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60화 (외전 완결) (261/261)

외전6. 깨진 모래시계 (완)

파파라치 샘은 요즘 잘나가는 모델을 찍으려고 도나텔로 본사에 왔다가 예상하지 못한 대스타를 만났다.

도나텔로의 수장인 얀 필립과 함께 웃으며 차로 걸어가는 그녀는 분명히 결혼 후, 잠시 활동을 중단한 서이렌이었다.

샘은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 셔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얀 필립은 서이렌을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처럼 대하며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했다.

서이렌 역시 이런 보호가 익숙한지 얀 필립의 손에 몸을 맡겼다.

얀 필립은 서이렌에게 안전띠까지 꼼꼼하게 매주고 환하게 웃었다.

샘은 한순간도 놓칠세라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댔다.

서이렌과 얀이 탄 차가 빠져나가자 샘은 당장 자신의 차로 돌아와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사진 속의 서이렌의 얼굴은 유독 빛이 났다.

원래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녀의 얼굴은 활동을 중단한 뒤,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얀 필립은 서이렌을 사랑하는 연인 바라보듯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서이렌의 반지.

샘은 서이렌의 결혼반지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의 새하얀 손가락에 어울리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끼고 있는 것은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투박한 회색빛의 반지였다.

서이렌, 결혼반지 그리고 얀 필립.

곰곰이 생각에 빠져 있던 샘이 놀라 외쳤다.

“설마…… 불륜인 건가?”

* * *

회의를 마치자마자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진석이 그런 나를 보며 놀렸다.

“아이고. 우리 원 대표가 아주 몸이 달았네. 그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형님은 자꾸 왜 그러십니까?”

강진석은 엘리베이터까지 따라붙어서 나를 놀려 댔다.

“왜 자꾸 따라오세요?”

“너 어차피 지금 공항 가는 길이잖아. 내가 바래다줄게.”

“왜요?”

“왜긴. 가는 길에 너를 실컷 놀리려고 그러지.”

“어휴. 진짜 왜들 그러시는 겁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저를 못 놀려서 안달이 난 사람들 같다고요. 빈 팀장님도 그러시고. 안 그러시던 진설 대표님도 동참하시고, 말입니다.”

“다 네 업보라고 생각해라. 그러게 왜 슈퍼스타와 결혼을 했니. 크크큭.”

서이렌과 결혼한 후에 나는 국민 역적이 되었다.

한국에서만 그럴까?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역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강진석이 내게 물었다.

“이렌 씨는 왜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거야? 그것 때문에 네가 더 욕먹고 있다는 거 알고 있지?”

“이렌 씨가 일 년 정도는 쉬고 싶다고 해서요. 데뷔한 이후에 한 번도 쉰 적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지금은 잠시 활동을 중단하는 거지만 조만간 서이렌은 연예계에서 완전히 떠날 거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서이렌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지금은 사람들이 문제 삼지 않겠지만 마흔, 쉰이 넘어서도 이십 대의 미모를 유지한다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다.

아직 눈앞에 닥친 일은 아니지만 나는 그 일만 생각하면 서이렌이 안타까웠다.

그녀가 얼마나 연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강아. 왜 이렇게 급하게 가는 거야? 원래는 내일 돌아가는 거였잖아.”

“그랬는데 이렌 씨가 빨리 오라고 해서요.”

“어이구. 신혼이라 이거지?”

“그만 좀 놀리세요. 부끄럽습니다.”

* * *

더 엔터라는 미국에서도 꽤 큰 인터넷 연예 신문에 서이렌의 기사가 떴다.

[서이렌, 결혼 일 년 반에 불륜?]

기사는 곧 큰 이슈가 됐고 한국에도 알려졌다.

- 미국에서 기사 뜬 거 봄? 서이렌 불륜이라는데?

- 뭔 개소리야?

- 얀 필립이랑 서이렌 데이트하는 사진 떴어. 둘이 쇼핑하는 사진.

- 얀이 서이렌 옷 가방 다 들어 주네. 매너남이었네. ㅋㅋㅋ

- 이게 왜 불륜 사진이냐? 두 사람 원래 친했는데?? ㅋㅋㅋ

- 얀 지금 남친 있을 건데. 게이잖아.

└바이래. 원래 여자도 사귀었을걸?

- 서이렌 손에 결혼반지 사라지고 이상한 반지 끼고 있어서 그런 거네.

- 어? 그러네. 결혼반지 사라졌다. 허……?

- 이걸 믿냐? 다른 반지를 낄 수도 있지.

- 서이렌이랑 원세강 세기의 커플 아니었나? 결혼식도 다 축복해 줬는데 이렇게 빨리 불륜 소식이. ㄷㄷㄷ

- 저 기사 가짜야. 내가 잘 아는데 절대로 불륜 아니고 이유가 있어서 만난 거야.

└지인임? 어떻게 알아?

└이런 말은 나도 할 수 있겠다.

- 반박 기사 뜨겠지. 지켜보자. 쫌.

* * *

서이렌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댓글을 적으며 화를 냈다.

곁을 지키고 있던 얀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렌. 너무 화내지 말아요. 몸에 좋지 않아요. 릴렉스.”

“나도 모르게 욱했어요.”

서이렌은 얀을 따라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렌. 그냥 발표해 버려요.”

“안 돼요. 대표님한테 먼저 알려 줄 겁니다.”

“세강은 언제 오는데요?”

“내일 비행기예요.”

“어휴. 너무 늦네. 하필 지금 한국에 가 있을 게 뭐람.”

“어쩔 수 없죠.”

얀 필립은 서이렌에게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건넸다.

그녀가 우유를 마시는데 정문에 차가 들어온다는 알람음이 들렸다.

서이렌은 놀라서 컵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렌. 조심!”

* * *

나는 서이렌이 건넨 사진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까만 사진의 한가운데를 손으로 가리키며 서이렌이 말했다.

“우리 아이예요. 보이죠?”

“이거요?”

“여기 한가운데 떡하니 보이잖아요. 신기하지 않아요?”

서이렌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 지우개로 지운 듯한 희미한 얼룩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초음파 사진이 보이나 마냐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이렌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이렌 씨. 빨리 오라고 했던 게 이것 때문이었어요?”

“당연하죠.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어요.”

“미안해요. 병원에는 혼자 다녀온 거예요?”

“그렉이 봐줬어요. 병원은 얀이랑 함께 갔고요.”

나는 서이렌의 옆에서 마치 그녀의 친정어머니처럼 인자하게 웃는 얀을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얀은 축하 인사와 함께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렌 씨 인부복을 내가 꼭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다닌 건데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났네요. 세강.”

“무슨 말씀이세요. 얀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세강. 기사는 어떻게 할 겁니까?”

얀은 차마 불륜이라는 단어는 입에 담지 못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얀.”

나는 서이렌의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

“바로 기사 낼까요? 우리 2세에 대해?”

서이렌은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원세강과 서이렌의 2세 소식이 제일 먼저 뜬 곳은 한국 연예지였다.

한국에서 먼저 기사가 뜨고 이후에 미국에도 기사가 떴다.

- 대박!!!!

- 축하해요!!

- 언니 축하해. 대표님도 ㅊㅋㅊㅋ

- 선남선녀 커플이니 2세도 존잘 존예일듯.

- 서이렌이 이래서 활동 중단 한거구나.

- 서이렌이 낀 반지도 대표님이 준 거래. 오해 다 풀렸다. ㅋㅋㅋ

- 서이렌이 아이 엄마라니 믿기지 않는다.

- 기사 또 떴어. 얀 필립이 서이렌 인부복 만들어 준대.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손수 만들어 준다니. 인부복 퀄리티 무슨 일이냐?

└그래서 얀을 만난 거구나. ㅋㅋㅋ

- 서이렌 데뷔 때부터 파던 사람인데 기분이 이상하다. ㅠㅠㅠㅠ

- 난 대표님 스타메이커 때부터 파던 사람인데 나도 기분이 이상해. ㅠㅠㅠㅠ

* * *

9개월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동안 한국에서의 모든 일을 강진석에게 맡겨 놓고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이렌은 친정에 가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 마음속의 친정인 진설의 집으로 들어갔다.

출산도 진설의 집에서 했다.

산파는 미국에서 달려온 그렉.

그렉은 서이렌의 아이를 받기 위해 미국에서 산파 자격증까지 땄다.

걱정했던 서이렌의 출산은 비교적 쉽게 끝났다.

나는 출산하는 동안 내내 곁에서 그녀를 지켰다.

나는 침대맡에 앉아 곤히 잠든 서이렌을 바라보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이렌 씨.”

서이렌은 잠결에 내 말을 들은 건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때 방 안으로 그렉이 들어왔다.

“그렉.”

“세강은 한숨도 안 자고 이렌을 지킨 겁니까?”

“잠이 안 와서요. 그렉. 이렌 씨는 괜찮은 거겠죠?”

“당연히 괜찮죠. 세강도 지켜봤잖아요. 아이도 건강하고 산모도 문제없습니다.”

“하. 다행입니다.”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심장의 보석에 무리가 갈까 봐 걱정했었죠?”

“예. 그렉.”

나는 사실 아이는 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아이보다 그녀가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서이렌이 너무나도 아이를 원했기에 그렉과 충분히 상의한 끝에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이렌 씨 심장은 이미 두 개로 완전히 갈라졌습니다.”

그렉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그렉? 방금 뭐라고 했죠?”

“심장이 두 개로 갈라졌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렌 씨 심장이 갈라지다뇨?”

나는 놀라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렉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이렌 씨는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심장이 깨지면…….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세강도 반쪽짜리 심장을 가지고 있잖아요.”

“이건 이야기가 다르죠.”

“지금껏 비밀로 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겠군요. 사실은 임신하자마자 심장이 두 개로 갈라졌어요.”

나는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렉과 서이렌이 이 사실을 알면서도 숨겼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검사를 충분히 했어요. 이렌 씨의 심장은 깨졌지만, 생명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요. 의사로서 내가 보증합니다.”

“정말이죠? 이렌 씨는 정말로 괜찮은 거죠?”

나는 그렉을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렉은 그런 나를 보며 웃으며 답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다만 심장이 깨짐으로써 이렌도 중요한 걸 잃었어요.”

“……그게 뭐죠?”

나는 혹시나 그렉의 입에서 무서운 말이 나올까 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찰나의 시간이 마치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렉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렌의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이렌은 이제 우리처럼 나이를 먹을 겁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이야기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시간은 세이렌 마네킹이 탄생했던 그날에 멈춰 있었다.

서이렌은 영원히 늙지 않으며 시들지 않는 불멸의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그녀와 작별을 해야만 했다.

언젠가는 헤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내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그녀와 나는 운명이었으니까.

나는 다시 서이렌을 바라봤다.

그녀는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 때문에 그녀의 영생이 끝났다.

하지만 이제야말로 우리가 평생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녀를 두고 먼저 떠나지 않아도 되니까.

내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서이렌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렉은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나는 서이렌의 손을 잡고 한참을 울었다.

* * *

공원에 단란한 가족이 나타났다.

남자와 여자는 항상 그랬듯이 공원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있는 흔들의자로 걸어갔다.

남자가 가지고 온 담요를 의자에 깔자 여자가 그곳에 앉았다.

젊은 두 부부의 앞,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여자를 꼭 닮은 서너 살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흙장난하며 놀고 있었다.

“영원아. 멀리 가지 말고 근처에서 놀아.”

“알았쪄. 엄마.”

영원이라 불린 아이가 여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여자는 그제야 평온한 얼굴로 남자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여자가 편히 앉을 수 있게 어깨를 틀었다.

“대표님.”

“왜 갑자기 대표님이라고 불러요? 회사에서만 대표님이라고 불렀잖아요.”

“그냥요. 갑자기 그러고 싶어서요.”

여자의 손에는 지난날 남자가 프러포즈할 때 선물했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결혼할 당시에는 회색빛이었던 돌은 지금은 영롱한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남자는 그걸 보고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대표님. 왜 웃는 거예요?”

“이것 때문에 결혼반지가 또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오해한 일이 떠올라서요.”

“아. 그거요. 그거 진짜 웃겼죠.”

여자도 남자를 따라 웃었다.

“그 해프닝 때문에 대표님 별명이 하나 더 생겼잖아요.”

“들었어요. 반지의 제왕이라면서요?”

“어떻게 아셨어요?”

“빈 이사님이 말해 줬어요.”

즐겁게 웃던 남자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대표님?”

“갑자기 든 생각인데요. 고작 반지를 두 개밖에 안 줬는데 반지의 제왕이라는 별명은 너무 거창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요?”

남자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상자 안에는 작고 귀여운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어 있었다.

여자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의 손에 꼈다.

보라색 테티스의 심장과 에메랄드의 초록빛이 어우러져 그녀의 손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대표님이 고른 거 아니죠?”

“어떻게 알았어요? 빈 이사님께 물어봤어요. 마음에 들어요?”

여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둘렀고, 여자는 남자의 품에 편히 기댔다.

아이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고 오후의 햇살은 따사로웠다.

모든 것이 완벽했고,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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