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3. DEFCON (1)
라스베이거스 근처 사막에서 서이렌은 지금 신작 영화, 런치 박스를 촬영하고 있다.
한참 촬영을 준비 중인 서이렌이 내 짐가방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벌써 가시려고요?”
“미안해요. 한국에 할 일이 쌓여 있어서요.”
서이렌은 아쉽다는 듯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있는 채 내 가슴에 그녀의 얼굴을 파묻었다.
“아. 헤어지기 싫다.”
“나도 싫어요. 이렌 씨.”
“그럼, 좀 더 있으면 안 돼요? 일은 강 이사님께 다 맡기세요.”
“진설 대표님이 오라고 하셨어요.”
“아. 그렇구나. 그럼, 가셔야죠. 어쩔 수 없네요.”
서이렌은 진설이 호출했다는 말에 꽉 잡고 있던 내 손을 놔줬다.
“이거 서운한데요.”
“뭐가 서운해요?”
“이렌 씨한테는 나보다 진설 대표님이 더 파워가 센가 봐요?”
“갑자기 왜 이래요? 한국에 가야 한다는 사람은 대표님이셨어요. 방금 한 말 그대로 진설 대표님께 고대로 일러바칠 겁니다.”
“그럼, 나 삐질 겁니다. 나 삐진 거 한 번도 못 봤죠?”
“뭔 소리예요? 대표님 자주 삐져요.”
“내가요?”
“엊그제도 내가 남자 주인공인 랜스와 로맨스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삐져서 저녁 내내 말도 안 했잖아요.”
“아닌데요. 난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간지럼을 태워서 화를 풀어 줬잖아요.”
서이렌이 말을 하며 내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그만 해요. 이렌 씨. 내가 실수했어요. 나 간지러운 거 못 참는다고요.”
그때 서이렌이 내 양복 안 주머니에서 항공권을 발견했다.
“어라? 이거 뭐예요?”
“뭐긴요.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이죠.”
“근데 시간이 왜 이래요? 모레 오후잖아요.”
“아. 그거요.”
“모레 오후 비행기 편인데 왜 지금 가려는 거예요? 잠깐. 이건 또 뭔가요?”
서이렌은 항공권 뒤에 있는 종이를 보고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건 라스베이거스 호텔 예약 티켓입니다.”
“호텔이라고요? 그것도 라스베이거스 호텔.”
서이렌은 나를 밀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내뿜는 분위기에 나는 놀라서 정신이 아찔했다.
나는 다급하게 이유를 설명했다.
“이 촬영장 근처라서 한번 가 보려고요.”
“지금 나를 빼놓고 혼자 라스베이거스 호텔에 놀러 가겠다고 말하는 건가요?”
“내가 예약한 게 아니고요. 친구가 보내 준 겁니다.”
“친구라고요?”
“대학교 동창이 보내 준 티켓이에요.”
“혹시 동창이 여자는 아니겠죠?”
“내가 남중, 남고, 공대 출신입니다. 여자 친구가 있을 리가 없죠.”
“그럼, 왜 갑자기 대학교 동창이 미국까지 와서 라스베이거스 호텔로 대표님을 부른 건데요? 대표님은 이 일련의 사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어라?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나는 다급하게 다 싸 놓은 가방을 풀어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가는 이유를 찾았다.
“여기에 가려는 겁니다.”
서이렌은 내가 내민 포스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제해킹 방어 대회, DEFCON.
라스베이거스 리오 호텔.
한국팀 KOR 출전.
출전 명단:
한국대 컴퓨터 공학과 교수 윤동석,
…….
아마추어 해커 이락.]
* * *
한국대 에타에 글이 올라왔다.
[한국대에타] (비밀게시판) 이번 데프콘에 출전하는 이락 말이야. 배우 이락인가?
- 동명이인이겠지.
- 아마추어 해커라잖아. 이락이라는 이름이 흔한 게 아닐 텐데.
- 이락은 검정고시 출신 아닌가?
- 이락일 리가……. 딴따라잖아.
- 컴공의 윤 교수님이 팀장 같은데 아는 사람 없나?
- 윤 교수님 랩실 사람들은 알려나?
- 그 이락 맞음.
└어떻게 알아? 윤 교수님 랩실 다니나?
└윤 교수님이 한국팀 팀원으로 강력하게 추천하셨다고 들었음.
└미친 건가? 검정고시 출신을 왜 추천해??
└실력이 좋은가 보지.
└한국대에는 실력 좋은 프로그래머가 없나? 윤 교수님도 이상하시네.
한국대 에타에 올라온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졌다.
사람들은 뜬금없는 이락의 해킹대회 출전 소식에 당황했다.
- 데프콘이면 가수 아냐?
- 국제해킹 방어 대회 이름이 데프콘이라니까.
-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해킹 대회 아님???
- 이락이 맞긴 한 거야? 동명이인 같은데. 너무 뜬금없잖아.
- 락이 오랜 팬인데 우리 락이가 사정이 있어서 검정고시 치른 거지 공부 잘했다고 했어.
- 공부 잘하는 거랑 해킹 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는 거랑은 다르지.
- 데프콘이면 경기 장면을 미튜브로 생중계해 줄 거야. 그거 보면 알겠지.
- 아는 사람만 재미있다는 대회 두 개가 바로 바둑이랑 해킹 대회 아니냐?
- 이제 해킹 대회까지 찾아봐야 하는 거냐고. ㅋㅋㅋ
- 어차피 배우 이락은 아닐 듯. 저 대회에 아무나 출전 못 해. 한국 대표가 그렇게 쉽겠냐고. ㅋㅋㅋ
* * *
리오 호텔에 도착해 보니 마중 나오기로 했던 친구 윤동석은 보이지 않고, 한국팀 ‘KOR’의 부팀장인 지석용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석용은 대광전자의 팀장을 역임하고 있는 실력파로 윤동석과 나의 대학교 1년 후배라고 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동석이는요?”
“팀장님은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급성 맹장염이래요.”
“맹장염이라고요?”
이제 곧 대회가 시작할 텐데 맹장염이라니.
나는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며 지석용에게 물었다.
“동석이는 괜찮은 거죠?”
“예. 괜찮습니다. 수술도 잘 끝났다고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문제는 우리죠.”
“아…….”
팀장이 빠졌으니 해킹 방어 대회에 나갈 수 없겠구나.
나는 축 처진 지석용의 어깨를 보며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때 문이 열리며 병원에 갔던 ‘KOR’ 팀원들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이락도 있었다.
이락은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얼굴로 달려왔다.
“대표님!”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락에게 물었다.
“병원에서 오는 길이죠? 윤 팀장은 괜찮아요?”
“예. 깨어나신 거 보고 돌아오는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환하게 웃고 있는 이락을 보니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런데 이락과 함께 들어온 팀원들이 지석용에게 가더니 뭔가 자기들끼리 속삭이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심각해 보였다.
그때 지석용이 내게 다가오더니 물었다.
“원세강 대표님.”
“예? 왜 그러시죠?”
“윤 팀장님이 깨어나서 원 대표님 말씀을 하셨다는데요.”
“동석이가요? 저를요?”
지석용이 뜸을 들이자 이락이 못 참고 외쳤다.
“대표님이 우리 윤 팀장님 대신에 대회에 나가 주세요.”
“뭐라고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자 이락이 내게 사정을 설명했다.
“대회 규정에 보면 이런 때를 대비해서 예비 팀원을 등록할 수 있나 봐요. 팀장님이 부재중이시니까 예비 팀원이 대신 올라가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난 예비 팀원이 아닌데요?”
“예비 팀원 맞아요.”
“???”
이락은 놀란 내게 ‘KOR’ 팀의 명부를 보여 줬다.
정말로 예비 팀원으로 내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뭐죠?”
“작년까지는 예비 팀원에 아무도 안 올려도 되는데 이번부터 규정이 바뀌었대요. 예전처럼 공란으로 둘 수 없다고 해서 팀장님이 대표님 이름을 적으셨다고 하네요. 어차피 대회를 보러 오실 테니 쪽수만 맞추면 된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이게 대체 무슨 말인지?
나보고 해킹 방어 대회에 출전하라는 말인가?
“난 못 해요.”
“무슨 소리예요? 하셔야죠. 그렇지 않으면 한국팀이 못 나갑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석용도 나섰다.
“원세강 대표님. 아니, 선배님.”
“석용 씨는 또 왜 그래요?”
“윤동석 교수님보다 선배님이 실력이 더 좋으셨잖아요. 저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예요. 그리고 난 졸업도 못 했어요. 자퇴생이라고요.”
“웨이티비 백도어 이슈를 확인하면서 다시 공부를 하셨다면서요?”
“누가 그래요?”
“윤동석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
어느새 ‘KOR’ 팀 모두가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락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대생 느낌이 물씬 나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못한다고 도망가면 저 사람들의 원망을 들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냥 사람 수만 채우는 겁니다. 날 전력으로 쓰지는 못할 거예요.”
“와! 대표님. 잘 생각하셨어요.”
이락은 내 속도 모르고 뛸 듯이 기뻐했다.
그나저나 이게 어디에 방송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일반인들은 해킹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니까 카메라 따위는 없을 거야.
그래. 괜찮아. 난 그냥 깍두기일 뿐이니까.
* * *
DEFCON의 운영진들은 갑자기 불어난 시청자 수에 깜짝 놀랐다.
“테리. 이게 왜 이러지?”
“뭐가? 무슨 문제라도 있어?”
“미튜브 시청자 수 말이야. 아직 방송 전인데 벌써 만 명을 넘었어.”
“만 명이라고? 작년에는 우승 직전에 만 명이었는데?”
“보라고. 채팅창도 엄청 빠르게 올라가고 있어. 아무래도 이상해. 해킹당한 것 같아. 예선에서 떨어진 다른 팀이 손을 쓴 건가?”
“우리가 생중계를 하는 것도 아니고 미튜브 앱으로 중계를 하는 건데 그럴 리가 있나.”
운영진들은 갑자기 불어난 시청자 수에 당황하며 채팅창을 확인했다.
“어라? 근데 이거 어느 나라 말이지?”
“한국어 같아.”
“케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요즘 K 드라마에 빠져 살거든. 이거 한국어가 확실해.”
케일은 핸드폰을 들더니 K 드라마 포럼에 접속했다.
그런데 포럼에 이상한 글이 떠 있었다.
[나만의 마돈나, 저승사자2에 나오는 배우 ‘이락’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해킹 대회 출전 소식]
케일은 놀라서 해당 글을 클릭했다.
“테리. ‘KOR’ 팀의 출전자 명단 좀 보여 줘.”
“갑자기 왜 그래?”
“빨리 보여 주기나 해.”
테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일의 앞에 출전자 명단을 내밀었다.
케일은 ‘KOR’ 팀의 막내로 이름을 올린 이락의 사진을 보며 깜짝 놀랐다.
“와우. 말도 안 돼.”
“왜 그래? 케일?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야?”
“K 드라마 스타가 이번 대회에 출전했어.”
“그게 누구야? 설마 배우가 우리 대회에 출전했다는 거야?”
“그래. 엄청 유명한 사람이야. 저승사자2에도 나온다고.”
* * *
아직 대회를 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사람들은 채팅창에 몰려들어 대화하고 있었다.
- 채팅창에 한국어가 이렇게 많다니. ㅋㅋㅋㅋ
- 이락 얼굴 뜨자마자 우르르 빠져나가는 거 아니냐?
- 젭알. 그 이락이었음 좋겠다.
- 스본 배우들 덕질은 너무 힘들어.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야 함. ㅋㅋㅋㅋ
- 오. 이제 시작한다.
- 라스베이거스 호텔에서 진행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뭔가 되게 공대답다. ㅋㅋㅋ
- 외국인들도 공대생들은 체크 셔츠에 청바지가 국룰인 거냐?
- 아무리 그래도 대회인데 양복 갖춰 입고 나오면 안 되나?
- 공대생들은 저게 전투복임. 이것도 나름 전쟁인데 전투복을 입어야지.
- 아. 미국팀의 제일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은 그래도 귀엽게 생겼다.
- 유일한 귀염둥이가 방금 안경 낌. ㅅㅂ
- 안경도수는 또 왜 저렇게 높아? 얼굴 왜곡되는 거 봐라. 미치겠다. ㅋㅋㅋ
- 근데 한국팀 잘하나?
- 상위권이긴 한데 최근에는 계속 우승 못 함.
- 이제 한국팀도 나온다. 팀명이 ‘KOR’이래. 존멋.
- 이름에 당당하게 한국이라고 박는 패기. ㅋㅋㅋ
한국팀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채팅창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시청자 수도 어느덧 5만을 넘어섰다.
- 미친!!!! 이락 맞잖아.
- 돌았네. 이락이잖아.
- 와. 공대생들 사이에서 이락 혼자만 군계일학이네. 미쳤다고!!!
사람들은 이락의 출현에 흥분했다.
그때 마지막으로 원세강이 무대 위에 올랐고 채팅창이 잠시 멈춘 듯 보였다.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 이락 뒤에 따라오는 남자는 누구냐? 설마 그분임??
- 오마이갓!!! 대표님이 여기서 왜 나와?
-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지? 원세강 대표님 맞지?
- ㅅㅂ 대표님이 여기서 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