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58화 (259/261)
  • 외전4. 바보 싸가지 변태

    트로이 스튜디오의 오디션 대기실 현장.

    김경록이 보온박스에서 음료수를 꺼내 이자현에게 건넸다.

    “오랜만에 보는 오디션이라 떨리죠. 긴장도 풀 겸 이거라도 마셔요.”

    이자현은 오디션 대본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어 김경록을 쳐다봤다.

    미국에 와서 김경록과 재회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지만, 그녀는 아직도 김경록이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 것이 익숙지 않았다.

    “제가 이걸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이자현은 김경록이 들고 있는 따뜻한 홍차 음료수를 보고 놀라 물었다.

    “세강이한테 물어봤죠. 근처에 있는 한인 마트에 없어서 LA를 이 잡듯 뒤져서 찾은 겁니다.”

    “고마워요. 루크.”

    이자현은 홍차 음료를 받아들고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뜻한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켜자 잔뜩 굳어 있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이자현이 이곳에서 김경록을 만나서 놀란 것만큼이나 김경록도 이자현이 아티스틱과 계약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크게 당황했다.

    한국에서 이미 톱스타인 이자현이 이렇게 미국에서 신인으로 다시 시작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한 달 전, 미국으로 건너온 이자현은 현지에서 연기 클래스와 언어 공부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오늘 대니 라모로 감독의 신작 영화 오디션을 보기 위해 이곳에 찾아왔다.

    “내년에 촬영할 저승사자 3편에 이자현 배우님도 나오실 거잖아요. 그게 방송되고 나면 미국에서 인지도가 크게 올라서 이렇게 힘들게 오디션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알아요.”

    “그런데도 도전하겠다고요?”

    “지금이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요.”

    유플릭스 인기 시리즈인 ‘저승사자’에 출연하면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이자현은 연기에 대한 매너리즘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저승사자 촬영 전에 슬럼프를 탈피하고자 모험을 강행했다.

    “왜요? 제가 못 할 거 같으세요?”

    “아뇨. 이자현 배우님이라면 이까짓 오디션쯤은 껌이죠.”

    “고마워요. 루크.”

    “그나저나 껌도 챙겨서 왔는데 드실래요?”

    “아뇨. 괜찮아요.”

    김경록은 이자현이 대본에 집중할 수 있게 뒤로 물러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트로이에서 인종에 대한 언급 없이 이민자 출신의 여성 역을 뽑는다는 오디션 공고를 내서 그런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하지만 김경록이 보기에 이자현 정도로 능숙하고 연륜이 있는 배우는 한 명도 없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또 다른 오디션 지원자들이 들어왔다.

    문을 마주하고 있는 김경록과 이자현은 새로 온 배우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 온 지수연과 무려 중국에서 날아온 샤오엔이었다.

    김경록은 지수연보다는 그녀를 따라온 매니저를 보고 대경실색했다.

    “한지욱!”

    김경록이 큰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대기실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한지욱도 김경록을 알아보고 얼굴을 굳혔다.

    큰 소리가 나자 샤오엔도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놀란 눈으로 그녀 쪽을 바라보는 김경록을 발견했다.

    샤오엔은 문 씨어터 촬영장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던 김경록을 알아보고 그에게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루크. 오랜만에 뵙네요. 그런데 저희 때문에 놀란 거예요?”

    “아! 샤오엔.”

    김경록은 뒤늦게 샤오엔과 팡닌을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샤오엔, 팡닌. 오랜만에 보내요. 잘 지냈어요?”

    “요즘 고난의 연속이긴 한데 나름 잘 지내고 있어요.”

    “펑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중국에서 활동하기 힘드시죠?”

    펑황 그룹은 탈세와 탕씨 일가의 비리로 각종 문제에 휘말려 중국당국에 찍혔고 결국엔 해체되고 말았다.

    샤오엔이 펑황 엔터 소속이니 그녀 역시 피해를 보았을 게 뻔했다.

    팡닌이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다행히 우리 샤오엔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펑황에서 나와서 개인 공작실을 차렸어요.”

    “펑황에서 나와요? 언제요? 아니 그보다 왜요?”

    중국 연예계는 꽌시라 불리는 인맥으로 돌아가는 판이다.

    그런 곳에서 펑황 엔터라는 거대한 뒷배를 놔두고 뛰쳐나와 개인 공작실을 차렸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샤오엔이 원했습니다.”

    샤오엔이 펑황에서 나간다고 했을 때 탕궈는 그녀에게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냐고 했었다.

    샤오엔과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스태프들은 모두 등을 돌렸고 유일하게 그녀를 따라나선 것이 팡닌이었다.

    “결국엔 샤오엔의 선택이 잘된 거였네요. 펑황 엔터는 지금 완전히 해체돼서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덕택에 이렇게 오디션도 보러 다닐 수도 있고 좋습니다.”

    김경록이 팡닌과 대화를 마치고 뒤돌아서는데 한지욱과 눈이 딱 마주쳤다.

    한지욱은 지수연의 곁에 알짱거리며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 * *

    한지욱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모기업인 펑황이 해체되면서 한국지사도 함께 날아갔고, 그 덕에 LOK는 다시 주인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주인이 한지욱은 아니었다.

    한지욱은 연예계를 떠나지 않고 자기 회사를 차리려고 했지만, 한성제는 그 일을 겪고도 배운 것이 없다며 모든 경제적 지원을 끊었다.

    오로지 한지욱만의 힘으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성공해 보라는 거였다.

    지난날 원세강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한지욱은 어쩔 수 없이 여러 엔터 회사에 지원서를 넣어 봤지만 그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다행히 친분이 있던 TOP 엔터의 김승민 대표에게 사정사정해서 입사했지만 로드 매니저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지금 그는 TOP 신인 배우의 로드 매니저를 하고 있는데 LOK에서 TOP으로 넘어온 지수연이 미국에 오디션을 보러 가게 되면서 얼떨결에 이렇게 따라온 거다.

    그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쳤기에 영어가 능통하기 때문이다.

    한지욱은 오늘 이곳에서 아티스틱의 팀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김경록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지욱이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김경록이 그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왜 하필 여기서 김경록을……. 진짜 재수가 없으려니까 일이 이렇게 꼬이네.’

    한지욱이 긴장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다가온 김경록은 한지욱이 아닌 지수연 앞에 섰다.

    “지수연 배우님. 오랜만에 보네요.”

    “록 이사님.”

    “저는 이제 록 이사가 아닙니다. 루크라고 불러 주세요.”

    김경록은 말을 하며 명함을 지수연에게 건넸다.

    한지욱은 혹시나 김경록이 자신에게 명함이라도 건넬까 봐 긴장했다.

    하지만 김경록은 지수연에게만 명함을 건네고 한지욱은 없는 사람 취급했다.

    “요즘 활동하시는 거 잘 보고 있습니다. 연기가 꽤 많이 느셨더군요.”

    “제가 봐도 그래요.”

    지수연은 당당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말했다.

    김경록은 여전한 지수연을 보며 웃었다.

    “지수연 배우님의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네요. 하지만 오늘 오디션은 안타깝게도 안 될 거 같습니다.”

    “뭐라고요?”

    “상대가 우리 이자현 배우님이라서요.”

    지수연도 대기실을 들어서며 이자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었다.

    지수연은 고개를 획 돌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겠죠. 저도 요즘 잘한다고요. 이렌이도 칭찬해 줬어요.”

    “예. 배우님이 요즘 열심히 연기 연습을 하고 계시는 것 같으니 조만간 좋은 기회가 있을 겁니다. 오늘은 아니지만요.”

    “지금 선배님이랑 같이 왔다고 티 내시는 겁니까? 웃겨. 정말.”

    “마침 말 한번 잘했네요. 맞아요. 선배님이시죠.”

    “예?”

    “선배님을 봤는데 인사도 안 합니까? 지수연 배우님이 새카만 후배잖아요.”

    지수연은 김경록을 째려보더니 이내 멀찍이 앉아 대본을 보고 있는 이자현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김경록은 그런 지수연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라? 예전의 지수연이 아니네. 한번은 튕길 줄 알았는데. 서이렌도 참 대단하다. 그 싸가지를 이렇게 바꿔 놨으니.’

    김경록은 여전히 한지욱을 모른 척했다.

    생각 같아선 가서 기를 확 죽여 놓고 싶었지만 로드 매니저로 지수연을 따라온 그를 보니 그럴 생각이 싹 사라졌다.

    한지욱은 자신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시하는 김경록을 보며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차마 김경록을 계속 보고 있기가 힘들었던 한지욱이 고개를 돌렸는데 마침 샤오엔이 그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 * *

    샤오엔은 한지욱을 발견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지?’

    지난날처럼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지도 않았고, 화장기 없는 생얼에 머리도 평범하게 내린 한지욱을 보며 샤오엔은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분명히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한지욱이 김경록을 보며 지었던 썩소를 보며 눈이 번쩍 뜨였다.

    “변태다!”

    팡닌이 깜짝 놀라 샤오엔을 쳐다봤다.

    “샤오엔 뭐라고? 변태?”

    “팡닌. 내가 한국에서 변태를 만났다고 했잖아.”

    “너한테 추근댔던 그 이상한 남자?”

    “맞아. 그 사람이 저기 있어.”

    “뭐라고? 그게 진짜야?”

    “안 되겠어. 팡닌. 내가 가서 한마디 해 주고 올게.”

    “샤오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때 못한 말이 있어서 집에 와서 후회했거든. 이제라도 만났으니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줄 거야.”

    샤오엔은 보고 있던 대본을 팡닌에게 건네고 성큼성큼 한지욱에게 걸어갔다.

    한지욱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에게 걸어오는 여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익숙한데?’

    한지욱 앞에 선 샤오엔은 그동안 열심히 배운 영어로 한지욱에게 따져 물었다.

    “나 기억 안 나요, 변태 씨?”

    “변태요? 지금 날 보고 하는 말입니까?”

    한지욱이 주위를 둘러봤지만. 샤오엔이 째려보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분명했다.

    “내가 그때 못한 말이 있는데요. 당신 하나도 안 멋있어.”

    “뭐라고요?”

    “오늘은 명품으로 차려입지 않았네요? 화장이랑 머리도 안 하고.”

    “그게 뭐요?”

    한지욱은 지금도 그러고 다니고 싶었다.

    그의 옷장에는 아직도 명품 수트가 가득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아서 지금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당신은 꾸며도 하나도 안 멋있다고요. 그때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이 말을 빼먹어서 말입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이봐요. 나도 당신 같은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뭐라는 겁니까? 명함을 주면서 들러붙을 때는 언제고?”

    “이봐요!”

    한지욱은 그제야 샤오엔이 누군지 기억이 났다.

    명함 한번 건넸다가 속사포 같은 중국어 욕을 듣고 바닥을 구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한지욱은 샤오엔을 이길 수가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을 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오늘은 심지어 말이 통하지 않는가?

    샤오엔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한지욱을 보며 지수연과 김경록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이들이 티격태격 싸우고 있는데 한국에서 날아온 문자를 확인하던 이자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샤오엔과 한지욱의 싸움을 구경하던 김경록이 놀라서 이자현에게 뛰어갔다.

    “왜 그래요? 이 배우님?”

    이자현은 손에 든 핸드폰을 김경록에게 보여 줬다.

    “이게 뭡니까?”

    “원 대표님이 지금 라스베이거스에 계시네요.”

    “원세강이요?”

    김경록이 원세강이라고 말하자 한지욱을 갈구고 있던 샤오엔의 귀가 쫑긋했다.

    한지욱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느새 싸움을 멈추고 이자현 쪽을 바라봤다.

    * * *

    김경록이 챙겨 온 태블릿 PC에서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해킹 방어 대회 데프콘의 생중계가 재생되고 있다.

    김경록은 영상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강이는 대체 뭐 하는 놈일까요? 컴퓨터도 저렇게 잘하다니. 난 당최 무슨 소릴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김경록의 말에 이자현이 담담하게 답했다.

    “공대생 출신이시잖아요. 그것도 한국대 컴공이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국가대표로 출전한 거잖아요. 지금도 우리 세강이 때문에 한국팀이 우승한 거라면서요?”

    뒤에 서 있는 한지욱도 영상을 보며 입을 굳게 닫았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 저런 놈을 어떻게 이기지?”

    한지욱은 남들이 못 들었다고 생각했지만, 김경록과 지수연 그리고 이자현은 한지욱의 중얼거림을 똑바로 알아들었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한지욱에게 꽂혔다.

    그들은 못 오를 나무를 쳐다보는 한지욱을 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영상을 보는 샤오엔과 팡닌도 놀라고 있었다.

    “팡닌. 원 대표님이 안 멋진 날이 오기는 할까?”

    “그만해라. 샤오엔.”

    “이제 팡닌도 알겠지? 내가 왜 원 대표님을 좋아했는지?”

    “그래. 이제 나도 아니까 그만하라고.”

    팡닌은 원세강에 대한 마음을 접고 이제는 원세강과 서이렌 커플을 덕질하는 샤오엔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샤오엔의 덕질은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자현은 고개를 들어 그녀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확인했다.

    열혈 원세강 바보가 된 김경록.

    중국에서 온 원세강 바보 샤오엔.

    아직도 원세강을 이길 생각을 하는 변태 한지욱.

    조금은 철이 든 싸가지 지수연.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원조 원세강 바보, 자신이 있었다.

    이자현은 영상 속에서 서이렌과 환하게 웃고 있는 원세강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스태프가?대기실로?들어와?오디션이?곧 시작한다고 알려왔다.

    대본을 손에 든 이자현이 홀연히 일어섰다.

    “루크. 가요. 오디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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