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29화 (230/261)
  • #229화. 천사의 노래

    “잘 부르는데요? 내 노래 맞죠?”

    레오나의 매니저 톰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와우. 진짜 잘하는데?”

    레오나는 대기실 앞을 떠나지 못하고 핸드폰으로 ‘Seo―Iren’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검색창에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신의 사진이 주르륵 떴다.

    “톰. 가수가 아니라 배우인가 봐.”

    “그러네. 원래 가수였나? 왜 이렇게 노래를 잘하지? 그런데 레오나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아뇨. 가야죠. 노래도 방금 끝났어요.”

    리허설을 하기 위해 무대로 가던 레오나가 갑자기 고개를 획 돌렸다.

    “왜 그래? 레오나?”

    “톰. 나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들어 볼래요?”

    “무슨 아이디어?”

    톰은 레오나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 * *

    젠셀의 연구소에서 두 사람이 노트북 모니터로 방송을 시청하고 있다.

    아샤는 오늘 그렉이 만든 의수를 착용해 보려고 왔다가 함께 테일러 쇼를 보게 됐다.

    그렉은 옆자리에 앉은 아샤를 힐끔 쳐다봤다.

    아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표정으로 모니터 안의 서이렌을 담담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렉은 분위기가 무겁게 느껴졌는지 아샤에게 농담을 건넸다.

    “역시 이렌 씨는 생방송 토크쇼도 잘하네요. 대체 못 하는 게 뭘까요?”

    “그러게요. 이렌은 다 잘하죠. 저와는 달리.”

    아샤는 굳은 얼굴로 뒷말을 흐렸다.

    “왜 그런 말을 해요?”

    “사실이잖아요.”

    같은 세이렌 마네킹인데 왜 자신은 서이렌만큼의 재능이 없을까?

    아샤는 항상 궁금했다.

    마네킹으로서 모델 능력은 두 사람 모두 출중했다.

    하지만 서이렌은 모델뿐만 아니라 다른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자신도 연기 연습을 해 봤지만, 서이렌 같은 아우라는 나오지 않았다.

    못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것도 아닌 평범한 재능.

    아샤는 무시무시한 재능을 가지고 할리우드에서 완벽한 데뷔를 한 서이렌이 부러웠다.

    그렉은 아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까? 고심했다.

    그렉이 고르고 고른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작은 모니터 안에서 서이렌이 ‘아샤’라는 이름을 내뱉었다.

    * * *

    “제일 친한 친구는 아샤입니다.”

    서이렌이 답하자 토크쇼 진행자인 테일러가 웃으며 답했다.

    “아샤라면 저도 알죠. 유명한 모델이잖아요.”

    “맞아요. 아샤는 환상적인 모델입니다.”

    “두 사람은 어떻게 친구가 된 거죠? 궁금한데요?”

    “우리 두 사람이 만난 건 몇 년 전, 영화제에서였어요. 그때는 잠깐 스쳐 지나간 게 다였죠.”

    “원래 인연이 있었군요.”

    “그러다 올해 도나텔로의 패션쇼에 함께 서면서 친해졌어요.”

    “역시 패션쇼에서 보신 거군요. 친구라서 그런지 두 사람이 묘하게 닮은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 두 사람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영혼의 단짝이죠.”

    서이렌이 화사하게 웃자 쇼의 진행자인 테일러뿐만 아니라 방청객들의 입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럼, 우리 쇼에 출연한 김에 친구인 아샤에게 한마디 전하실래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이 기회에 영혼의 단짝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해 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서이렌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즐거워하던 아까와 달리 진지해져 있었다.

    방금까지 해맑게 웃던 서이렌이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아샤.”

    방청객들은 홀린 듯 서이렌의 말에 귀 기울였다.

    “넌 재능이 있어. 난 네가 언젠가는 너의 재능을 꽃피울 거라고 생각해.”

    서이렌의 진지한 태도에 방청객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아샤. 언젠가 너와 함께 다시 무대에 서고 싶어. 그게 꼭 런웨이가 아니어도 좋아. 넌 재능이 있잖아. 카메라 앞에서 너와 함께 연기를 할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릴게.”

    할 말을 다 마친 서이렌의 눈이 활처럼 휘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보며 활짝 웃으며 마지막 말을 이었다.

    “사랑해. 아샤.”

    * * *

    - 와. 새벽까지 깨어 있길 잘했네. 오늘 토크쇼 엄청 좋았다.

    - 언니 왜 이렇게 말을 잘함??

    - 타고났다. 타고났어. 완전 어부야. 팬들을 낚는 어부. ㅋㅋㅋ- 어부들 배를 침몰시키는 세이렌 아니었나? ㅋㅋㅋ- 근데 아샤랑 진짜 친한가 봐.

    - 서이렌과 아샤. 두 사람 다 파는 나로서는 존나 혜자인 방송이었다.

    - 그런데 아샤도 연기자로 데뷔하려나 보다.

    - 아샤 사진 찍는 거 보면 연기도 잘할 듯. 그리고 오늘 서이렌이 아샤가 재능 있다고 땅땅해 줬으니 잘하겠지.

    - 서이렌 이제 안 나오는 거지? 꺼도 되나?

    - 나는 혹시 몰라서 대기 타고 있어.

    - 지금 나오는 가수는 유명한 사람인가?

    - 레오나잖아.

    - 요즘 빌보드 차트를 씹어 먹고 계시는 분. ㅋㅋ

    - 이제 끝나나 보네. 괜히 기다렸네.

    - 레오나 노래 부르고 끝나나 보다. 자러 가야겠다.

    - 오늘 밤을 서이렌과 함께 완전히 불태웠다.

    - ㅋㅋㅋ

    - 오. 시발. 저게 뭐야?

    - 얘들아. 돌아와. 서이렌 나왔어.

    - ㅅㅂㅅㅂㅅㅂㅅㅂㅅㅂ

    - 미친 거 아님? 왜 레오나랑 서이렌이 같이 나오는 건데?????

    * * *

    피아노 앞에 앉은 레오나가 서이렌을 쳐다봤다.

    옆에 선 서이렌의 모습은 마치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레오나는 서이렌의 노래를 들은 뒤, 곧바로 PD에게 달려가 그녀와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PD는 레오나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래서 확인차 리허설을 해 봤는데 그제야 왜 레오나가 서이렌과 듀엣을 하겠다고 했는지 이해했다.

    레오나와 서이렌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합을 맞춰 온 가수처럼 환상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갑자기 성사된 무대였지만 서이렌은 의상마저 완벽했다.

    챙겨 온 여분의 의상으로 갈아입었는데 아까와 달리 클래식한 짙은 빨간색 드레스였다.

    피아노 옆에 선 서이렌의 레드 드레스는 그녀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무대 뒤에서 서이렌의 공연을 지켜보는 내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빈선예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저 빨간 드레스는 뭡니까? 저런 게 왜 대표님 차에서 나와요?”

    “그게 내 차인가요? 이렌 씨랑 우리가 미국에서 함께 쓰는 차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저 드레스는 내가 서이렌에게 따로 선물하려고 산 게 맞다.

    트렁크에 뒀다가 오늘 저녁에 선물로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공개하게 될 줄 몰랐다.

    “아무리 봐도 이상해.”

    “이상할 게 뭐가 있어요? 빈 팀장님도 참 이상하시네.”

    * * *

    식당 안으로 들어선 노인이 벙거지를 벗었다.

    모자를 벗자 그의 풍성한 백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십 대 중후반의 외모였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이라서 멀리서 보면 칠십 대 노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이트리스는 그를 보자마자 웃으며 반겼다.

    “왔어요? 오늘을 왜 이렇게 늦었어요?”

    “날씨가 좋아서.”

    “또 산책하다 길을 잃으셨구나.”

    “별소리를 다 하는군. 평소 먹던 걸로 줘.”

    크레이그 도슨은 항상 앉는 그의 지정석으로 걸어갔다.

    가게의 텔레비전에서는 유명 토크쇼가 틀어져 있었다.

    크레이그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듣기 싫어했지만, 손님들이 흥미롭게 보고 있으니 뭐라 할 수 없었다.

    “우선 커피 먼저 드릴게요.”

    “고맙네. 레이첼.”

    크레이그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금요일 오후의 거리는 어느 때보다 활기찼다.

    바에 앉은 손님이 레이첼에게 물었다.

    “레이첼. 저 노인은 올 때마다 보는 것 같아.”

    “우리 단골이셔. 그리고 노인이라니 말조심해.”

    “백발이 성성한 게 노인이 맞잖아.”

    “저분 되게 유명한 분이야.”

    “그래? 누군데 그래?”

    “크레이그 도슨이라고. 알아?”

    “???”

    손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크레이그 도슨은 몰라도 캐리 론다가 나오는 원티드라는 영화는 알지? 그 영화 감독님이셔.”

    “원티드……??”

    생각이 나지 않는지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손님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그 원티드???”

    “시끄러워. 크레이그가 듣겠어.”

    손님은 입을 손으로 막고 뒤를 돌아봤다.

    보잘것없어 보이던 백발노인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이십 년 전, 원티드라는 영화로 오스카상을 휩쓴 천재 감독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원티드는 흥행 성적도 대박이 나서 그해 박스오피스 1위를 달성했다.

    지금도 월드 박스오피스 10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영화가 원티드다.

    “저 사람이 원티드의 감독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대박인데. 내가 원티드 감독의 단골 식당에 와 있다니.”

    “소문내지 마. 은퇴하고 편히 사시는 분이시니까.”

    “알았어. 레이첼.”

    크레이그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레이첼은 접시를 가지고 그에게 갔다.

    손님은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크레이그 도슨을 검색했다.

    원티드뿐만 아니라 무려 다섯 편의 영화를 내리 성공시켰던 천재이자 흥행 감독이던 크레이그 도슨은 갑작스럽게 은퇴하고 영화계를 떠났다고 했다.

    그가 찍던 마지막 영화, ‘라스트 콘서트’의 주연 배우가 사고로 죽고, 그날 이후로 그는 영화를 찍지 않는다고 기사에 나와 있었다.

    손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식적으로 은퇴한다는 말은 안 한 거네.’

    크레이그는 오늘따라 식욕이 별로였다.

    음식을 먹는 듯 마는 듯했던 그는 테이블 위에 팁과 돈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돌아서 나가려는데 그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은은한 피아노 연주도 훌륭했지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부르는 듯한 미성에 크레이그는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텔레비전 속에는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크레이그는 문 앞에 선 채 그 여자를 응시했다.

    * * *

    - 와. 미쳤다.

    - 레오나와 듀엣이라니.

    - 이거 본 미국인들은 이제 끝났네. ㅋㅋㅋㅋ

    - 이제 서이렌의 매력에서 절대로 못 헤어 나올 듯.

    - 미국에서는 세이렌이라고 부르던데. 닉값 톡톡히 했네.

    └미국 팬들도 다 이 얘기하고 있음.

    └역시 세이렌이라면서. ㅋㅋㅋ

    - 서이렌 왜 가수 안 함??? 음반 내주라. ㅠㅠ

    - 가수 할 거 아니면 OST라도 좀 내주길. ㅠㅠㅠㅠ

    └1111

    └222

    └33333

    └4444

    - 그냥 가수로 나오는 작품을 찍으면 안 되나? 두 시간 내내 서이렌이 노래 부르는 모습만 보고 싶은데. ㅠㅠㅠㅠ? 이거지. 이거면 OST는 자동으로 딸려 옴.

    └제작사들아. 이거 대박 기획이라고!!!

    └당장 진행시켜. ㅋㅋㅋㅋ

    * * *

    토크쇼의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토크보다는 레오나와 함께 부른 노래가 더 터졌다.

    레노아의 Stars는 이미 빌보드 1위를 찍고 내려온 곡이지만, 이날 방송의 힘으로 다시 1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나는 캐리어를 끌고 호텔 방문을 나섰다.

    서이렌은 내가 한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피곤한데도 나를 보러 나왔다.

    “대표님만 한국으로 가시는 거예요?”

    “미안해요.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에이. 괜히 그날 노래를 불렀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노래가 얼마나 이슈가 됐는데요? 문 씨어터도 그날 이후에 관객이 더 늘었다잖아요.”

    서이렌은 토크쇼 이후로 더욱 바빠졌다.

    각종 인터뷰와 잡지 촬영.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시나리오가 몰려들고 있다는 점이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올게요. 기다려 줘요. 대신 올 때 좋은 소식을 들고 올게요.”

    “알았어요.”

    캐리어를 들고 뒤돌아서던 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손을 흔들던 서이렌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그대로 뒤돌아서서 서이렌에게 걸어갔다.

    “왜 그래요?”

    “나는 지금 이렌 씨한테 키스할 겁니다.”

    “……?”

    “피해요. 싫으면.”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이런 식으로 돌려줄 줄은 몰랐나 보다.

    서이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는 서이렌이 허락한 것으로 이해하고 내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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