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59화 (260/261)

외전5. 망한 프러포즈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잠이 깼다.

나는 조용히 침대 아래로 내려와 열려 있는 커튼을 잡아당겼다.

방 안이 어두워지자 침대 위에 미간을 찌푸리고 누워 있던 서이렌이 그제야 평온한 얼굴이 됐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침실을 빠져나왔다.

1층으로 내려오니 거실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로 환했다.

이곳은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나와 이렌 씨의 집으로 미국에 촬영 올 때마다 이곳에 묶는다.

근처에 윤조의 집이 있고, 이 집도 윤조의 추천으로 결정했다.

부엌으로 들어간 나는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고 간단한 샐러드와 토스트였다.

준비한 음식을 접시 위에 곱게 담으니 2층에서 서이렌이 내려왔다.

빗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에 살짝 풀린 눈,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그런 모습까지 마치 화보의 한 장면 같았다.

머리를 대충 질끈 묶은 서이렌아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오더니 준비된 아침 식사를 보며 웃었다.

“와. 토스트다!”

겨우 토스트를 가지고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아침이라 간단히 준비했어요. 토스트 괜찮죠?”

“그럼요. 난 대표님이 만든 토스트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더라.”

“우유줄까요? 아니면 주스?”

“주스로 줘요.”

나는 미리 씻어 놓은 과일을 블렌더 안에 넣고 돌렸다.

이내 상큼한 생과일주스가 만들어졌고 나는 그것을 그녀 앞에 내놓았다.

“마셔요. 이렌 씨.”

“대표님은요? 식사 안 하세요?”

“난 오늘 일이 있어서 지금 바로 나가 봐야 해요.”

“응? 내가 모르는 대표님 일정이 있다고요? 무슨 일인데요?”

“그렉이랑 보기로 했어요.”

“어? 진짜요? 내가 알기로 그렉은 지금 신약 개발 때문에 한창 바쁘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아샤도 만나기 힘들다고 엊그제도 나한테 하소연을 했다고요.”

서이렌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얼버무렸다.

“나도 짬을 내서 잠깐 보는 겁니다. 점심때까지는 돌아올게요.”

나는 서이렌이 더 캐묻기 전에 재빨리 부엌을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갔다.

* * *

젠셀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연구소로 직행했다.

내가 연구실에 들어서자 티나와 제이슨이 나를 반기며 달려왔다.

“대표님. 오셨어요?”

“빨리 여기 앉아 봐요. 대표님.”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티나와 제이슨은 태블릿 PC를 꺼내놨다.

“대표님. 부탁하신 거 여기 있습니다.”

“고마워요. 티나. 내가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서요. 한국이면 모르겠는데 지금 미국이라 진짜 부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괜찮아요. 우리도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빨리 보기나 하세요.”

나는 태블릿 PC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보다 진심을 담은 문장 대여섯 줄이 더 좋다.

- 화려한 공개 고백 쇼보다는 둘만의 장소에서 조용히 한다.

- 마음과 정성을 담은 선물도 좋지만, 돈을 많이 쓴 선물도 좋다.

- 반지는 어설프게 고르지 마라. 무조건 제일 유명한 곳으로 가서 점원이 추천해 주는 걸로 사라.

티나가 부연 설명을 했다.

“젠셀 연구소에서 잉꼬부부라고 소문난 커플만 수소문해서 알아낸 거예요. 프러포즈를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까 다들 이 비슷한 대답을 해 주셨어요.”

나는 티나와 제이슨이 준비해 준 자료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왜요?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나는 초조한 눈으로 티나를 보며 말했다.

“사실은 제가 프러포즈 때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한 게 있는데요.”

“벌써요? 근데 그게 왜요?”

“그게 A4용지로 열네 장이에요.”

“열네 장이라고요? 무슨 단편소설이라도 써서 주는 거예요?”

“우리의 첫 만남부터 시작해서 함께 쌓아 온 추억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근데 여기에는 구구절절 말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티나와 제이슨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연애 경험이 많은 티나는 곧바로 해결책을 알려 줬다.

“그럼, 청혼할 때는 거기서 고르고 고른 진심이 담긴 말 몇 줄로 하시고요.”

“나머지는요?”

“열네 장은 인쇄해서 나중에 읽어 보라고 줘요. 그럼, 되겠죠?”

“아. 그렇군요.”

나는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가 이내 다시 어두워졌다.

“왜 또 그래요? 대표님?”

“반지 말입니다.”

“그거 또 왜요? 반지가 제일 중요하다고요.”

“제가 이미 반지도 준비했어요.”

“벌써요? 뭔데요?”

나는 핸드폰을 꺼내 내가 준비한 반지를 그들에게 보여 줬다.

티나와 제이슨은 눈앞에 있는 사진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프러포즈 반지라고요? 그냥 돌덩어리 아닌가요?”

“그냥 돌은 아니고요. 테티스의 심장이라는 운석입니다. 그걸 가공해서 보석으로 만든 거예요.”

“운석이든 뭐든 결국엔 그냥 돌이라는 거잖아요.”

“사실 다이아몬드나 루비나 다 돌이긴 하죠.”

티나와 제이슨은 아까보다 더 안색이 안 좋아 보였다.

“큰일이네. 아무래도 대표님이 준비한 프러포즈는 실패할 거 같아요.”

“안 돼요. 꼭 성공해야 합니다.”

“꼭 성공하셔야겠다는 분이 보석이 아니라 돌덩어리를 반지로 주시겠다고요? 여기 쓰여 있잖아요. 우리가 골라봤자 여친 마음에 드는 걸 고를 확률이 낮아요. 그러니까 무조건 제일 유명한 곳으로 가서 점원이 골라 주는 거로 사라고요.”

“테티스의 심장이 얼마나 구하기 어려운 건데요. 운석이라서 세상에 얼마 남아 있지도 않아요. 경매를 통해서 간신히 얻은 겁니다. 그리고 장인이 반지로 만들 때 저도 옆에 붙어서 도왔어요. 제 노력과 정성이 들어간 반지예요.”

“맙소사. 혹시 프러포즈하실 때 그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으실 거죠?”

“반지에 관해 설명하려면 말해야죠.”

티나와 제이슨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나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이 프러포즈…… 망할까요?”

티나와 제이슨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점심때까지 돌아온다고 했던 나는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내 가슴 안주머니에는 내가 원래 준비했던 테티스의 심장 반지와 방금 급하게 산 티파니 다이아몬드 반지가 함께 들어있다.

분명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했는데 막상 거실로 들어와 보니 온통 깜깜했다.

“이렌 씨? 어디에 있어요? 나 왔어요.”

거실 불을 켜보니 집안이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 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나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층에서 꽃향기가 났다.

서이렌이 평소에 사용하는 향수도 꽃향기가 났지만 이건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인공 향이 아닌 생화가 내는 은은한 꽃향기였다.

내가 이 층에 들어서자 갑자기 불이 커졌다.

나는 이 층을 가득 메운 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이렌은 꽃밭의 한가운데서 조용히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이렌 씨.”

나는 너무 몰라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때 서이렌은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대표님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게 나를 위해 준비한 거라고요?”

“나한테 프러포즈하시려는 거잖아요. 내가 자리는 준비해 놨으니 이제 하시면 됩니다.”

서이렌이 한 걸음 한 걸음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깔끔한 흰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나는 그 드레스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또 어떻게 찾은 겁니까?”

“대표님이 나한테 선물하려고 옷장 안에 숨겨 놓으셨더라고요. 그래서 짜잔! 입었지요.”

“하…….”

이건 내가 프러포즈하면서 선물하려고 준비한 드레스다.

빈선예의 도움을 받아 서이렌을 위해 내가 직접 디자인한 드레스.

화려한 대스타인 그녀에게는 조금은 심플한 드레스였지만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가장 고퀄리티의 드레스였다.

나는 머릿속이 너무 혼란해서 정신이 없었다.

“난 준비됐으니까 빨리하세요. 대표님.”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낮에 티나와 제이슨에게 배웠던 것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이거였다.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보다 진심을 담은 몇 마디가 좋다.]

나는 몇 날 며칠을 고생하며 썼던 열네 장짜리의 길고 긴 고백을 떠올리며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다.

열네 장짜리 고백을 단 몇 마디로 압축시키자니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답이 나왔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서이렌으로 다가가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나를 보는 서이렌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잠이 들고, 잠에서 깨는 지금의 생활이 가끔은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가 다시 만난 지 어느덧 팔 년이 흘렀다.

팔 년 동안 매일 같이 붙어 다녔고 지금도 나는 서이렌의 곁에 있지만, 그녀는 내게 여전히 꿈 같은 존재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이렌 씨.”

“예. 대표님.”

“이렌 씨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내게는 한 편의 영화였습니다. 한때는 그 영화가 새드무비일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이젠 알아요. 우리의 엔딩은 새드가 아니라 해피일 겁니다. 당신은 내 인생에 유일한 여주인공입니다. 나와 결혼해 주시겠어요?”

나는 준비한 반지를 꺼내 들고 무릎을 꿇었다.

서이렌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 보면 남자는 울지 않던데 왜 나는 지금 이 순간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건지.

나는 꾹 참으며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그때 반지를 본 내 눈이 커졌다.

테티스의 심장……?

잘못 꺼냈다.

내가 당황하자 눈물을 흘리고 있던 서이렌도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나를 쳐다봤다.

“미안해요. 이렌 씨. 이 반지가 아닙니다.”

나는 테티스의 심장 반지를 주머니에 넣고 티파니 마크가 새겨진 상자를 꺼냈다.

“대표님. 반지가 두 개예요?”

“이게 이렌 씨 거예요.”

“그럼 방금 그건 누구 건데요?”

“아. 이건…….”

“혹시 나 말고 프러포즈할 다른 사람이라도 있어요?”

“아뇨. 그럴 리가요. 이렌 씨도 잘 알잖아요. 나한테는 이렌 씨밖에 없어요.”

“그럼, 방금 그건 뭔데요?”

“사실 이것도 이렌 씨한테 주려던 거긴 한데…….”

내 변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서이렌의 두 눈이 번뜩였다.

* * *

탁자 위에 티파니에서 산 다이아몬드 반지와 원래 내가 준비했던 테티스의 심장 반지 두 개가 놓여 있다.

서이렌은 티나와 제이슨이 내게 전달한 프러포즈 조언을 보고 나서야 오해를 풀었다.

“그럼 이 다이아몬드 반지가 오늘 산 건가 보네요.”

“예. 영수증 봤죠? 아까 산 겁니다.”

서이렌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손을 내게 보여 줬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눈부신 다이아몬드 반지는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역시 베테랑 점원을 믿길 잘한 것 같다.

“마음에 들어요?”

“알이 너무 크긴 한데. 괜찮아요. 예뻐요.”

그녀의 긍정적인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서이렌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채 다른 손에 테티스의 심장 반지를 끼었다.

가공하지 않는 원석인 불투명한 회색의 반지는 투박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서이렌의 손에 끼워지자 마치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난 이것도 마음에 들어요.”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요?”

“테티스의 심장은 우리한테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요. 반지도 예뻐요.”

“아. 다행이네요.”

내가 고생해서 준비한 반지도 그녀의 마음에 든다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내가 안도하며 기뻐하자 서이렌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서이렌이 양 손가락에 반지를 낀 채 내 얼굴을 잡았다.

그녀는 내 눈을 보며 말했다.

“할게요.”

“……?”

“대표님과 결혼할게요. 대표님도 내 인생의 유일한 남주가 되어 줘요.”

서이렌은 말을 마치며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녀와 입을 맞추며 생각했다.

다행이다.

망하지 않았어.

프러포즈 대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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