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37화 (238/261)
  • #237화. 탕궈

    병실에서 나온 나와 강진석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세강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니 얼마나 다행이니.”

    “그러게요. 천만다행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LOK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다니. 주찬영 걔는 이제 LOK 사람도 아니잖아. 그리고 주찬영은 경영이나 알지 무슨 배우 소속사 대표야? 말이 안 되는 거지.”

    사정을 모르는 강진석은 이번 대표 해임 건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그때 병실 문을 박차고 한지욱이 나왔다.

    그는 독기 가득 찬 눈으로 돌아보지도 않고 내달렸다.

    “쟤는 뭐야? 병실을 안 지키고 어딜 가려는 거야?”

    “방금 팬 미팅이 끝났다고 하니 형님은 그곳으로 가 주세요. 저는 가 볼 곳이 있습니다.”

    “야! 너까지 어딜 가려는 건데?”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 * *

    펑황의 입구를 막고 있는 직원이 나와 한지욱을 위아래로 훑었다.

    “약속이 안 되어 있으시다면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직원의 말에 한지욱은 울컥했다.

    “나 기억 안 나요? 탕궈랑 지난달에도 여기서 회의를 했잖습니까?”

    “죄송합니다. 출입이 허락된 분만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한지욱이란 분은 오늘 미팅 약속이 잡혀 있지 않으십니다.”

    “이봐요!”

    한지욱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직원과 싸웠다.

    LOK 대표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방금 해임되었기에 LOK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펑황에 도착한 나는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한지욱을 발견했다.

    내가 나타나자 한지욱의 두 눈이 커졌다.

    “제길. 역시 너였구나? 네가 펑황과 짜고 우리 LOK를 먹으려는 거지?”

    “시끄러워. 넌 좀 입 좀 다물고 있어.”

    “지금 너까지 나를 무시하는 거야?”

    나는 한지욱을 뒤로한 채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미국에서 받았던 팡닌의 명함이다.

    샤오엔의 명함은 서이렌이 찢어 버렸지만, 팡닌의 명함은 계속 가지고 있었다.

    본사 직원의 명함을 본 직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위에 전화를 걸어 팡닌에 관해 확인해 보더니, 공손한 태도로 내게 다가왔다.

    “스타탄생의 원세강 대표님이시죠? 본사 직원을 아시는군요.”

    “이제 들어가 봐도 되나요?”

    “팡닌은 K드라마어워즈 때문에 이틀 전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펑황 직원들이 정중한 태도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얼떨떨한 채로 이 상황을 지켜보는 한지욱을 보며 말했다.

    “뭐 해? 안 따라올 거야?”

    “너 뭐 하는 거야?”

    “따라올 거면 얌전히 입 다물고 따라와.”

    한지욱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원세강이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가 됐든 우선은 탕궈를 만나야 했다.

    한지욱은 생각을 정리하고 내 뒤에 찰싹 붙었다.

    “이분도 일행이신가요?”

    “저와 함께 왔습니다. 같이 들어가면 안 되나요?”

    “아뇨.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같이 가시죠.”

    팡닌의 명함을 이용해 출입 허가를 받은 나는 한지욱을 이끌고 곧바로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나는 옆에 선 펑황의 직원을 보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탕궈 대표님도 계시죠?”

    내 질문에 펑황의 직원이 정중하게 답했다.

    “지금 배우분들과 함께 미팅 중이십니다.”

    “배우라면……. 혹시 김선우입니까?”

    “맞습니다. 지금 LOK의 다른 배우분들도 함께 계십니다.”

    김선우를 비롯한 LOK 배우들이 탕궈와 미팅 중이라는 말에 한지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구 층 대표실 옆의 회의실로 가시면 됩니다. 제가 안내해 드릴까요, 원세강 대표님?”

    “아닙니다.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저 혼자 가겠습니다.”

    “함께 오신 분도 미팅에 참여하시나요? 혹시 비서신가요?”

    “이분은…….”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지욱을 돌아봤다.

    그는 분노에 치를 떨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다.

    한지욱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펑황의 직원을 보며 처음에는 화가 났었다.

    하지만 점점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실감하고 있었다.

    이름뿐인 대표.

    자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딱 이거였다.

    하지만 원세강은 달랐다.

    펑황 직원들은 원세강을 향해 정중한 태도로 일관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원세강의 얼굴만 보고 그를 알아보고 놀라 인사를 했다.

    같은 대표였지만 원세강과 자신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지욱은 그 차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펑황의 직원은 오 층에서 먼저 내렸고, 엘리베이터 안에는 나와 한지욱 단둘만 남았다.

    한지욱은 엘리베이터가 구 층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김선우를 비롯한 LOK 배우들은 탕궈가 내민 제안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김선우의 좌우로 얼굴만 봐도 아는 사람들이 대여섯 명 나란히 앉아 있었다.

    LOK에서 명예 이사 직함까지 받은 김선우가 직접 설득해서 데려온 LOK 배우들이었다.

    김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탕궈에게 말했다.

    “한성제 대표님이 쓰러지셨다는 기사가 떴습니다. 보셨나요?”

    “금시초문입니다. 제가 그런 그것까지 알아야 하나요?”

    탕궈는 중국어로 답했고 옆에서 비서가 그의 말을 실시간으로 통역했다.

    탕궈는 오전에 주주총회가 끝나고 떠나는 한성제가 비틀거리는 것을 목격했으나 모르는 척했다.

    김선우와 다른 배우들은 그 일이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 주셔야겠습니다. 왜 그런지는 잘 아시겠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LOK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주인만 바뀔 뿐이죠. 여러분들은 계속 LOK 소속일 테니 염려 마십시오.”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 차단해 달란 말입니다.”

    “별걱정을 다 하시네요. 저희와 협력관계에 있는 신문사들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탕궈는 주식을 넘겨서 한성제 대표에게 뒤통수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욕을 먹을까 봐 몸을 사리고 있는 배우들을 보며 혀를 찼다.

    ‘인기에 목을 매는 스타라 그런지 이미지 걱정을 하는군.’

    탕궈는 배신한 배우들이 걱정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바닥에 소문이 퍼지든 말든 상관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김선우라는 배우는 이미 하락세를 탄 지 한참인 배우였다.

    탕궈가 가식적인 미소로 배우들을 대하고 있는 게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렸다.

    “원세강 대표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대표님!”

    비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스타탄생의 원세강 대표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쫓겨난 LOK의 대표, 한지욱이 서 있었다.

    * * *

    펑황 한국 지부의 대표, 탕궈.

    나는 오늘 그를 처음 보는 거다.

    그가 스타탄생에 접촉하려고 내게 여러 번 연락했었으나 나는 언제나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나를 보는 탕궈의 표정이 밝지 않아 보였다.

    LOK처럼 스타탄생은 쉽게 협력관계로 만들지 못할 것 같으니 아예 적대시하기로 한 것 같았다.

    나는 탕궈를 뒤로하고 회의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LOK 배우들을 훑어봤다.

    LOK의 개국공신이자 한성제가 가장 많이 아꼈던 김선우가 제일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지난 십 년간 LOK에서 인기를 구가한 스타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고개를 돌렸다.

    한지욱은 책상 위에 놓인 제안서를 보고 나서야 상황이 어찌 된 일인지 깨달았다.

    “김선우!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이 간신배 같은 새끼.”

    “펑황은 이렇게 아무나 막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까? 재수 없네.”

    김선우는 한지욱을 보고 대놓고 조롱했다.

    “김선우. 너 말 다 했어?”

    한지욱은 뻔뻔한 김선우를 보며 손이 떨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김선우, 네가 배신할 수 있지? LOK가 너를 얼마나 밀어줬는데?”

    “그렇게 밀어줘서 대탈출이 망했나? 이게 다 한지욱 너 때문이잖아. 안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LOK를 배반하고 싶어서 했을까요? 경영이 엉망이면 수장을 바꿔야지요. 같이 침몰하는 배에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김선우는 다른 배우들을 보며 물었다.

    그들은 한지욱의 시선은 피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김선우의 말에 동조했다.

    김선우는 이것 보라며 한지욱을 비웃었다.

    “LOK는 사라지지 않아. 하자투성이인 대표, 한지욱 너만 잘리는 거라고. 알아? 이게 무슨 배신이야? 우린 LOK를 살리려고 하는 거라고.”

    듣는 내가 다 어이가 없었다.

    김선우가 연기를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아니었다.

    연기파셨네.

    나는 김선우와 배우들이 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한지욱에게는 타격이었나 보다.

    그는 손을 떨며 김선우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반박하지 못했다.

    대표가 된 지 오 년이 지났다.

    그동안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배우들이 자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상황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지켜보던 탕궈가 끼어들었다.

    “LOK 집안싸움인 거 같은데요. 원세강 대표가 끼면 안 되죠. 나가 주시죠.”

    “아뇨. 저도 LOK 사람입니다. 제 친정이 LOK라서요.”

    탕궈는 내 말을 듣고 실소를 흘렸다.

    나는 김선우를 비롯한 LOK 배우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펑황을 비롯한 중국이 왜 한국에 진출했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갑자기 펑황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걸까?

    배우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나를 쳐다봤다.

    “이번에 한국에 진출한 웨이티비가 있죠. 그건 이미 중국에서 활발히 서비스 중인 OTT 서비스입니다. 웨이티비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플릭스를 본떠서 만든 건 잘 아실 테죠. LOK에서 제작 투자했던 모든 드라마가 웨이티비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까?”

    “중국은 웨이티비를 자국에서뿐만 아니라 국제판으로도 서비스 중입니다. 그런데 잘되고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죠. 중국에서만 50억 뷰, 100억 뷰라며 떠들 뿐이지 유플릭스와 비교할 처지가 못 됩니다.”

    내가 정곡을 찌르자 탕궈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중국이 택한 방식이 한국 드라마를 이용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한국 드라마에 기생하는 거죠.”

    내가 한 말을 통역을 거쳐서 들은 탕궈가 화나서 소리쳤다.

    “기생이라니요. 원세강 대표!”

    “제가 틀렸습니까? 중국 자본으로 제작된 한국 드라마가 웨이티비를 통해 동남아를 비롯한 세계 시장에 팔리고 있습니다. 이게 한국 콘텐츠의 인기에 기생하는 게 아니면 뭡니까?”

    “말을 너무 심하게 하는군요. 원세강 대표가 이런 사람이었습니까?”

    나는 분노하는 탕궈를 뒤로하고 다시 김선우를 쳐다봤다.

    김선우는 내 시선을 느끼더니 뻔뻔하게 나왔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웨이티비가 중국 서비스이지만 내가 찍은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라는 말입니다.”

    “말이 한국 드라마지. 돈을 대는 중국 입맛에 맞게 제작되는 드라마입니다. PPL도 모두 중국 제품이라고 들었는데요.”

    “원세강 대표는 잘 알지도 못하면 떠들지 마세요. PPL은 PPL일 뿐입니다.”

    “이미 대본 단계에서 검열을 받아서 내용을 고친 거라면요?”

    “뭐라고요?”

    “제가 듣기로는 대본이 나오면 펑황 측에서 먼저 검열하고 제작사에 넘겨줬다고 들었습니다.”

    “그럴 리가요.”

    “여기 펑황의 대표인 탕궈가 있으니 직접 물어보시죠.”

    김선우는 탕궈를 노려보며 물었다.

    “지금 원세강 대표가 한 말이 모두 사실입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당연히 중요하죠. 이게 사실로 밝혀지면 당신네 드라마를 찍은 나까지 욕을 먹는다고요.”

    “아까 김선우 배우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한국인입니다. 한국말로 한국에서 드라마를 찍었으니 그건 한국 드라마죠. 다른 게 뭐가 문제죠?”

    조롱 섞인 탕궈의 말에 김선우는 어이가 없었다.

    탕궈는 김선우와 배우들 앞에 놓인 제안서를 손에 들고 말했다.

    “이미 계약서에 사인하셨잖습니까? 한배를 타 놓고 이제 와서 후회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뭐라고요?”

    “그리고 원세강 대표가 생각하는 건 기우예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닙니까? 우리는 그저 콘텐츠를 파는 상인일 뿐입니다.”

    탕궈가 손을 들더니 비서를 불렀다.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던 비서가 쪼르르 달려왔다.

    비서에게 귓속말을 마친 탕궈가 뒤돌아섰고, 김선우는 그를 보며 소리쳤다.

    “이봐요. 탕궈!”

    “나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박 이사와 말해 봐요. 아! 그리고 고중기 이사는 이미 일선에서 물러났으니 연락하지 마시고요.”

    탕궈는 김선우와 배우들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그대로 회의실을 떠났다.

    탕궈가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설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탕궈에게 할 말이 남았기에 그를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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