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54화 (외전) (255/261)
  • 외전1. 찌질이의 사랑

    한국예술대학 연극원 동문회 정기 공연이 끝나고 열리는 회식 자리.

    윤서혁은 고개를 쭉 내밀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야. 윤서혁. 누구를 그렇게 찾아?”

    윤서혁은 연출과 동기인 강진수의 물음에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실없는 건 여전하구나.”

    “그런데 연기과는 다 온 게 아닌가 봐. 공연 참여는 못 해도 회식 자리에는 온다고 들었는데?”

    “촬영이 있는 사람들은 늦겠지. 네 말대로 늦게라도 온다고 했어. 그나저나 내가 술 한잔 따라 줄게. 윤 감독.”

    “고맙다. 강 감독.”

    “자식. 나는 아직 입봉도 못했는데 무슨 감독이야.”

    “조감독도 감독이지. 그럼 강 조감독이라고 불러 줄까?”

    “됐어. 그렇게도 부르지 마.”

    한국예술대학 연극원은 연출과, 연기과, 극작과 그리고 무대미술과로 나뉘어 있다.

    그중에서도 연출과, 연기과가 학생 수도 제일 많고 알려진 졸업생들도 많았다.

    오늘 동문회도 연출과, 연기과 졸업생을 주축으로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앉아 있었다.

    강진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술을 마시고 있는 연출과 동기 이형석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우리 기수에서는 네가 제일 스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형석이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 좀 봐라.”

    “형석이도 잘나가잖아. 도쿄 영화제에서 수상한 뒤로 엔진과도 계약했다고 하니까.”

    “너는 벌써 영화를 몇 개나 만들었고 그게 다 대박이 났잖아. 심지어 드라마 연출작도 잘되고. 유플릭스에서 방송했던 저승사자도 엄청나게 잘됐지? 그거 시리즈로 계속하자고 미국에서 연락 온다며?”

    “네가 잘못 알고 있어.”

    “응? 내가 틀렸어?”

    “저승사자는 원래 기획부터 시리즈로 만들기로 했던 거야.”

    “와. 그런 거였냐?”

    “시즌 3까지 이미 다 계약이 끝났어.”

    “그렇구나. 자식. 봐봐. 네가 제일 잘나가잖아.”

    윤서혁과 강진수가 웃고 떠드는데 이형석이 그의 무리를 몰고 다가왔다.

    이형석은 윤서혁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오랜만이다. 윤서혁.”

    “형석아. 잘 지냈어. 도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수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축하한다.”

    윤서혁은 이형석이 잔을 건네받고 미소 지었다.

    “그 영화가 너 때문에 늦게 만들어진 건 알고 있냐?”

    “어?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진짜로 모르는 거야? 네 데뷔작 때문에 미뤄진 거잖아.”

    “내 데뷔작? 혹시 287일 때문에?”

    윤서혁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에서 주는 제작 지원금. 그거 결국엔 네가 타 갔잖아. 내가 그래서 이 영화 시나리오를 지난 오 년간 묻어 놔야 했다고.”

    “그때 제작하려던 영화가 이번에 상을 탄 영화였어? 와. 잘됐다.”

    윤서혁은 진심으로 이형석의 수상을 축하했다.

    이형석은 해맑게 웃는 윤서혁을 보며 짜증이 밀려왔다.

    그때 그들 주위로 동기들이 몰려들었다.

    동기 중, 입봉한 감독은 윤서혁과 이형석 외에는 없었다.

    이형석은 졸업 전에도 한예대에서 제일 유명한 학생이었지만 윤서혁은 달랐다.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하고 말만 많은 그가 지금은 동기 중에 제일 잘나간다고 생각하니 친구들의 눈에 질투와 시기의 감정이 느껴졌다.

    “윤서혁 너는 이제 완전 흥행 감독이 다 됐더라. 나도 너처럼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부럽다.”

    “너 이제 영화는 그만하고 드라마만 찍는다며? 유플릭스에서 돈을 그렇게 많이 준다는데. 역시 돈이 좋긴 좋아.”

    옆에서 듣고 있던 강진수는 공격적인 동기들의 발언에 화를 냈다.

    “야! 너네 무슨 소릴 그딴 식으로 하냐?”

    “우리가 뭘 어쨌다고?”

    “지금 서혁이가 상업적인 영화만 찍는 감독이고, 영화보다는 돈이 되는 드라마를 찍는다고 욕하는 거잖아. 서혁이가 잘나가니까 열폭하냐?”

    “우린 그냥 팩트를 이야기한 거야. 그게 무슨 열폭이야? 우리가 진짜로 부러운 건 여기 있는 형석이라고.”

    “뭐라고?”

    “형석이는 데뷔작으로 도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어. 진짜 천재는 이런 거지. 그리고 나도 흥행할 영화를 만들 수 있어. 윤서혁도 하는데 우리가 못 할 거 같아? 대중이 좋아하는 요소를 팍팍 첨가해서 얼마든지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강진수는 이형석과 함께 온 동기들의 막말에 어이가 없었다.

    강진수는 윤서혁이 걱정돼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방금까지 옆에 있던 윤서혁이 보이지 않았다.

    * * *

    영화 촬영을 마치고 김이솔이 뒤늦게 동문회에 합류했다.

    김이솔이 나타나자 동기들이 한걸음에 그녀에게 달려갔다.

    “이솔아. 여기야.”

    “왜 이렇게 늦었어? 우리 이제 1차 끝내고 2차로 노래방 갈 거야.”

    “이솔아. 저녁은 먹었어? 2차 가기 전에 뭐라도 먹을래? 여기 비냉이 맛있더라.”

    김이솔은 한국예술대학교가 낳은 스타였다.

    그녀의 주위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연기과뿐만 아니라 연출과, 극작과, 무대미술과 졸업생들도 김이솔을 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쭉 내밀었다.

    이형석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김이솔의 등장에 미소를 지었다.

    “형석아. 너 아직도 김이솔한테 마음이 있는 거냐?”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기는. 갑자기 표정이 확 핀 걸 보면 아직도 김이솔을 좋아하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거 아니라고! 차기작을 이솔이랑 하려고 그런 거야.”

    “벌써 차기작을 하려고?”

    “이미 시나리오는 있어. 이솔이만 캐스팅되면 당장 투자도 받을 수 있을 거야.”

    “와. 역시 잘나가는 감독은 다르구나. 지금 가서 김이솔한테 넌지시 물어봐. 네 영화라면 당장에 한다고 할 거다.”

    “그럴까?”

    이형석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김이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아까부터 김이솔 주위를 얼쩡거리는 윤서혁이 보였다.

    윤서혁은 김이솔에게 말이라도 한마디 걸어 보려고 주위를 맴돌았지만, 사람들에 치여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이형석은 속으로 비웃었다.

    ‘윤서혁. 찌질한 건 변함 없네.’

    * * *

    1차 회식이 끝나고 2차로 노래방에 갔다.

    화장실에 다녀온 이형석은 머리를 만지고 온 건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김이솔에게 다가간 이형석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이다. 김이솔.”

    “안녕하세요. 선배님.”

    김이솔은 선배인 이형석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지금 윤병철 감독님의 영화를 찍고 있다면서?”

    “예.”

    “6월에 촬영 시작했지? 그럼, 조만간 끝나겠네.”

    “예.”

    김이솔은 이형석의 물음에 짧게 답했다.

    이형석은 김이솔이 여전히 낯을 가린다며 귀엽다고 생각했다.

    “내가 너한테 시나리오를 하나 보내려고 하는데 어때?”

    “…….”

    “내 차기작 시나리오야.”

    “그걸 왜 저한테 주세요?”

    처음으로 김이솔이 ‘예’가 아닌 다른 말을 내뱉었다.

    이형석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궁금해하는 김이솔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너를 생각하고 쓴 시나리오야.”

    이형석의 부담스러운 눈빛과 느끼한 말투에 김이솔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형석과 김이솔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윤서혁이 노래방 기기 앞에서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마이크를 붙잡고 서 있었다.

    화가 난 강진수는 윤서혁을 이곳에 떠밀려 보낸 동기들을 보며 뭐라고 했다.

    “야! 너네 너무한 거 아니냐? 서혁이가 양주 마시면 바로 뻗어 버리는 거 뻔히 알면서 그 독한 위스키를 한 컵이나 마시게 해?”

    윤서혁은 비틀거리며 강진수의 손을 떼어 냈다.

    “진수야. 괜찮아. 나 멀쩡해.”

    윤서혁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의 혀는 잔뜩 꼬여 있었다.

    “진수야. 나 노래 부를 거야. 번호 눌러 줘.”

    어느새 무대로 올라온 다른 동기가 강진수를 밀쳐냈다.

    “서혁이가 노래 부르고 싶다고 하잖아. 네가 뭔데 참견하냐? 윤서혁이 여친이라도 되냐?”

    그의 농담에 사람들이 큰 소리로 웃었다.

    “윤서혁. 번호 뭐 눌러 줄까?”

    “사랑해도 될까요. 내 애창곡.”

    “그래. 내가 찾아서 눌러 줄게.”

    동기는 재빨리 노래를 찾아 번호를 눌렀다.

    할 일을 마친 그는 억지로 강진수를 끌고 자리로 돌아갔다.

    위태롭게 서 있는 윤서혁은 간주가 나오자 마이크를 들고 동기들을 바라봤다.

    윤서혁의 시선에 김이솔이 들어왔다.

    “아! 김이솔이다.”

    윤서혁이 김이솔을 가리키자 동기들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윤서혁은 아직도 김이솔 좋아하나 보네.”

    “서혁이가 김이솔을 좋아한다고?”

    “몰랐어? 동기들한테는 유명한 이야기일 텐데.”

    “당시 한예대 다닌 사람 중에 김이솔 안 좋아한 사람이 없을걸?”

    “그건 그렇다. 만인의 연인이었지.”

    윤서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 동기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그대에게 꼭 하나 하고픈 말 있어요.

    차마 말로 전할 용기가 없어.

    나 지금부터 시간이 멈추는 순간까지 그대만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윤서혁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노래 가사는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제대로 불렀다.

    하지만 음정과 박자는 모두 무시한 엄청난 음치였다.

    간신히 1절을 부르고 간주가 진행되는데 윤서혁이 떨리는 손을 마이크를 들었다.

    “난 김이솔이랑 사귀면 안 되나? 왜 다들 욕하는 거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윤서혁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기들의 얼굴이 굳었다.

    “야. 쟤 취했다.”

    “미친 자식. 끌어내려.”

    “윤서혁 많이 컸네. 상업 영화 찍고 잘나간다고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

    “흑역사네. 윤서혁은 앞으로 동창회에 못 나오겠네. 쪽팔려서 어떻게 나오겠냐.”

    “와우. 나라면 그냥 위스키를 병째 마시고 기억을 지워 버릴래.”

    동기들은 난데없이 사랑 고백을 한 윤서혁을 비웃었다.

    강진수는 그런 동기들을 보며 화가 났다.

    자신이 나서서 싸우고 싶었지만, 지금은 윤서혁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는 게 더 중요했다.

    이형석은 젠틀한 신사처럼 웃으며 김이솔에게 말했다.

    “이솔아. 윤 감독이 취했나 보다. 너무 화내지 마. 윤 감독이 원래 학교 다닐 때도 찌질하기로 유명했잖아.”

    “아니요.”

    “응? 뭐라고?”

    “윤 감독님은 전혀 찌질하지 않아요.”

    김이솔이 이형석을 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형석은 갑자기 차갑게 돌변한 김이솔을 보며 당황했다.

    김이솔은 그대로 윤서혁에게 걸어갔다.

    김이솔이 윤서혁 앞에 서자 사람들은 긴장했다.

    “김이솔 화났나 보다.”

    “따귀라도 때리려고 하나?”

    “천사 같은 김이솔이 그럴 리가 없잖아.”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하던 그때,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난 일에 대경실색했다.

    김이솔이 윤서혁의 뺨을 어루만진 것이다.

    “오빠.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 이솔이다.”

    “오빠. 내려가자.”

    김이솔이 윤서혁의 손을 잡아끌었다.

    윤서혁이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이러지 마. 사람들이 본다. 이러면 안 돼.”

    “괜찮아. 돼.”

    윤서혁은 바람 빠진 인형처럼 김이솔에게 끌려갔다.

    윤서혁을 끌고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강진수는 이 놀라운 광경에 손까지 떨고 있었다.

    “강 선배님. 저 좀 도와주실래요?”

    “어. 그래.”

    “우리 오빠가 취했어요. 제가 매니저를 부를 테니 선배님이 좀 도와주세요.”

    “우리 오빠?”

    “오빠가 선배한테는 말하지 않았나요? 우리 두 사람 사귀고 있어요.”

    “뭐라고!?”

    “일 년도 넘었어요. 정말 못 들으셨어요? 오빠가 강 선배님께는 말한다고 그랬는데.”

    “말하긴 했는데……. 아까도 말했고. 몇 달 전에도 말했고…….”

    “그런데요?”

    “난 당연히 거짓말인 줄 알았지. 김이솔 네가 윤서혁이랑 사귈 리가 없잖아.”

    “이미 사귀고 있다니까요.”

    강진수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두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린 강진수는 김이솔과 함께 윤서혁을 끌고 밖으로 나갔고 홀로 남은 이형석은 김이솔이 앉았던 빈자리를 보며 속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찌질이 윤서혁이 김이솔과 사귄다고? 이게 말이 돼?’

    * * *

    회사 차를 타고 윤서혁의 집으로 가는 길.

    김이솔은 자신의 옆에서 곤히 자는 윤서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윤서혁은 자신이라는 존재가 김이솔의 커리어에 방해가 될까 봐 두 사람이 연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했다.

    하지만 김이솔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연애를 하면 내 커리어가 망가질 거라고? 난 이제 과거의 내가 아니에요. 난 나를 믿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그냥 모두에게 털어놔요.”

    곯아떨어진 윤서혁은 김이솔의 말이 들리는지 자다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와. 김이솔이다. 김이솔…… 너무 예뻐.”

    김이솔은 갑자기 실실거리며 웃는 윤서혁을 보며 미소가 번졌다.

    “대표님께 내가 말할게요. 우리 이제 공개 연애해요.”

    김이솔은 그대로 윤서혁의 뺨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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