호를 달랬다.
술을 죽일 듯 마시던 진호도 뜨거운 국물이 속에 들어가자 조금 풀린 얼굴을 했다.
그래도 누가 곁에 있으니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진호 씨. 그거, 팀장님 독단 때문에 속상한 거죠?”
“네. 네. 뭐, 그렇죠. 지연 씨는 괜찮아요? 팀 실적 뺏어가는 건데.”
“저야 뭐 이번 일에 지분도 없는 걸요. 혼자서 일을 떠맡아 한 진호 씨만 속상하죠.”
“지연 씨도 그 인간이 나쁘다고 생각하죠?”
“나쁘죠. 완전 나빴어요.”
지연이 팀장을 구박하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그럴듯해 진호가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편 들어주는 건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에휴. 회사 생활이 다 그렇죠. 너무 마음에 두지 말아요. 그래도 팀장 그 인간이 아주 양심이 없진 않아요. 진급하면 우리 챙겨준다고 하잖아요.”
“하. 그게 양심 있는 겁니까? 단물 다 빼먹고 적당히 생색내는 거지.”
“그래도 아무 말 안하고 입 닦는 사람보다야 낫죠.”
“거기서 거기지 뭘······”
그래도 팀장이라고 욕하기는 싫은 걸까.
빙빙 둘러가는 이야기에 진호가 살짝 빈정 상했다.
빈 잔에 남은 술을 다 털어 넣었다.
“에잉. 다 마셨네. 지연 씨, 우리 한 병만 더 마셔요.”
“너무 마셨어요. 다음에 마셔요. 네?”
“딱 한 병만 더요.”
“······알았어요. 그럼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제가 주문할게요. 좀 쉬고 있어요.”
지연은 어중간하게 답을 하고는 자리를 떴다.
진호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 아버님. 저 계집을 탐하실 겁니까?
“응?”
어딘가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