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옷장 안에서
짝사랑과 재채기는 숨길 수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나오려던 재채기가 그녀의 입술에 막혀 다시 속으로 들어갔다.
‘흡!’
동공이 커지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때 허공을 헤매던 내 손이 서이렌의 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너무 놀라서 두 주먹을 꽉 쥐고 말았다.
그때 따뜻한 온기가 방황하는 내 주먹을 감싸 안았다.
서이렌의 내 손을 잡자 갑자기 떨리던 심장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큰 소리가 났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침실 안과 거실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졌다.
“허.”
나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서이렌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한숨을 토해내는 내가 바보 같다며 눈이 반달이 된 채 웃었다.
나는 그제야 서이렌이 여전히 속옷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푹 숙였다.
“옷 입어요.”
“상처가 났던 가슴도 다 봐 놓고는.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그런 건 묻지 말고 빨리 옷이나 입어요.”
나는 눈을 꼭 감고 고개까지 돌리고 있었다.
“이제 눈떠 봐요. 대표님.”
천천히 고개를 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셔츠를 대충 걸친 서이렌이 바로 내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우리 두 사람은 가까웠다.
“내가 대표님의 깜짝 이벤트를 망친 건가요?”
“저기 이렌 씨.”
“왜요? 나 보고 얘기해야죠. 왜 내 눈을 피해요?”
“너무 가까워서 그럽니다. 좀 떨어져요.”
“아까 입맞춤할 때는 이거보다 더 가까웠는데요?”
“밖에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얼굴이 빨개진 거예요?”
서이렌이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보고 여기서 죽으라는 건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녀를 밀어냈다.
서이렌은 피식 웃더니 그제야 일어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계속 여기서 쭈그리고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면 다리가 아프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사람들 돌려보낼 테니 일어서요.”
“나 때문에요?”
“어차피 MT도 끝나가요. 마피아 게임도 대표님 때문에 싱겁게 끝났고요.”
“아. 오늘이 마피아 게임을 방송하는 날이군요.”
옷장 안에 있는데 진동으로 해 놓은 핸드폰에 문자가 계속 들어와서 결국 핸드폰을 꺼 놨다.
마피아 게임을 본 지인들이 나를 놀려 주려고 문자를 보냈나 보다.
나는 서이렌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오래 꿇어앉아 있었더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서이렌은 나를 부축해서 침대 위로 데려다줬다.
“여기 앉아 있어요. 내가 사람들 돌려보내 놓고 올 테니까.”
“미안해요.”
“왜요?”
“이벤트가 망해서요.”
서이렌은 옷장 안에 구겨진 꽃다발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꽃보다 옷장 이벤트가 훨씬 좋았는데.”
“뭐라고요?”
“못 들었으면 됐어요. 여기 얌전히 있어요.”
서이렌은 웃으며 침실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나는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런 망한 이벤트를 받고 누가 좋아하겠는가?
이벤트도 빵점이고 남친으로서도 빵점이다.
나는 서이렌과 옷장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나를 탓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이렌이 침실로 들고 들어왔던 맥주캔이 보였다.
내가 언제부터 금주를 했더라?
따져 보니 병에 걸린 후, 한잔도 마시지 않았다.
나는 너무 목이 말라서 참을 수 없었다.
남아 있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 나는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서이렌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빈선예와 이락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우연미를 데리고 나갔다.
“멀리 안 나갈게요. 조심히 가세요.”
“그래. 이렌 씨도 피곤할 테니 쉬세요. 나오지 마요.”
“잘 놀다 가요. 이렌 님.”
빈선예와 이락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연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올 때까지 한마디도 없다가 차를 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렌 씨가 우리 대표님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거죠? 진짜죠?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거 아니죠? 오늘 만우절이 아니잖아요.”
“우 작가님도 아까 봤잖아요. 같이 봐 놓고 그러시네.”
“와. 말도 안 된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도와준 거네.”
“우 작가님이 뭘 도와줘요?”
“나만의 마돈나. 스타와 매니저의 사랑. 이거 맞죠? 나 돗자리라도 깔아야 하나요?”
“아직은 이렌 씨 혼자만의 짝사랑이라니까요.”
“설마요. 이렌 씨가 좋아한다고 하면 당연히 사귀는 거 아닌가요? 세상 어느 누가 이렌 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순간 우연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두 사람…….”
“설마 뭐요?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우 작가님.”
“두 사람이 지금 우리를 속이고 사귀고 있는 거 아닐까요?”
우연미의 말에 빈선예와 이락이 코웃음을 쳤다.
“왜들 그런 표정인가요? 두 사람이 우리 몰래 사귀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오늘 MT 봤잖아요. 마피아 게임 기억 안 나요? 대표님 발연기를 보고도 지금 그 말이 나와요?”
“아…….”
우연미는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가 보네요. 내가 너무 나갔어요.”
“확실해요. 두 사람이 만약 몰래 사귀고 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질게요.”
“락이 말이 맞아요. 그럴 리가 없어요.”
* * *
침실에 들어온 서이렌은 어이가 없었다.
“대표님. 지금 내 침대에서 혼자 곯아떨어진 거예요?”
침대 위에는 맥주 한 캔에 완전 녹다운된 원세강이 곤히 자고 있었다.
수트는 벗지도 않고 아이처럼 웅크려 자고 있었다.
서이렌은 허탈한 표정으로 침대 옆에 앉았다.
그녀의 눈에 곤히 자고 있는 원세강의 얼굴이 보였다.
“괜히 떨었네. 난 또 오늘이 그날인 줄 알았죠.”
이렇게 술도 약하고 기껏 준비한 이벤트도 실패한 사람이 내 남자친구라니.
서이렌은 술에 취한 채 축 늘어져서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는 원세강을 보고 웃었다.
“오늘은 귀여우니까 봐줄게요. 그런데 나 너무 오래는 못 기다려 줍니다.”
그녀는 원세강의 재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준 채 침실 밖으로 나왔다.
* * *
김경록은 오전 업무를 마치고 3팀에 불려 갔다.
3팀 팀장은 김경록을 보자마자 엊그제 입사한 이십 대의 젊은 인턴에게 가 보라고 했다.
김경록이 가 보니 인턴이 아티스틱에 온 우편을 정리하고 있었다.
“헤이. 루크.”
김경록은 자신과 스무 살은 차이가 나는 어린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하는 거야? 톰?”
“우편물 정리하잖아요. 수신자 이름 확인하고 각 부서에 배달할 수 있도록 분류하면 돼요. 쉽죠?”
“그래. 쉽네.”
김경록은 의자에 앉아 산더미같이 쌓인 우편을 확인했다.
요즘 들어서 우편물이 몇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요즘도 팬레터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올드해요. 그렇지 않아요?”
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우편물 분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구나. 서이렌 팬들이 팬레터를 보내서 이렇게 우편물이 늘어난 거였어. 한국에 있는 스타탄생으로는 보내기 어려우니 아티스틱에 보내는 건가?’
김경록은 서이렌의 편지는 죄다 모아서 나중에 그녀가 미국에 오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우편물을 정리하고 있는데 톰이 갑자기 얼굴을 찡그렸다.
“이건 또 뭐야?”
“뭔데 그래?”
톰은 가위를 가져오더니 두꺼운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낸 톰은 어이가 없는지 큰 소리로 웃었다.
“요즘 누가 시나리오를 이렇게 보내지? 너무 한 거 아냐?”
“영화 시나리오야? 어디서 온 건데? 누구한테 보내는 거고?”
“수신자가 더 웃겨요. 서이렌이래.”
“서이렌?”
“요즘 서이렌이 인기가 하늘을 찌르잖아요. 유명 영화사와 감독들이 서이렌과 작품을 하고 싶어서 난리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시나리오 하나만 우편으로 보낸다고요? 아무래도 업계 사람이 아닌가요?”
“시나리오 좀 줘 봐. 봉투도 같이. 내가 좀 볼게.”
“봐도 소용없어요. 이런 걸 미디어 팀에 보내면 팀장이 불같이 화를 낼 거라고요.”
톰은 들고 있던 시나리오 뭉치와 봉투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김경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쓰레기통 앞으로 걸어갔다.
“루크. 뭘 하려고 그래요?”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이런 거 하라고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그걸 읽어 보려고요? 루크, 지금 쉬고 싶어서 그런 거죠?”
김경록은 톰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쓰레기통에서 시나리오를 꺼내 왔다.
* * *
“드디어 구했어.”
샤오엔은 너무 기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동안 이 티켓을 양도받으려고 SNS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그렇게 힘들게 구한 마이팬 티켓.
팡닌은 샤오엔이 서이렌의 팬 미팅 티켓을 손에 넣고 좋아하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
“샤오엔. 너 원세강 대표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좋아해.”
“근데 서이렌의 팬 미팅 티켓은 대체 왜 구한 거야?”
“그냥 타이밍이 딱 좋잖아.”
“무슨 타이밍?”
“나 K드라마어워즈에 초대받았잖아. 시상식하고 다음 날 서울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마침 마이팬 팬 미팅을 한다네. 일정이 완벽하지 않아? 가면 원 대표님도 보고 음. 또.”
“또 뭐?”
“서이렌도 보고. 일거양득이잖아.”
“서이렌을 본다고?”
“…….”
샤오엔은 모르는 척 고개를 획 돌렸다.
“미쳤구나. 한국인 대표님도 모자라서. 이제는 그 대표님이 키우는 배우까지. 네가 지금 하는 게 뭔지 알아?”
“외로운 짝사랑?”
“웃기지 마. 너 지금 팬질하는 거야?”
“뭐?”
샤오엔은 처음에는 당황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흘렀다.
“어쩐지. 사랑이라는 감정이랑은 좀 다른 것 같았어.”
“지금 인정하는 거니? 톱스타 샤오엔이 서이렌의 팬이라고 지금 인정하는 거냐고?”
“좋은 걸 어떻게 해? 나 원세강 대표님이랑 서이렌이 너무 좋아.”
“미치겠다.”
팡닌은 크게 한숨을 쉬고 이마를 짚었다.
* * *
미디어 팀의 팀장인 캐롤 앞에서 톰은 심기가 불편했다.
톰은 옆자리에 서 있는 루크를 보며 이를 갈았다.
‘기어이 이런 일을 만드네. 대체 그 시나리오가 뭐라고 이러는 거야?’
톰은 봉투에 담겨서 보내온 시나리오를 보며 코웃음 쳤다.
봉투에 쓰여 있던 발신자의 이름도 톰은 금시초문이었다.
분명히 인디영화 감독이나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는 학생이 보낸 걸 거다.
이런 쓸데없는 시나리오는 칼같이 걸려야 한다고 배웠는데 루크는 대체 왜 일을 만드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김경록은 손에 든 시나리오를 캐롤에게 건넸다.
시나리오 앞장에 영화의 제목이 쓰여 있었다.
[Last Concert]
캐롤은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제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서이렌 씨한테 온 대본이라는 건가요?”
“예. 팀장님.”
“루크. 이걸 꼭 내가 봐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있습니다.”
“그럼, 시간 뺏지 말고 정말 핵심만 요약해서 설명해 봐요.”
톰은 말단 직원인 루크에게도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는 캐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팀장님이셔.’
톰은 얼마나 잘 설명하는지 두고 보자며 김경록을 흘겨봤다.
김경록은 당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단 두 마디로 설명하겠습니다.”
김경록이 자신감 있게 나오자 캐롤은 안경을 고쳐 썼다.
김경록은 봉투에 쓰여 있던 이 시나리오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밝혔다.
“크레이그 도슨.”
“…….”
“크레이그 도슨이 보내온 시나리오입니다.”
캐롤은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물감이 퍼지듯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설마, 그 크레이그 도슨인가요?”
“확실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이 시나리오. 크레이그가 은퇴 전 준비했던 마지막 영화의 제목과 똑같아요.”
“뭐라고요?”
캐롤은 그제야 ‘라스트 콘서트’라는 제목을 듣고 기분이 이상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오디션으로 뽑혔던 주인공이 불의의 사고로 숨지자 영화를 중단하고 아예 은퇴까지 해 버린 비운의 천재 감독.
크레이그 도슨의 시나리오가 눈앞에 있었다.
톰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크레이그가 대체 뭐야? 먹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