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46화 (247/261)
  • #246화. 숨겨진 악의

    이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놀라는 사람들의 외침이 들렸다.

    순간 세상이 잠시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오 년 전,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이락이 나를 부여잡고 뭐라고 하는데 그 말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제자리를 찾았고, 서서히 내 오감이 돌아왔다.

    “대표님. 듣고 계세요? 열애설 기사가 떴어요.”

    “이렌 씨와 내 열애설이겠군요.”

    “예. 맞아요. 그것도 사진이 실린…….”

    이락이 말끝을 흐렸다.

    강진석도 기사를 확인한 건지 놀라서 내 팔을 잡고 외쳤다.

    “야. 원세강. 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강진석의 핸드폰에 뜬 사진을 바라봤다.

    서이렌과 내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사진이 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 있어서 아니라고 하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서이렌은 누가 봐도 서이렌이었다.

    당황하지 말자.

    나는 심호흡을 하며 맞은편에 앉은 서이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빈선예와 함께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고 있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서이렌은 누구보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빈선예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며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대표님.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세강아.”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주위를 돌아봤다.

    강진석, 이락뿐만 아니라 스타탄생의 모든 직원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의 눈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내게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것과 사실을 인정하고 열애 사실을 공표하는 것.

    사진은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찍혔고, 서이렌은 원래 다정다감한 성격이니 팔짱을 끼는 것 정도로 열애설로 몰아붙이기 힘들 거다.

    그러니 대표로서는 전자를 택하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서이렌의 남자친구로서는 어떠한가?

    절대 아니라고,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말하고 열애설을 부인한다면?

    서이렌은 내 뜻을 받아들일 테지만, 정말 이거면 되는 건가?

    그리고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

    우리 두 사람의 열애설 기사를 처음 보도한 기자.

    신주원.

    천재용이 키운 그의 수제자이자 팬파라치에서 해고되고 악만 남은 그다.

    “세강아. 말 좀 해 봐. 지금 나한테 기자들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강진석을 바라봤다.

    결정의 시간은 짧았지만, 그 전부터 몇 번이나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일이다.

    “형님.”

    “응. 세강아. 말해 봐.”

    “기자 회견을 좀 준비해 주세요.”

    * * *

    기사가 터지자마자 인터넷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 응?

    - 헉.

    - 헐. 대박 ㄷㄷ

    - ㅋㅋㅋ와우네

    - 하 시발. 서이렌 ㅠㅠㅠㅠ

    - 미친.

    - 원세강 미친 거 아님. 두 사람 나이 차이가 14살이잖아.

    - 하필 사귀어도 대표님이랑. ㅠㅠㅠㅠ

    - 대표님이랑 두 번째 열애설인가?? 이번엔 진짠가?

    └투샷 떴음. 빼도 박도 못함.

    └아. 사진이 있었네. ㅠㅠㅠㅠ

    - 서이렌 미쳤나 봐.

    - 원세강도 함께 미침.

    - 근데 저 사진만으로는 두 사람이 사귄다고 보기 어렵지 않음?

    - 대표님 전에도 누구랑 사귀지 않았어?

    └우연미, 샤오엔

    └전적이 화려하네.

    └그렉 루이도 잊지 마.

    └와우. 남자까지. ㅋㅋㅋ

    - 화질 안 좋은 거 봐라. 줌을 얼마나 땡긴 거냐고.

    - 스본은 아무 대응이 없음?

    - 이런 거 소속사랑 신문사랑 수위 조절한다고 딜 한다는데. 지금 한참 딜 중일 듯.

    - 원세강 이 미친 대표야. 서이렌 이제 슈스인데 대표가 앞길을 막고 있냐?

    - 나만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나도 두 사람 좋은데. 나이 차이가…….

    └나도 이게 제일 걸림. ㅠㅠㅠㅠ

    - 이거 찍은 기자 이름이 신주원임. 대박…… 신레기가 또.

    - 아오. 신레기.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왔네.

    - 신레기 좀 어떻게 해 봐요. 서이렌한테 돈이라도 떼어 먹혔나? 대체 왜 저러는 거야?

    - 스본 입장 떴어.

    - 와우. 스본이 이번 일로 기자 회견 할 거래.

    - 뭐지? 진짜로 사귀는 건가? 왜 기자 회견을 한다는 건데????

    - 하…… 대응을 보니 진짠가 보네. 미치겠다.

    * * *

    대표라는 직함이 찍혀 있는 명패를 보는 신주원의 눈빛에 만족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때 오윤기가 웃으며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신 대표. 지금 밖은 난리가 났는데 이러고 있어도 되겠어?”

    난리라는 말을 하면서도 오윤기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축배를 들긴 이르지.”

    “우리 대표님이 핵폭탄을 터트려 놓고 아주 유유자적이야. 기사 트래픽이 엄청나다고. 외국에서 접속하는 트래픽도 장난이 아니야. 그것뿐인가? 미튜브 영상도 벌써 삼십만을 찍었다고. 하하하.”

    “서이렌이 해외에도 팬이 많은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신주원은 그제야 노트북을 열고 삼십 분 전에 뜬 기사를 확인했다.

    이제 고작 삼십 분이 지났을 뿐인데 가장 많이 본 기사의 일 위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스타탄생에서는 아무 연락도 없어? 내가 지금을 위해서 전화번호도 안 바꾸고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묵묵부답이지. 아무 말이 없어. 진짜로 딜을 하지 않을 건가 봐. 오히려 내일 기자 회견을 할 거라고 기사를 냈어.”

    “기자 회견? 미쳤구나. 그냥 당당하게 밝히려는 건가?”

    “그런가 봐. 역시 원세강은 행동하는 게 좀 달라. 그렇지 않아?”

    “쳇. 그것도 이제 끝이야. 오랜만에 기자 회견장에 좀 가 봐야겠군. 내가 가서 제대로 털어 주겠어.”

    * * *

    늦은 밤, 스타탄생은 여전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터진 열애설 기사에 회식은 그길로 쫑이 나고 일부 직원들만 회사로 돌아왔다.

    홍보팀은 지금 외부 대응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회의실에는 마치 전쟁을 앞둔 군대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내 앞에는 지금 강진석과 진설이 앉아 있었다.

    나를 서이렌과 함께 나란히 서서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사실입니다. 저희는 지금 사귀고 있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서이렌의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내 앞에 있는 이들 모두가 우리 둘을 보며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진설이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원 대표. 기자 회견장에서 사실대로 다 말하려는 거야? 부인해도 되잖아. 왜 다 말하려는 건데?”

    “부인하면 그쪽에서 더 큰 걸 터트리려고 할 겁니다.”

    내 말을 들은 진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로 수십 년을 지낸 그녀다.

    진설도 기자들의 수법이라면 잘 알기에 치를 떨며 내 말을 이해했다.

    안절부절못하던 강진석이 내게 말했다.

    “신주원 쪽이랑 협상을 해 볼 수는 없는 걸까? 이대로 사실대로 말하기엔 파급력이 너무 커.”

    “저도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닌데요. 이대로 신주원한테 끌려가도 결국엔 사실이 밝혀질 거라고 봅니다.”

    “하긴 신주원이 이런 대어를 건졌으니 쉽사리 놔주지 않겠지. 진짜 팬파라치랑은 전생에 무슨 원한이라도 진 건가? 천재용 잡았더니 이제는 그놈이 키운 신주원이 사사건건 우리를 물고 늘어지네.”

    강진석은 화가 나는지 책상을 쳤다.

    진설도 화가 났지만, 표정에 화를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열애설이 난 동료들을 그동안 자주 봐 왔어. 대중은 오히려 거짓말하지 않고 진솔하게 두 사람의 사랑을 밝히면 이해해 줄 수도 있을 거야.”

    “저도 진 대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할 거야.”

    마음의 준비뿐일까?

    나는 몰라도 서이렌은 다치면 안 된다.

    나는 최대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기자 회견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이락과 최용팔이 뛰어 들어왔다.

    “대표님.”

    나는 이락과 함께 헐레벌떡 뛰어온 최용팔을 보며 놀라 물었다.

    “최용팔 씨. 여기는 웬일이세요?”

    “와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원 대표. 기생오라비처럼 생겨서 알고 보니 상남자였구먼.”

    뜬금없는 최용팔의 말에 이락이 눈살을 찌푸렸다.

    “보스. 시끄러워요.”

    이락은 최용팔을 끌고 가지고 온 노트북의 영상을 회의실 벽에 있는 텔레비전에 띄웠다.

    화면에 누군가의 컴퓨터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주원의 노트북이었다.

    강진석은 노트북 속에 차곡히 쌓여 있는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며 식겁했다.

    “이게 뭐야?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글을 쓴 거야? 락아. 네가 쓴 거야?”

    “무슨 소리세요? 이거 신주원 기자의 노트북이에요.”

    “뭐야? 신주원네 집에 쳐들어갔었어?”

    강진석은 두 눈이 똥그래져서 이락과 그의 곁에 서 있는 의심스러운 사내, 최용팔을 노려봤다.

    나는 놀라는 강진석에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신주원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훔쳐보는 중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훔쳐보다니? 그럼 해킹이라도 했단 말이야?”

    “이번에 해킹한 건 아니고요. 이미 해킹된 노트북을 신주원이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뭐라고?”

    지난날 나는 천재용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의 노트북을 해킹한 적이 있었다.

    나쁜 짓인 줄은 알지만, 그때는 방법이 없었다.

    천재용은 그 일로 팬파라치에서 해고를 당했고, 그가 사용하던 노트북이 해킹된 상태로 계속 살아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천재용이 팬파라치에서 해고되고 일 년 후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 봤는데 노트북과 접속이 됐고 해킹된 노트북은 신주원이 물려받아 사용하고 있었다.

    신주원은 팬파라치에서 해고된 이후로도 천재용의 노트북을 버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천재용의 노트북은 연예계의 더러운 비밀이 가득 찬 창고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이락에게 해킹된 노트북을 확인해 달라고 한 건데 이렇게 최용팔까지 데리고 올 줄 몰랐다.

    “후속 기사 헤드라인을 보세요. 우리가 아니라고 했다면 이 기사들을 차례차례 내보냈을 겁니다.”

    “신주원. 이게 돌았나?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고?”

    강진석이 분노해서 씩씩거렸다.

    회의실에 모인 모든 사람이 신주원의 준비한 기사의 헤드라인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그중에서도 동향인 원세강과 서이렌이 예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추측성 기사는 최악이었다.

    당시 서이렌이 십 대였으니 그때부터 만남이 이뤄진 거면 범죄였다.

    모두가 경악하고 있는데 서이렌만은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난 어리지 않았지만. 뭐 그때부터 좋아하긴 했지.’

    서이렌이 과거를 회상하며 웃고 있을 때 강진석이 책상을 다시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 새끼를 어떻게 조져 놓지?”

    “우선은 기자 회견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신주원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사까지 준비해 온 걸 보면 아마 기자 회견장에서 저를 물고 늘어질 겁니다.”

    “그래. 세강아. 이걸 몰랐으면 회견장에서 이런 걸 물어봤으면 크게 당황했을 거다. 근데 아무리 특종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한다고? 나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진설도 강진석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 원 대표. 나도 이해가 안 가. 신주원이라는 기자랑 원 대표랑 무슨 원수라도 진 거야? 어떻게 이렇게 사람이 악랄하게 판을 짠 건지 모르겠어. 소름이 돋을 정도야.”

    그건 나도 모를 일이었다.

    신주원이 혹시 천재용의 사주를 받은 건가?

    천재용이라면 나와는 불구 대천지 원수가 맞는데 신주원은 대체 뭐지?

    그때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던 최용팔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내가 왔수다.”

    모두의 시선이 최용팔에게 꽂혔다.

    “락이는 해킹된 노트북 확인하고 나는 혹시 몰라서 민수랑 아이들 몇 명을 제이티뉴스라는 곳에 보냈거든. 근데 민수가 이 사진을 보내왔더라고. 원 대표는 여기 찍힌 사람들이 누군지 알 것 같은데? 한번 보라고.”

    나는 최용팔이 내민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핸드폰 위에 뜬 사진 속에는 어둠 속에서 함께 차를 타는 두 사람이 보였다.

    신주원의 곁에 서 있는 남자.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의 차가운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탕궈였구나.

    탕궈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니.

    이 열애설은 단순한 열애설이 아니야.

    신주원은 지금 나와 서이렌을 완전히 묻어 버리려고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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