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48화 (249/261)

#248화. 스탠바이 ‘액션’나는 서이렌의 목소리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내 긴장을 풀어 주려고 농담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내게 결혼하자고 하는 거다.

사태가 이런데도 나만 생각하는 서이렌을 보니 고맙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했다.

나는 갑자기 울컥했지만 목소리를 가다듬고 평소처럼 말했다.

“이렌 씨.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급한 건 납니다. 내가 이렌 씨 안 놔주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 둘 다 서로를 꽉 잡아 주면 되죠? 그게 뭐가 문제인가요?]

“그럼, 기자 회견장에서 결혼 발표라도 할까요?”

[그러라고 말하는 거예요.]

“안 돼요. 우선 오늘은 계획대로 할 겁니다. 대본대로 하는 것도 벅차요. 그리고…….”

[그리고. 뭐요?]

“이렌 씨. 방금 말한 건 못 든 거로 하겠습니다.”

[결혼하자는 그 말요?]

“예.”

서이렌은 내가 이렇게 말할지 몰랐는지 짧은 탄식을 흘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맘 상해 있을 그녀에게 내 진심을 건넸다.

“프러포즈는 내가 할게요.”

[아…….]

짧은 감탄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랑 고백은 서이렌이 먼저 했지만 프러포즈는 안 된다.

프러포즈만은 반드시 내가 할 거다.

“이제 기자 회견장에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끝나고 전화할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전화를 끊은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조금 전까지 가슴이 떨리고 긴장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는 가슴을 쫙 펴고 기자 회견장으로 들어가는 두꺼운 문을 열어젖혔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플래시 세례.

나를 부르는 기자들의 외침.

그 어느 것도 내 단단한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드디어 무대의 막이 올랐고 나는 무대 위로 천천히 걸어갔다.

* * *

기자 회견은 날이 선 질문들로 시작됐다.

“스포츠뉴스의 김태현 기자입니다. 그러니까 원세강 대표님은 오늘 열애설을 해명하러 나오신 게 아니라 다른 이슈를 공론화하려고 나오신 거라고요?”

“예. 그렇습니다. 오늘 기자 회견에서 제 열애설 이야기는 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자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발언권을 가진 김태현 기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내게 따져 물었다.

“원세강 대표님. 지금 기자들이 흥분하는 것이 안 보이십니까? 저희는 이 기자 회견이 원세강 대표님과 서이렌의 열애설을 해명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온 국민이 궁금해하는 게 바로 두 분의 열애설입니다.”

김태현은 마치 서이렌의 팬이라도 되는 양 흥분해서 나를 몰아붙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말씀을 듣고 나면 아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원세강 대표님. 그렇다면…….”

나는 김태현 기자의 다음 질문을 듣기도 전에 앞에 마련된 태블릿 PC를 켰다.

내가 PC를 조작하자 내 뒤의 스크린에 뭔가 떴다.

기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화면에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다.

탕궈는 한국에서 핸드폰을 없앤 건지 이메일이나 페이스 메시지를 통해 신주원과 함께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나눈 이메일의 내용은 신주원의 사용한 해킹된 노트북으로 모두 확인이 가능했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이메일을 시간순으로 정리해서 그걸 PPT로 만들었다.

이메일의 시작은 신주원이 나와 서이렌의 사진을 찍은 다음 날이었다.

[신주원입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펑황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갈 줄 알았는데 안타깝군요.

소문으로는 LOK 한성제 대표가 쓰러진 후, 원세강 대표가 펑황에 찾아가서 두 분이 크게 싸운 적이 있다는데 맞나요?

제가 펑황에 지인이 많아서 어쩌다 보니 듣게 됐습니다.

원세강 대표가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고 여기저기 안 쑤시고 다니는 곳이 없습니다.

그게 다 서이렌이 월드 스타라서 가능한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번에 서이렌과 원세강, 두 사람 다 진창으로 끌어내릴 수 있는 기삿거리를 찾았는데 관심 있으신가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탕궈 대표님은 관심이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연락해 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이 놀라서 스크린에 뜬 메일의 내용을 확인했다.

오늘 이곳에 직접 온 신주원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기자들은 그제야 신주원을 알아보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신주원 아니야?”

“신 기자는 팬파라치에서 해고되지 않았어?”

“그러게. 펑황 고중기랑 대판 싸우고 결국 해고됐잖아.”

“신주원이 연예 신문사 차렸어. 이번 열애설 사진도 신주원이 터트린 거잖아.”

“그럼, 저 메일 내용이 진짜라는 건가?”

기자들의 시선이 신주원에게 꽂혔다.

“원세강 대표.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사람을 이렇게 음해해도 되나요?”

신주원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다음 화면을 띄웠다.

탕궈와 신주원이 나눈 페이스북 메시지였다.

두 사람이 영어로 나눈 대화에 번역을 달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편집한 거였다.

기자들은 화면에 뜬 대화 내용을 보며 기함했다.

[탕궈: 겨우 손잡고 있는 사진으로 원세강과 서이렌이 망할까요? 이거 기대 이하인데요.

신주원: 파파라치 사진은 시작이죠. 제가 작성한 후속 기사의 헤드라인입니다. 어떤가요? 보기만 해도 클릭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탕궈: 서이렌이 진짜로 미성년자 때부터 원세강과 사귄 겁니까?

신주원: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죠.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미 그걸로 끝입니다.

탕궈: 좋은 시나리오긴 하네요.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이미 기사까지 준비해 놓고 내게 연락한 이유가 뭡니까?

신주원: 제가 가진 패가 많지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스타탄생을 씹는 건 위험부담이 커서요.

탕궈: 그래서요?

신주원: 저도 보험이 있어야 마음껏 터트릴 수 있지 않을까요?

탕궈: 보험이라……. 저는 이미 한국 지사에서는 손을 떼기로 한 사람입니다.

신주원: 탕씨 일가가 펑황 엔터를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겨우 한국 시장에서 한번 실패한 거로 탕궈 대표님의 명성에 금이 갈 리가 없죠. 아직도 펑황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탕궈: 고중기가 그러던가요? 두 분이 친밀하게 지내시더니 너무 많은 걸 알고 계시는군요.

신주원: 제가 기자라서 그런지 이것저것 캐 보는 게 취미라서요.

탕궈: 뭐가 됐든 우리는 서로 같은 적을 바라보고 있긴 한 거 같군요.

신주원: 그런 셈이죠.

탕궈: 그럼, 준비한 대로 제대로 스타탄생을 털어 주십시오. 이왕이면 제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을 때는 스타탄생이 안 보였으면 좋겠군요.

신주원: 그건 힘들겠지만, 지금보다 입지를 현저하게 줄어들게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LOK를 손에 넣으셨던 것처럼 스타탄생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탕궈: 좋습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신주원: 감사합니다.

탕궈: 최근에 신문사를 차리셨다고요?

신주원: 그렇습니다. 여기저기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요.

탕궈: 작년에 나스닥에 상장한 펑황의 주식 일부를 착수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신주원: 이거 착수금의 스케일이 너무 큰데요.

탕궈: 펑황을 한국의 작은 회사들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신주원: 하하하. 그렇지요. 세계를 바라보는 펑황인데요.]

회견장의 모인 기자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기레기라고 불린 적은 있어도 매국노는 아니었다.

기자들은 돈에 나라까지 팔아먹은 신주원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신주원은 자신을 노려보는 동료 기자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가지고 온 노트북 속에 있는 메일과 페이스북 메시지의 내용이 이렇게 만천하에 까발려질 줄 생각지도 못했다.

오늘 이곳이 원세강의 장례식장이 될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장례식장이었다.

기자들은 신주원이 들으라고 대놓고 그를 욕하기 시작했다.

“신주원도 천재용의 뒤를 잇는군요.”

“천재용이 키우다시피 한 게 신주원인데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펑황이 LOK도 먹고 스타탄생도 먹으려는 수작이었네요. 이거 진짜 큰 사건 아닌가요?”

“그럼, 열애설도 조작인가요?”

열애설이라는 단어를 들은 신주원의 눈빛이 번뜩였다.

‘제기랄. 원세강.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렇게 되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궁지에 몰린 신주원은 노트북을 열었다.

엘리베이터에 달아 놨던 녹음기의 음성이 그의 노트북 안에 있었다.

신주원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른 건 몰라도 열애설은 진짜입니다.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신주원이 나를 보며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원세강. 잘 들어. 너와 서이렌이 엘리베이터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야. 들으면 아마 기억이 날 거야.”

녹음이라고?

이건 나도 생각지 못한 전개였다.

우리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고 어차피 밝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나눈 대화가 만천하에 밝혀지는 것 안 된다.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신주원이 다급하게 노트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방금까지 마이크를 들고 있던 김태현 기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은 신주원은 노트북의 스피커 앞에 들이밀었다.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은 당황하면서도 원세강과 서이렌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집중했다.

“빈 팀장님. 나는 대표님이 좋은데 대표님은 자꾸 나를 밀어내요. 어쩌면 좋죠?”

“이렌 씨. 어쩔 수 없잖아요. 대표님은 본인이 시한부니까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 이게 뭐지?

나는 놀란 눈으로 신주원을 바라봤다.

신주원도 대경실색한 얼굴로 자신의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놀라고 있는 사이, 기자 회견장에는 서이렌과 빈선예의 대화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렌 씨. 대표님이 첫사랑이라고 했죠?”

“예. 정말 옛날부터 좋아했어요.”

“대표님이 아프지 않으셨다면 아마 이렌 씨의 마음을 받아 줬을 거예요. 시한부인 대표님의 마음을 이해해 줘야 해요.”

“이번에 대표님이 약을 바꾸셨어요. 유명한 제약 회사의 신약이라는데 그게 잘 듣지 않을까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군요. 맞아요. 우리 희망을 잃지 말아요.”

“대표님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아요. 내가 지금 바라는 건 대표님이 건강하게 계속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것 그것뿐입니다.”

시한부, 짝사랑.

기자들은 녹음 내용을 들을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얼굴이 사색이 됐고 기자들은 조금 전까지 매국노라며 욕하던 신주원을 내팽개치고 내게 달려들어 질문을 쏟아 냈다.

“원세강 대표님. 시한부라는 게 사실입니까?”

“원세강 대표님. 건강 때문에 서이렌 씨의 사랑을 받아 주지 않고 있는 겁니까?”

“원세강 대표님. 뭐라고 말 좀 해 주십시오. 시한부라면 건강이 얼마나 안 좋은 겁니까?”

* * *

기자 회견장의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지켜보던 서이렌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레전드 필름의 회의실에 모인 이들은 총 여섯 명이다.

서이렌, 빈선예, 우연미, 이락, 김경록 그리고 그렉이었다.

“락아. 잘했어. 네가 마지막에 음성을 바꿔치기해서 성공한 거야.”

“빈 팀장님과 이렌 님도 잘하셨습니다. 진짜 같았어요. 특히 빈 팀장님.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세요?”

“내가 뭘 했다고. 시나리오와 대사를 써 준 우연미 작가님 덕이죠.”

“아이고.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이 모든 아이디어를 냈던 김경록 씨 덕분이죠.”

우연미의 마지막 말에 모두의 시선이 김경록에게 향했다.

김경록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원세강. 이 착한 놈은 자기만 욕먹고 끝내려고 들것 같아서요.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그렉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경록의 의견에 맞장구를 쳤다.

김경록이 진지한 얼굴로 빈선예에게 말했다.

“이제 준비한 기사를 터트려야죠. BMJ에 실린 젠셀의 기사 말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깡기자 님께 부탁해서 연예지가 아닌 일반 기사로 싣기로 했어요. 이제 곧 대표님이 완치됐다는 기사가 뜰 겁니다.”

“이 기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이 기자 회견으로 여론이 대표님 편으로 돌아서고 난 다음에 알려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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