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33화 (234/261)
  • #233화. 천재 감독의 귀환

    아침부터 사무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어젯밤 마셨던 맥주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회사 분위기가 왜 이래요? 진석 형님?”

    “세강아.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두통이 있어서 약국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왜요?”

    “진설 대표님께서 아침부터 너를 찾으셨어. 레전드 필름에 가 봐.”

    진설이 나를 찾았다는 말에 나는 의문이 들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없는데 무슨 일이지?

    나는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레전드 필름에 가 보니 직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한걸음에 대표실로 달려갔다.

    문이 열리자 진설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에서는 근심 걱정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웃고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우선 앉아 봐. 원 대표.”

    진설은 노트북을 들고 내 곁에 앉았다.

    “이게 뭡니까?”

    “아티스틱에서 레전드 필름에 보내온 시나리오야. 윤조 씨가 보내왔어.”

    “윤조가 진설 대표님께 직접요?”

    “원 대표한테 먼저 보낼까 하다가 나한테 보낸 거래.”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시나리오 앞장에 적힌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라스트 콘서트.”

    진설의 표정을 보면 분명히 좋은 작품이라는 건데.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갔다.

    * * *

    엔진의 박주호 대표는 펑황의 제안서를 덮었다.

    비서는 심기 불편한 박주호의 표정을 보고는 곧바로 제안서를 치워 버렸다.

    “LOK 대표를 연결해.”

    “예. 대표님.”

    “잠깐만! 멈춰 봐.”

    박주호는 고민하더니 이내 비서에게 말했다.

    “TOP 김승민 대표 연결해 주고 나가 봐요.”

    “예. 알겠습니다.”

    비서는 펑황의 제안서를 들고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대표님. 김승민 대표님 전화 연결됐습니다. 지금 바로 돌려 드리겠습니다.]

    박주호는 전화를 들었고 수화기 너머로 김승민 대표의 음성이 들렸다.

    [박주호 대표님께서 저를 찾으시고. 웬일이세요?]

    “잘 지냈어, 김 대표?”

    [저야 똑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우리한테도 펑황의 투자 제안서가 왔는데 말이야.”

    [펑황이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김승민 대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지금 펑황의 투자를 받아서 작품을 만들고 있는 곳이 LOK 밖에 없잖아. 그거 TOP 미디어에서 만들고 있는 거지?”

    [예. 그렇죠.]

    “상황이 어때? 난 제안서만 보면 눈이 돌아가던데.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다고?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드라마는 완전 사전 제작으로 거의 촬영이 끝났습니다.]

    “벌써? 빠르네. 펑황에서 간섭은 없어?”

    [없을 수가 없죠. 그렇게 돈을 많이 주는데요.]

    “무슨 간섭? 혹시 검열인가?”

    [그런 건 아닌데…….]

    “뭐가 문제가 되는데? 말해 줄 수 있어?”

    김승민 대표는 고민하고 있는지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PPL도 중국 제품으로 해야 하고 중국이 싫어할 만한 걸 다 쳐 내더군요.]

    “뭘 쳐 냈는데 그래?”

    [원래는 대만에서 로케를 진행하려고 했는데 펑황이 로케 장소 자체를 바꿔 버렸습니다. 상해로요. 그래서 대본도 그것에 맞게 수정해야 했고요.]

    “하. 그렇구나. 그럼, 검열이나 다름없네. 감독이나 스태프들은 뭐라고 안 해?”

    [불만이 많죠. 다시는 펑황이 투자한 작품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김승민 대표가 고생이 많았겠네.”

    [박 대표님은 펑황의 투자 제안을 거절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무리 봐도 별로야. 펑황에서 자기들이 중국에서 운영 중인 OTT 플랫폼을 한국에 런칭한다는데. 그 플랫폼에 내 작품이 들어가는 거잖아. 그게 제일 꺼려지더라고.”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 알겠네요. 저희도 LOK에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펑황의 투자를 받아서 작품을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 알았어. 오늘 말해 준 거 고마워.”

    [오늘 나눈 이야기는 비밀로 해 주세요. 저희도 별 잡음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작품은 촬영이 끝나 가니까요.]

    전화를 끊은 박주호의 입가가 비틀렸다.

    “지들이 한국처럼 좋은 콘텐츠를 못 만드니까. 이제는 우리 콘텐츠에 지들이 넣고 싶은 걸 넣어서 팔려고 해? 아주 도둑놈들이구먼. 돈만 있는 도둑놈들.”

    * * *

    대본을 다 본 서이렌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때요? 대본이 좋죠?”

    “예. 대표님.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인데요?”

    “크레이그 도슨이라고 원티드, 흑백의 연인, 라인 등을 만든 유명한 감독님이 쓰신 작품입니다. 이렌 씨는 아마 잘 알 거예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분 영화는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하지만 은퇴하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맞아요. 은퇴하셨다가 누군가 방송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창고 안에 넣어 둔 이 시나리오를 꺼내셨대요.”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사고로 배우를 잃고 실의에 빠져 은퇴한 천재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을 수 있게 만든 사람이 바로 서이렌, 당신이라고요.

    서이렌은 놀랐는지 떨리는 손으로 대본에 손을 올렸다.

    라스트 콘서트는 쌍둥이 자매에 관한 이야기다.

    천사 같은 목소리에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진 동생과 그런 동생에 비해 평범한 재능을 가진 언니가 극의 주인공이다.

    동생은 음반 발매를 앞두고 불의의 사고로 죽고 언니가 동생의 노래를 부르며 대신 가수가 되는 것이 시나리오의 주요 내용이다.

    크레이그 도슨은 섬세한 시각으로 두 자매의 감정선을 그려 냈다.

    무대 공포증이던 언니는 동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데 시나리오를 읽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이렌 씨. 할 거죠?”

    “그런데 쌍둥이라면 1인 2역인가요?”

    “맞아요. 1인 2역입니다.”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렌 씨의 출연이 확정이 아닙니다.”

    “그럼요? 뭘 해야 하죠?”

    “감독님은 오디션을 보기를 원하세요.”

    나는 말을 뱉어 놓고 서이렌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서이렌에게 들어오는 할리우드 대본의 상당수는 오디션이 필요 없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오디션을 보라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다.

    서이렌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긋했다.

    “제가 또 오디션 체질이잖아요. 오디션만 봤다 하면 주연으로 뽑히는데요?”

    역시 서이렌은 이런 거로 화를 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는 오히려 오디션을 본다는 사실에 자신만만해했다.

    “오디션은 언제인데요?”

    “팬 미팅이 끝난 후가 될 거 같아요. 크레이그 감독님이 시나리오를 손보고 계신답니다. 워낙에 오래된 작품이라서 요즘 상황에 맞게 바꿔야 한다나 봐요.”

    “지금도 좋은데.”

    “클래식한 매력이 있긴 하죠. 이렌 씨는 우선 팬 미팅 준비에 힘써 줘요.”

    “알았어요. 대표님. 그래도 이 시나리오는 두고 가실 거죠?”

    “그럼요. 두고 갈게요.”

    말을 다 마친 내가 일어서자 서이렌이 내 손가락을 잡아 끌어당겼다.

    “왜요? 할 말 있어요?”

    “돈 내고 가세요.”

    “무슨 돈이요?”

    “우리 집에서 잤잖아요. 숙박비 내놔요. 대표님 때문에 나는 내 침대를 빼앗기고 손님방에서 잤다고요.”

    입술을 쭉 내밀고 돈 달라고 말하는 서이렌을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지금 돈이 없는데요?”

    “와. 이러기 있어요? 이렇게 그냥 간다고요?”

    “돈은 없는데 대신 이건 어때요?”

    나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의자에 앉은 서이렌의 볼에 입을 맞췄다.

    서이렌의 광대가 살짝 올라가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내 손을 꽉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얼굴을 획 돌렸다.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고 있던 내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는데 서이렌도 마찬가지인지 우리는 서로 입술을 마주 대고 한참을 웃었다.

    * * *

    깡기자와 만난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깡기자님 말씀은 팬파라치와 펑황이 파트너 관계인 건 맞는데 신주원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거죠?”

    “신주원이 요즘 너무 막 나가고 있어요. 팬파라치에서 펑황 쪽에 좋은 기사를 내주는 건 업계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죠. 파트너 관계라면 뭐 그럴 수도 있는데 신주원은 더 노골적입니다.”

    “어떤 식으로요?”

    “아시다시피 문 씨어터가 개봉하기 전까지는 서이렌 씨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죠. 처음에는 펑황 소속인 샤오엔이랑 서이렌 씨를 비교하는 기사를 내서 펑황의 사주를 받았나 했는데 그게 아닌 거 같더라고요. 요즘 쓰는 기사를 보면 타겟이 LOK로 바뀌었어요.”

    “LOK는 또 뭐죠?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요?”

    “저도 그게 이해가 안 가요. 펑황의 한국 파트너가 LOK 잖아요. 그런데 왜 LOK를 그렇게 물어뜯는지 모르겠어요. 특히 재계약 기사로 어그로를 끌더라고요.”

    “재계약이요?”

    “몇몇 배우들이 재계약을 안 할 거라고 이니셜 기사를 냈는데 제가 보기엔 LOK 김선우예요. 다른 배우들도 있고요.”

    “흠.”

    LOK는 한지욱 체제가 되면서 굳건했던 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업계 톱3 연예기획사이고 팬파라치와는 지금까지 돈독한 사이였을 텐데 무슨 일일까?

    순간 내 눈이 커졌다.

    설마? 그걸 노린 건가?

    깡기자는 순식간에 변한 내 표정을 보더니 물었다.

    “대표님. 혹시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셨나요?”

    “아닙니다. 잠깐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요.”

    “뭔데 그래요?”

    “그냥 제 생각일 뿐이라서요.”

    깡기자 앞에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 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나저나 신주원 기자가 요즘은 이렌 씨를 더는 건드리지 않으니 그건 다행이네요. 대표님.”

    “한 번만 더 그런 기사를 쓰면 더는 참지 않을 겁니다. 깡기자님이 주신 자료도 있으니 고소해야겠죠.”

    “그래요. 전 국민이 이렌 씨 팬이라서 아마 모두 응원할걸요?”

    대화를 끝낸 깡기자는 먼저 돌아갔고 나 혼자 남았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핸드폰을 들었다.

    * * *

    한지욱은 핸드폰에 뜬 전화번호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번호는 설마……?”

    고민하던 한지욱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지욱입니다.”

    [스타탄생 원세강입니다.]

    “……그런데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있죠?”

    [조만간 LOK 주주총회가 열리더군요.]

    “인제 보니 원 대표가 LOK에 관심이 많았네? LOK 주주총회를 왜 당신이 관심 있어 하는 겁니까?”

    [저도 LOK 주주라서요. LOK가 처음에 상장했을 때 직원들에게도 주식을 나눠 줬었거든요.]

    “그거 몇 주나 한다고. 이봐요. 할 말 있으면 말 돌리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요.”

    [당시 LOK를 이끌던 배우들에게도 주식을 줬던 걸로 기억합니다. 대표적으로 김선우가 주식을 많이 받았죠. 그 이후로 재계약을 하면서 주식을 더 받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성제 대표님 다음으로 LOK 주식이 많겠죠.]

    한지욱은 전화를 끊고 싶었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이 들었다.

    [대탈출의 손실을 메꾸기 위해 한성제 대표님이 보유했던 LOK 주식을 팔았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 김선우를 비롯한 LOK 개국 공신들의 주식까지 합치면 꽤 되지 않을까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그냥 주주로서 걱정돼서요.]

    “웃기고 있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대탈출의 손실? 그게 누구 때문에 난 건데 그래? 지금 나랑 장난해?”

    [지욱아.]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내가 너보다 형이잖아. 형으로서 말하는 거야.]

    “하!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시네. 그렇게 고고한 척은 다 하더니.”

    [지욱아. 난 LOK가 망하든 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지금 나한테 악담을 하는 거야?”

    [하지만 잘 키워 놓은 회사를 말도 안 되는 곳에 빼앗기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아.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니고.]

    “뭐?”

    [됐다. 이건 말하지 말자.]

    “뭐가 됐다는 거야?”

    [그만큼 시행착오를 거쳤으면 이제 철이 들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한성제 대표님이 네 뒤치다꺼리를 해 주실 거 같아?]

    “원세강. 너 지금 말 다 했어?”

    [더 남았는데 내가 너무 바빠서 끊어야겠다. 제발 잘하자. 지욱아.]

    “너……!”

    한지욱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원세강은 전화를 끊었다.

    뚝 끊어진 전화에 한지욱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세강. 이 새끼 미친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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