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53화 (완결) (254/261)
  • #253화. 라스트 콘서트 (완)

    나는 지금 서이렌과 다정하게 손을 잡고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아이처럼 서이렌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와 팬들의 환호성.

    이 모든 것이 일반인의 삶을 살아온 내 인생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었다.

    슬로우를 건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이렇게 세상이 온통 느리게 흘러가는 경험을 나는 이미 한번 경험한 적이 있다.

    오 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나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주마등을 처음으로 느꼈다.

    옛날 생각이 나자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깨지 않는 긴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눈을 뜨면 다시 차가운 병원 천장이 보이는 것은 아닐까?

    깨어난 일상에 서이렌이라는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손이 찌릿했다.

    내가 긴장하자 서이렌이 내 손을 더 세게 잡아 준 것이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나는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잔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는 서이렌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제야 망상에서 빠져나왔고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 * *

    한국의 팬들은 실시간으로 SNS를 검색하며 레드카펫 글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내 SNS에 원세강과 서이렌의 사진이 미친 듯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서이렌이랑 원세강이랑 손잡고 레드카펫 밟고 있다!!!

    - 르이라어ㅤㅣㄴㅇㄹ 미넒ㄴㄹㅁㄴ러ㅣㅁ너 ㅁ

    └왜 이래? 진정해.

    - 와. 두 사람 다 미쳤음.

    - 나는 이제 더는 망붕이 아니다. ㅋㅋㅋㅋㅋ

    - 이 모습을 보려고 일 년을 기다렸네. 오늘은 발 뻗고 잘 수 있을 듯.

    - 두 사람 왜 이렇게 이쁘고 잘생겼지???

    - 기자들이랑 팬들도 흥분했어. ㅋㅋㅋ

    - 팬들 익룡 소리 내는 것 좀 봐라. 한국이나 미국이나 덕후들은 다 똑같구나. ㅋㅋㅋ- 커플 팬들 다 튀어나왔네. ㅋㅋㅋ- 서이렌 저 표정 좀 봐라. 눈에서 꿀 떨어질 듯.

    - 원세강도 서이렌이랑 똑같음. 둘 다 양봉업자로 전업해야 할 듯. ㅋㅋㅋ- 와. 오늘 무슨 날이냐? 아샤도 그렉 루이랑 같이 나타났어.

    - 모야? 두 사람도 사귐?

    - 두 사람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아샤는 서이렌 친구고, 그렉은 원세강 주치의잖아.

    - 뭐긴 서이렌이랑 원세강이 소개해 준 거겠지.

    - 아샤랑 그렉도 잘 어울려. ㅋㅋㅋ

    - 대표님 부끄러운가 봐. 아샤 그렉 커플이랑 멀찌감치 떨어졌어. 미치겠다.

    - 스님을 어쩌면 좋냐. 얼굴이 시뻘게진 거봐라.

    - 나 왜 지금 한국임??? 당장 미국으로 날아가고 싶다. ㅠㅠㅠㅠㅠ

    * * *

    강남의 모 경찰서에 천재용이 손에 수갑을 찬 채로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살이 찐 채였지만 오랜 도피 생활로 얼굴이 크게 상해 있었다.

    천재용은 신주원에게 사기를 친 돈으로 불법 도박 사이트를 오픈했다.

    그런데 누군가 그 도박 사이트를 해킹하고 경찰에 고발했기에 지난 일 년 동안 인터폴에 의해 쫓기고 있었다.

    해킹한 사람이 천재용의 모든 기록을 낱낱이 까발려서 인터넷에 올려놨기에 부인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천재용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때 맞은편에서 조서를 쓰고 있던 경찰이 핸드폰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선배님. 서이렌이랑 원세강이랑 연애한다네요.”

    “뭐야? 그게 사실이야?”

    “보세요. 사진 떴어요.”

    경찰이 핸드폰을 들어 방금 뜬 레드카펫 사진을 선배에게 보여 줬다.

    “잘 어울리긴 하네.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서이렌 님은 제 첫사랑인데 너무 슬프네요.”

    “됐어. 그만 주접떨고 정리하자.”

    “예. 알겠습니다.”

    경찰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시체처럼 의자에 앉아 있던 천재용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경찰은 놀라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쳤고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졌다.

    천재용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 안에는 손을 꼭 잡고 환하게 웃고 있는 원세강과 서이렌의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본 천재용의 얼굴이 굳었다.

    경찰은 놀라서 천재용을 밀치고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아오. 아직 할부가 일 년이나 남았는데.”

    바닥에 나뒹굴던 천재용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제기랄. 왜 다 잘들 사는데? 왜 나만 빼고 다 행복한 거냐고!!!”

    같은 시각, 중국 심천의 뒷골목 식당에 구겨져 앉아 있는 누군가는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허름한 식당의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중국어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펑황 엔터의 대표인 탕 회장이 탈세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신주원의 다 죽어 가던 얼굴이 뉴스를 보자 밝아졌다.

    [탕 회장 일가가 탕 회장의 탈세를 도왔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탕궈는 중국을 탈출하려다 공안에 붙잡혔다고 합니다.]

    탕궈가 붙잡혔다는 말에 신주원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개새끼. 저렇게 나락으로 가는구나. 크크큭.”

    신주원의 음침한 웃음소리에 식당 주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은 뉴스를 보며 실성한 듯 웃고 있는 신주원이 꼴 보기 싫어서 채널을 돌렸다.

    마침 연예 뉴스 채널이 나왔고 식당 주인은 채널을 고정했다.

    탕궈와 펑황의 몰락을 보며 웃고 있던 신주원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신주원은 벌떡 일어나서 텔레비전 앞으로 걸어갔다.

    작은 텔레비전 상자 안에서 그가 미치도록 증오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원세강, 서이렌…….”

    두 사람은 온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레드카펫을 걷고 있었다.

    신주원은 너무 세게 입술을 깨물어서 입에서 피가 흘렀다.

    “이건 아니야. 왜 나만 망하는 건데? 너네도 같이 망해야 맞는 거잖아. 스캔들이 났는데 왜 멀쩡한 거냐고!”

    분노를 참지 못한 신주원은 들고 있던 잔을 텔레비전에 던졌다.

    “챙!”

    텔레비전이 깨지고 여기저기 그 파편이 튀었다.

    “이 사람이 미쳤나?”

    뭔가 깨지는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이 미쳐서 날뛰는 신주원을 붙잡아 무릎 꿇렸다.

    신주원은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었다.

    “세상이 나한테 왜 이래? 왜 나만!!!”

    울부짖는 신주원의 귓가로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 *

    라스트 콘서트 시사회가 열리는 돌비 극장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나는 그제야 서이렌과 맞잡은 손을 놓았다.

    내가 얼마나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는지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미안해요. 이렌 씨. 내가 너무 꽉 잡고 있었죠?”

    서이렌은 내 팔에 그녀의 손을 두르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기자들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너무 짜릿해서 나도 땀이 나서 혼났어요.”

    언제나 당당한 서이렌도 떨렸다니.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아줬다.

    어느새 우리 앞에 오늘의 또 다른 커플인 아샤와 그렉이 나타났다.

    “어휴. 말 좀 하고 오라고요. 놀랐잖아요.”

    내가 놀라서 그렉에게 한마디 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세강은 아샤가 근처에 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심장이 떨렸으면서.”

    “아닙니다. 난 이렌 씨 때문에 심장이 떨리는 줄 알았다고요. 정말 몰랐어요.”

    “어이구. 이 바퀴벌레 같은 진상 커플.”

    그렉은 나를 보며 한소리를 했지만 나도 이제 만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누가 할 소리를요. 젠셀에 소문이 쫙 퍼졌던데요?”

    “뭔 소문이 났다는 겁니까?”

    “아이큐 160의 천재 소장님이 연구보다 여자친구가 더 어렵다고 하소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누가 그래요? 티나? 아니면 제이슨?”

    그렉과 웃고 떠들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이렌과 아샤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샤는 첫 영화의 첫 공개를 앞두고 긴장한 것 같았다.

    떨리는 아샤의 어깨를 서이렌이 토닥였다.

    “잘 찍어 놓고 왜 이렇게 긴장해?”

    “첫 작품이잖아. 너는 안 떨렸어?”

    “난 첫 번째 작품에서 오 분 정도 출연하는 단역이었어.”

    “정말이야? 이렌이 네가 그렇게 작은 역으로 시작했다고?”

    “물론 극이 진행될수록 반응이 폭발해서 조연까지 올라갔지만 말이야.”

    서이렌이 어깨를 으스대며 자랑하자 아샤가 눈을 흘겼다.

    “어때? 이제 긴장이 좀 풀렸어?”

    “응. 너랑 같이 웃고 떠드니까 그나마 조금 살 만하다.”

    “그럼, 됐어. 너무 떨지 마. 내 촬영분이 끝난 후에도 종종 라스트 콘서트 촬영장에 놀러 갔잖아. 거기서 본 네 연기는 환상적이었어. 그러니까 걱정할 것 하나 없어.”

    아샤가 서이렌의 손을 잡았다.

    아샤의 새로운 의수는 진짜 피부 같고 자연스럽게 움직여서 진짜 그녀의 신체 같았다.

    “고마워. 이렌.”

    “나도 고마워. 아샤. 너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고 느껴.”

    “이렌…….”

    서이렌과 아샤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데 스태프들이 극장 안으로 들어가 착석해 달라고 말했다.

    서이렌은 아샤의 손을 꼭 잡더니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앉고 남자들은 따로 앉으라고 하자.”

    “그럴까?”

    “응. 가자.”

    서이렌과 아샤가 사이좋게 웃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가자 그렉이 놀라 외쳤다.

    “아샤. 같이 가야죠?”

    나는 서이렌이 아샤와 함께 들어가는 걸 보고 그녀가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그렉은 나와 같이 앉읍시다.”

    “세강이랑 같이 앉기 싫은데요.”

    나는 삐져서 입술을 삐죽이는 그렉을 데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서이렌이 출연하는 ‘라스트 콘서트’ 평론가들의 호평]

    [모델에서 배우로. 눈부신 신예 스타, ‘아샤’]

    [역대급 특별출연. 단 10분 출연만으로 조연상 후보에 거론되는 서이렌]

    [천사의 목소리. 서이렌이 부른 OST 발매되자마자 빌보드 10위 기염]

    [라스트 콘서트 배우들 한국 땅을 밟는다. 내달에 한국에서 시사회 개최]

    - 께이. 한국에서 내한 행사한다!!!

    - 서이렌, 대표님 레드카펫 우리도 볼 수 있는 건가?

    - 미쳤다. 미쳤어.

    - 소원하면 다 이뤄지네. ㅋㅋㅋㅋ

    - 노래가 딱 한 곡만 공개됐는데도 너무 좋아.

    - 서이렌이랑 천사의 목소리 찰떡이잖아요. ㅋㅋㅋㅋ

    - 빌보드 10위 미친 거 아님? 영화 개봉 전에 싱글 하나 공개한 건데. ㅋㅋㅋㅋ- 라스트 콘서트 평도 너무 좋아.

    - 서이렌이 주연이 아니라고 해서 짜증 났는데 임팩트 엄청난가 봐. 시사회 후기 올라온 거 보면 서이렌 얘기 엄청 많아. ㅋㅋㅋ- 한국 덕후는 울어요. ㅠㅠㅠㅠ- 방금 서이렌이랑 강유미 기자 인터뷰 떴어. 앞으로 일 년간은 한국에서만 활동할 거래.

    └ㅅㅂㅅㅂㅅㅂㅅㅂ

    └드디어. 본진으로. ㅠㅠㅠㅠㅠㅠ

    └너무 좋다. ㅠㅠㅠㅠ

    * * *

    문 씨어터의 내한 행사를 진행했던 서울체육관에 또다시 기자와 팬들이 몰려들었다.

    아침부터 일어나 준비를 했더니 정신이 없었다.

    나도 서이렌과 함께 샵에 끌려가 메이크업도 하고 헤어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빈선예가 골라 준 의상까지 챙겨 입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빈선예가 마지막으로 나와 서이렌의 모습을 확인했다.

    “내가 한 거라서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좋습니다. 완벽한 커플이에요.”

    빈선예는 오늘 내내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어느덧 우리가 탄 차가 레드카펫 앞에 도착했다.

    나는 긴장한 얼굴로 서이렌을 바라봤다.

    그녀는 전혀 떨리지 않은 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대표님. 떨려요? 이번에도 내가 리드할까요?”

    “아뇨. 그럴 수는 없죠.”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빈선예는 마치 전쟁에라도 나갈 것 같은 내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레드카펫 행사장에 도착하자 나는 있는 힘껏 차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함성에 귀가 멍했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하지만 지난번처럼 어리바리 굴긴 싫었다.

    나는 당당하게 차에서 내렸고 서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이렌 씨. 제가 모실게요.”

    서이렌의 입가에 작게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차에서 내려 내 손을 꽉 잡았다.

    나는 서이렌의 손을 꼭 잡고 넓게 드리워진 레드카펫을 밟기 시작했다.

    지난날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지막으로 내 배우를 찾겠다고 소원했다.

    내가 마음껏 사랑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

    온갖 루머가 판치는 이 바닥에서 오로지 내 말만 믿고 따라와 줄 사람.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배우.

    그렇게 유통기한이 명시된 내 삶에 기적처럼 그녀가 찾아왔다.

    [나는 배신하지 않아요. 나는 마네킹이니까요.]

    비록 그녀는 약속을 깨고 나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나도 그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한다.

    이제는 내가 그녀에게 말할 차례다.

    그대는 나의 운명.

    나만의 마돈나.

    당신은 서이렌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