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38화 (239/261)

#238화. 리벤지 매치

마이팬이 끝나자마자 샤오엔은 팡닌과 함께 펑황으로 왔다.

대표실에서 팡닌과 함께 외삼촌인 탕궈를 기다리고 있던 샤오엔은 대표실 근처를 배회하다가 회의실에서 나는 큰 소리를 들었다.

샤오엔은 원세강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서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한국말로 말하는 원세강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외삼촌 탕궈의 말은 모두 알아들었다.

샤오엔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팡닌을 쳐다봤다.

“팡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상황을 이해한 팡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우리가 한국을 이용하는 거야?”

“샤오엔. 그럴 리가 있겠어? 중국의 드라마와 영화는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고. 세계적인 영화 스튜디오인 트로이도 펑황과 협업을 하고 있잖아.”

“하지만 유명한 건 한국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노래잖아. 한국의 콘텐츠가 인기 있는 걸 누가 몰라? 당국에서는 막아도 다 찾아보고 있다고. 나도 그렇고.”

“샤오엔. 우리 가자. 여기 있는 거 들키면 탕궈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팡닌. 생각해 봐. 우리가 자본을 앞세워서 한국이 만든 콘텐츠를 빼앗는 거잖아. 이건 잘못된 일이야.”

“샤오엔. 여기 계속 있다가는 원세강 대표님과 지금 마주치게 될 거야. 그러고 싶어?”

“……”

샤오엔의 얼굴이 굳었다.

원세강을 보는 게 갑자기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샤오엔.”

“팡닌.”

팡닌은 샤오엔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들이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회의실 문을 박차고 탕궈가 나왔다.

* * *

내가 대표실까지 따라 들어오자 탕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탕궈가 알아들을 수 있게 영어로 말했다.

“펑황이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겁니다.”

“원세강 대표가 이렇게 펑황에 관심이 많았는지는 몰랐네요.”

탕궈의 비서가 다가오자 그가 손을 들었다.

“나가 봐요. 나는 원세강 대표랑 할 말이 있으니까.”

“예. 대표님.”

비서가 나가자 대표실에는 나와 탕궈, 단둘만이 남았다.

탕궈는 나를 보며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스타탄생은 앞으로 우리와 합작할 생각이 없나 보군요.”

“맞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가 장담하죠. 조만간 한국의 드라마 제작 투자의 대부분이 중국 자본으로 이뤄질 겁니다. 우리는 그만한 자본력이 있으니까 말이죠. 그때 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한국처럼 세계적인 콘텐츠를 만들 자신이 없으니 돈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건가요?”

“그거 아세요? 그렇게 말해 봤자 펑황에 문제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린 한국에서 철저하게 합법적으로만 행동해 왔거든요.”

“그렇더군요. LOK를 집어삼킨 것도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셨더군요.”

“벌써 그런 것까지 조사하셨나요? 이거 내가 원세강 대표를 너무 만만하게 봤군요. 펑황의 합작 제안에 단칼에 거절 의사를 밝히길래 지금 잘나가서 눈앞에 보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염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판을 짜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배신한 LOK 배우들도 보호해 줄 마음이 없어 보이더군요. 그저 LOK를 삼키기 위한 포석이었을 테죠.”

“뭐라고 하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한국에서 반년 동안 일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거든요.”

“…….”

“한국인들이 분노하면 할수록 제가 일을 잘하는 거더군요.”

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탕궈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럴까요? 이미 웨이티비는 한국의 토종 OTT 가입자 수를 앞질렀습니다.”

“웨이티비 제작의 드라마가 런칭되면 달라질 겁니다. 당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드라마에 뻔히 보일 테니까 말이죠.”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기대하시죠.”

나는 이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더는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탕궈의 입에서 쏟아지는 역겨운 말을 듣고 있다가는 평화주의자인 나도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실 문을 박차고 나와보니 회의실에서는 여전히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마침 회의실 문을 박차고 한지욱이 걸어 나왔다.

그는 김선우와 배우들과 한바탕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걸어서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나는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지욱이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원세강. 너 아까 거기서 왜 나를 도와준 거야?”

한지욱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한지욱이 재차 따져 물었다.

“너 우리 아버지 때문에 그런 거야?”

나는 한지욱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지 말고 말해. 네가 나를 도와줄 리가 없잖아.”

“내가 너를 언제 도와줬다고 그래?”

“방금 나를 도와준 거잖아.”

“그게 너를 도운 거라고 생각해?”

“…….”

“넌 여전히 LOK에서 쫓겨난 상태고, 배신한 김선우나 그들을 이용한 펑황이 망한 것도 아니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데 내가 너를 뭘 도왔다는 거야?”

한지욱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웠다.

배신한 김선우와 배우들에게 한바탕 쏟아붓고 와서 기분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럼, 너는 이 일에 왜 끼어들었는데? 설마 네가 가지고 있는 LOK 주식이 많아?”

“미친 새끼. 지금 순간에도 그런 얘기가 나오냐?”

“이 자식이 이제 욕도 하네. 야. 너 이제 가면을 벗어던지려고 작정했구나.”

“너한테만 그런 거야. 시끄러워.”

“그럼, 대체 왜 끼어든 건데?”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래.”

“뭐라고?”

한지욱은 이런 답을 들을지 예상하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중국이 하는 짓이 너무 양아치잖아. 한국처럼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니 돈으로 그걸 빼앗으려는 거. 이게 문화침략이랑 다를 게 뭐야?

너도 TOP 미디어에서 작품을 만들어 봐서 알잖아. 작품 하나를 만들 때마다 들어가는 노력이 얼마나 커? 감독과 작가, 배우뿐만 아니라 수많은 스태프가 땀 흘려 만든 작품이야.

그걸 이렇게 자본을 앞세워서 홀랑 결과만 취한다고? 할리우드에서 일할 때도 느꼈어. 그쪽도 중국의 자본에 잠식되는 걸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 그런데 중국은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는 뻔뻔한 민족이지. 염치도 모른 채 다 쥐고 흔들려고 하잖아. 그러니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어?”

내 말을 듣고 있던 한지욱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이제야 화가 나는 거야? 아까 그 위에선 탕궈한테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더니?”

“…….”

한지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나는 입이 꽉 닫힌 한지욱을 그곳에 내버려 둔 채 밖으로 나섰다.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지욱이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홀로 걷고 있었다.

한지욱의 시선이 펑황 로비를 가로지르는 한 남자의 등에 꽂혔다.

한지욱은 그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왜 자신은 노력해도 안 되는지.

왜 스타탄생이 승승장구하는지.

왜 사람들이 원세강을 좋아하는지.

* * *

마이팬의 성공적인 개최와 함께 기사가 쏟아졌다.

[서이렌 전 세계 15만 팬들과 함께 팬 미팅 성공적으로 끝내]

[성공리에 팬 미팅을 마친 서이렌]

- 오늘 역대급이었음. ㅋㅋㅋㅋ

-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진짜 공연장에서 본 팬들 부러워. ㅠㅠㅠㅠ- 서이렌 완전 여신 같았음. ㅋㅋㅋ

- 팬들은 광신도고 ㅋㅋㅋ

- 앵콜 소리가 내가 사는 곳까지 들렸다고.

- 응원 진짜 미쳤더라.

- 대표님이랑 듀엣도 너무 예쁘지 않았음???

- 스님이랑 서이렌은 양심이 있으면 싱글이라도 하나 내줘야 하는 거 아니냐?

- 오늘 연예인도 많이 왔더라.

- 나도 오늘 연예인 엄청 봄.

- 내 앞자리에 이자현, 지수연, 박선호 나란히 앉아 있었음. ㅋㅋ? 계 탔네.

- 오늘 8구역에서 모자 푹 눌러쓴 긴 머리 여자 본 사람 없음?? 연예인 같던데 누구지?

└연예인 아님. 중국인이던데? 중간중간 중국어로 감탄사 내뱉더라.

- 내 자리 근처에도 외국인 앉아서 관람하더라.

* * *

금융감독원 건물에서 두 사람이 나왔다.

강진석이 허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LOK 대표가 바뀐 건 전혀 문제가 없다는데? 적법적인 절차를 거쳐서 이뤄진 일이라고 하네. 어떻게 할래? 더 파 볼래?”

“아뇨. 펑황이 생각이 있다면 한국에서 불법으로 일을 처리하지는 않았겠죠.”

“근데 이걸 왜 우리가 하고 있냐? 한지욱은 대체 뭘 하고 있는데?”

“어제 한성제 대표님이 깨어나셨답니다. 아마 지금쯤 병상을 지키고 있을 겁니다.”

“그렇구나. 그럼 별수 없지.”

차에 탄 나는 운전대를 잡은 강진석에게 부탁했다.

“저는 한국대에서 내려 주세요.”

“한국대? 모교에는 왜 가려고?”

“친구 녀석을 보려고요.”

“친구가 아직도 학교에 다녀?”

“아뇨. 지금은 교수로 있습니다.”

“알았어. 한국대가 넓으니까 어디로 가야 할지 내비에 찍어 줘. 내가 건물 앞까지 데려다줄게.”

강진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한국대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나는 곧바로 친구, 윤동석이 있는 교수실로 갔다.

“와. 원세강. 이게 얼마 만이야.”

“잘 지냈어? 동석아.”

윤동석은 함께 컴퓨터공학과를 다닌 절친이다.

“차 마실래?”

“아니야. 마시고 왔어. 그나저나 내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됐어?”

“급하기는. 잠깐만 기다려 봐.”

윤동석은 내게 태블릿 PC를 건넸다.

거기에는 웨이티비에 설치된 백도어가 상세하게 분석되어 있었다.

“사용자가 설정을 건드리면 백도어에 해당하는 코드가 작동되는 구조더라. 꼼꼼하게도 숨겨 놔서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어.”

나는 자료를 보며 펑황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거 처음 분석한 사람이 대체 누구야? 실력 있는 해커 같은데. 혹시 너 아냐?”

“코드 안 본 지 십 년은 넘었어. 나 아냐.”

“한국대 학생은 아니지? 우리 랩실에 그렇지 않아도 사람이 부족한데.”

“농담하지 말고. 너 조만간 정부에서 주최하는 보안 콘퍼런스에 참석할 거라면서?”

“맞아. 바로 다음 주야.”

“그때 이 어플의 백도어 이슈를 공론화해 줄래?”

“당연하지. 오히려 내가 발표해도 되는 거냐고 너한테 물어보려고 했어. 그리고 이거 중국이 만든 어플이더라.”

“맞아. 중국이 만든 거야.”

“중국이 별의별 제품에 백도어를 심어 놓은 건 유명하지. 하다못해 다리미에도 백도어를 심어 놓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암튼 너만 믿을게.”

나는 할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려고?”

“미안해. 요즘 바빠서.”

“그래. 너 바쁜 거야 세상이 다 아니까. 대신 다음 동창회에는 꼭 참석해라.”

“알았어. 일정이나 미리 보내 줘.”

한국대에서 나온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내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깡기자가 내 전화를 받았다.

[원세강 대표님.]

“깡기자님. 부탁드린 건 알아보셨나요?”

[김선우랑 몇몇 배우들이 보유했던 LOK 주식을 김유석이라는 사람에게 넘겼대요. 그 김유석이 펑황에 주식을 다시 넘긴 것 같아요. 김선우와 다른 배우들은 그 대신 펑황의 지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김선우 매니저가 술만 마시면 있는 말 없는 말 다 하는 사람이라서 전부 다 불더라고요.]

“펑황이라면 혹시 본사인가요?”

[미국에 상장한 펑황의 주식인가 봐요. 김선우랑 배우들은 주식만 넘겼을 뿐이지 지금도 LOK 소속이에요.]

“욕은 먹고 싶지 않은가 보네요. 겉으로는 LOK를 떠나지 않은 것으로 위장하고 있으니 말이죠.”

[알아보니 업계에서는 한지욱이 떨궈져 나간 걸 의심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워낙에 전부터 사고를 치고 다니던 사람이라 그런지 다들 그러려니 하나 봐요.

그건 그렇고 이거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저는 이거 기사로 못 내요. 제가 데스크에 살짝 흘려 봤는데 편집장님도 이건 연예지가 아니라 시사 파트에 실려야 하는 이야기가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김선우를 비롯한 엮인 배우들이 많아서 그것도 감당이 안 되고요.]

“제가 괜히 이런 걸 알아봐 달라고 해서 무거운 짐을 지워 드렸군요. 조사한 자료만 저한테 따로 넘겨주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LOK와 펑황을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어서요. 그 사람들한테 넘기면 잘 처리해 줄 겁니다.”

[예? 그런 사람이 있어요?]

“자료는 메일로 보내 주세요.”

[갈수록 모를 말만 하시네. 암튼 자료는 보내 드릴게요.]

“고마워요. 깡기자님.”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고사가 있다.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라는 말로 다른 사람을 이용해 뜻하는 바를 이룬다는 뜻이다.

펑황이 한국에서 제멋대로 설치도록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남의 칼을 빌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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