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43화 (244/261)
  • #243화. 숨어든 쥐새끼

    일전에 도나텔로 패션쇼에서 서이렌은 태양을 그리고 아샤는 달을 맡아 런웨이를 한 적이 있다.

    그때도 느꼈지만, 아샤는 서이렌의 딱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대기실에 앉아서 아샤의 연기를 보면서도 마찬가지 감정을 느꼈다.

    바로 전에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연기에 임한 서이렌과 달리 아샤는 계속 어딘가 움츠러든 모습을 보여 줬다.

    아샤를 보며 라스트 콘서트의 미아가 떠올랐다.

    미아가 완벽한 언니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저런 것일까?

    나는 오디션 내내 아샤에게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동생, 미아가 보였다.

    나는 아샤의 오디션 영상에 집중하느라 서이렌이 돌아온지도 몰랐었다.

    서이렌이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나서야 그녀가 내 옆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 역시 아샤의 연기를 보며 긴장한 탓에 내 손을 잡은 거였다.

    윤조는 준비한 연기를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는 아샤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작게 속삭였다.

    “이렌 씨, 마음이 아픈가요?”

    “아샤는 재능이 있어요. 그걸 어떻게 꺼내 써야 할지 모를 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내가 그랬으니까요.”

    담담하게 말을 내뱉은 서이렌을 보며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 역시 아샤같이 움츠러들 때가 있었나?

    내가 아는 서이렌은 한 치의 착오도 없이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의 고백에 나는 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렌 씨. 너무 놀라지 말고 들어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난 방금 아샤의 연기를 보며 라스트 콘서트의 주인공인 미아를 떠올렸어요.”

    서이렌은 순간 멈칫하며 나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놀라움과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내가 너무 직설적이었나?’라고 생각할 무렵 서이렌의 얼굴이 흥분으로 새빨개졌다.

    “이렌 씨. 그러니까 내 말은요.”

    “알아요. 대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서이렌은 잡고 있던 내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아샤에게 주인공을 양보해야 한다면 이렌 씨는 그럴 수 있겠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결정된 건가요? 아직 오디션이 안 끝났는데요?”

    “오늘 이렌 씨가 보여 준 연기라면 떨어질 리가 없죠.”

    “맞아요. 나는 오늘 완벽했어요. 미아는 완벽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

    서이렌의 한마디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맞다. 그녀는 오늘 너무 완벽했다.

    그래서 이렌 씨는 미아가 아니다.

    서이렌이 살짝 웃으며 내게 말했다.

    “양보하는 게 아니에요. 대표님.”

    “그런가요?”

    “미아의 진짜 주인공을 찾을 수 있게 대표님이 도와주세요.”

    말을 하는 서이렌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거렸다.

    이곳에 아무도 없다면 나는 아마 서이렌의 두 눈에 입을 맞췄을 거다.

    * * *

    ONE의 대표 알렌 미치는 내 말을 듣고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세강 대표님. 지금 그 말씀은 라스트 콘서트를 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영화 오디션을 보러와서 주인공에 뽑혔다는데 다른 사람이 더 잘 어울리는 거 같다니.

    알렌 미치는 영화계에 오랜 시간 몸담아 왔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처음 봤다.

    윤조도 당황해서 내 팔을 붙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오빠. 생뚱맞게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서 오로지 세 사람.

    나와 서이렌 그리고 크레이그 도슨 만이 감정의 동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크레이그 도슨은 나와 서이렌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원세강 대표님이라고 하셨나요?”

    “예. 감독님.”

    “내가 아샤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 건 왜죠?”

    “저도 대기실에서 오디션 영상을 실시간으로 봤습니다. 아샤의 연기에서 라스트 콘서트의 미아를 봤습니다. 제가 본 걸 감독님이 못 보셨을 리는 없으니까요.”

    내 말을 들은 크레이그 도슨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레이그는 아샤를 보며 미아를 떠올리긴 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는 그녀에게 복귀작의 주인공을 맡겨도 될지 고민스러웠다.

    그에 비해 서이렌은 완벽히 준비된 사람.

    당장 카메라를 들이대도 순식간에 미아로 돌변해 촬영을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을 알기에 알렌 미치가 서이렌을 주인공으로 뽑자는 말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원세강 대표뿐만 아니라 서이렌 씨도 같은 생각인가요?”

    크레이그가 묻자 서이렌이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예. 감독님. 저도 대기실에서 아샤의 연기를 봤습니다. 원세강 대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시나리오를 쓴 나도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 이렇게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지는 상상도 못 했네요.”

    크레이그는 이 말을 하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서이렌이라는 배우를 발탁했다는 한국의 소속사 대표.

    크레이그 도슨은 이상하게 가슴이 요동쳤다.

    동양에서 온 이방인을 앞으로도 볼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다음 달에 다시 젠셀의 연구소로 복귀하기로 한 그렉은 오랜만에 연구실에 와서 서류를 정리 중이었다.

    그의 책상 위는 마치 서류의 산처럼 종이 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그가 보던 연구 자료도 있었고 작성 중이던 논문도 있었다.

    순간 종이 뭉치를 정리하던 그렉의 눈이 커졌다.

    “이건?”

    그렉은 그가 마지막까지 작성하던 기고문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자료의 자료화도 모두 마쳤고 의학 저널인 BMJ에 기고하려고 초고 작성까지 끝마친 상태였다.

    “심장 섬유화 증후군의 새 치료법이라. 하.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했어.”

    그렉은 원세강의 치료 데이터가 나열된 종이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때는 원세강이라는 남자가 심장 섬유화 증후군 치료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줄 알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지금은 헛웃음만 나왔다.

    “테티스의 심장을 논문으로 발표한다면 내 명성이 땅으로 곤두박질칠 테지.”

    그렉은 BMJ에 실으려고 준비한 기고문과 자료를 모두 상자에 쓸어 담았다.

    상자 뚜껑에 ‘DO NOT TOUCH!’라고 크게 쓴 그렉은 그걸 책상 아래 처박았다.

    “시간이 나면 테티스의 심장이나 연구해 볼까? 그래. 차라리 그걸 연구하자.”

    책상을 정리한 그렉은 그제야 허리를 폈다.

    책상 위는 여전히 서류의 산이 있었지만, 그렉의 눈에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침 티나와 제이슨이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소장님. 정리는 다 끝내셨어요?”

    “응. 다했어.”

    “와. 진짜로 깔끔하게 정리가 됐네요. 이제 다시 출근하실 날이 얼마 남지 않는 게 느껴집니다.”

    티나와 제이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소장님. BMJ에서 연락이 왔어요. 언제 자료를 줄 거냐고 하던데요?”

    “그거 여기에 정리해 놨어.”

    그렉이 책상 아래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상자로 손을 가리켰다.

    상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저 중에 뭐가 BMJ에 보낼 자료인데요?”

    그때 그렉의 핸드폰이 울려댔다.

    “잠깐만. 제이슨. 나 전화 좀 받고.”

    그렉은 고개를 돌리고 전화를 받았다.

    이내 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정말이야?”

    상자를 확인하고 있던 티나와 제이슨은 그렉의 외침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렉이 이렇게 놀라는 건 오랫동안 함께 일한 그들도 처음이었다.

    “정말로 주인공으로 뽑힌 거야? 농담 아니지? 알았어. 내가 지금 그쪽으로 갈게.”

    그렉은 재킷과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달려갔다.

    나가는 그를 보고 놀란 티나가 소리쳤다.

    “소장님. 뭘 보내야 하는데요?”

    “거기 상자 위에 써 놨어. 모르겠으면 열어서 읽어 보면 알 거야.”

    그렉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의 목소리만 들렸다.

    “대체 무슨 일이시래?”

    “글쎄다. 나도 모르겠다. 우린 빨리 자료나 챙겨서 나가자.”

    그때 티나의 눈에 ‘DO NOT TOUCH!’라고 크게 적힌 상자가 들어왔다.

    “제이슨. 이건가 본데?”

    “만지지 말라고 쓰여 있잖아.”

    “중요한 거니까 만지지 말라고 하신 거겠지. 우선 열어서 보자. 열어 보면 알 거라고 하셨잖아.”

    티나는 상자를 열고 그 안의 자료를 확인했다.

    연구 자료와 함께 저널에 실을 기고문까지 싹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구 자료를 보던 티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제이슨. 이것 좀 봐 봐.”

    “뭔데 그렇게 놀란 거야?”

    “이거 우리 회사에서 개발 중인 신약이잖아.”

    “응. 맞아. 심장 섬유화 증후군 신약.”

    “이 자료 좀 보라고.”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티나가 건넨 서류 뭉치를 받아 들었다.

    “이 수치는 대체 뭐지?”

    “대단하지 않아? 신약 자체의 효과도 좋은데 여기 나온 이 환자는 거의 완치 수준으로 나았는데?”

    “장난 아니다. 여기 환자의 신상 명세까지 다 있어. 사진을 보니 동양인인데?”

    “환자랑 인터뷰한 자료도 다 있네. 봐 봐. 이거 맞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잖아.”

    “그러네. 이거 빨리 BMJ에 보내자. 이게 공개만 되면 파란을 일으킬 거라고.”

    “소장님 다시 돌아오시는 기념인가? 하하하.”

    * * *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다.

    서이렌의 귀국 소식을 철저히 비밀로 했기에 다행히 공항에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린 서이렌과 나는 장우재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자 일부러 밴이 아니라 서이렌이 신인 시절에 탔던 카니발을 가져왔다.

    “와. 이 카니발 오랜만이네요. 아직도 스타탄생에서 쓰고 있었어요?”

    서이렌은 오랜만에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느낌이 새로웠다.

    장우재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대표님. 가신 일은 어떻게 잘되셨나요?”

    “잘됐다고 볼 수 있죠.”

    크레이그 도슨은 결국 아샤를 주인공인 미아로 낙점했고 그녀의 캐스팅 소식이 조만간 기사로 실릴 예정이었다.

    서이렌은 라스트 콘서트와 인연이 없었지만 미국에 간 게 아예 헛일은 아니었다.

    크레이그 도슨과 친해진 우리는 자주 어울려 만났고 감독의 오랜 지인인 헬렌 톰슨 감독과 만나게 됐다.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여류감독인 헬렌 톰슨은 신작을 준비 중이었고 서이렌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결국 그녀가 준비하는 대작, 피아노의 주인공에 서이렌이 낙점됐다.

    윤조는 예상외의 결과에 무척 만족해했다.

    크레이그 도슨이라는 거장 감독의 복귀작에 참여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와 두터운 친분을 쌓았고, 헬렌 톰슨이라는 또 다른 거장 감독의 신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장우재는 실실거리며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디로 가실 건가요? 바로 이렌 님의 댁으로 모셔야겠죠?”

    “이렌 씨 집에 먼저 가고 후에 스타탄생으로 가죠.”

    “알겠습니다. 대표님.”

    * * *

    서이렌이 사는 빌라에 숨어든 신주원은 벌써 이 주째 지하 주차장의 봉고차에 숨어 있었다.

    장기 휴가를 간 직원의 카드를 빌려 들어온 것이기에 조만간 다시 자리를 내어 줘야만 했다.

    “제길. 이십 일이면 충분히 뭐라도 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뭐야? 하나도 건진 것이 없잖아.”

    그와 함께 잠복했던 오윤기는 임준학의 사진을 찍어서 어제 빌라를 나갔다.

    오윤기는 무려 왕년의 여배우 설미영과 함께 빌라로 들어가는 임준학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 스폰서가 있으니 그렇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거지. 암튼 오윤기랑 같이하기로 한 건 잘한 거였어. 서이렌 사진을 못 건져도 임준학 사진을 터트리면 대박 나는 거지.”

    봉고차 안에서 숨어 있던 신주원은 기지개를 켰다.

    “이만 접어야겠다. 이것도 못 할 짓이네.”

    신주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고 하는 그때였다.

    지하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어?”

    놀란 신주원의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얼굴을 구겼다.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니발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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