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3177
문 씨어터의 첫 번째 월드 프리미어가 끝나고도 수많은 인터뷰 일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로이는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매체와 진행하는 개인 인터뷰에서 서이렌을 아예 참여시키지 않았다.
영국 프리미어 일정이 남았기에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에서 저승사자 촬영을 하다가 우리만 따로 영국으로 갈 예정이다.
나와 서이렌은 캐리어를 챙겨 들고 호텔 방에서 나왔다.
“이렌 씨. 안 피곤해요? 어제 온종일 강행군이었잖아요.”
“에이. 내가 피곤할 리가 없잖아요. 대표님은 피곤해요?”
“아뇨. 이렌 씨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요.”
서이렌은 말을 하며 내 손을 잡았다.
호텔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떼어 놨다.
“누가 보면 어떻게 해요?”
“미국에서 촬영할 때는 항상 이렇게 손잡고 다녔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때랑 지금이랑은 다르죠. 이제 광고도 찍었고 어제는 월드 프리미어 행사도 했고요.”
내가 진지하게 말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이제 할리우드에서 정식으로 데뷔한 거잖아요.”
“그렇죠. 제2의 데뷔인 셈이죠.”
“할리우드에 왔으면 할리우드 법을 따릅시다.”
“……응?”
“여기 배우들은 대놓고 연애하던데요? 비밀연애? 그런 게 어디에 있어? 맨날 파파라치 사진이 찍히던데요?”
서이렌은 들고 있던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내게 걸어왔다.
“뭐 하는 겁니까?”
“그냥 내 남친 보려는 건데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요?”
나는 다가오는 서이렌을 피해 옆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다가온 서이렌이 나를 벽으로 밀쳤다.
나는 벽에 딱 붙었고 서이렌은 양팔로 벽을 지탱하고 나를 가두는 데 성공했다.
“이렌 씨. 지금 드라마 찍어요?”
“내가 드라마를 그렇게 많이 찍었는데. 이런 장면은 한 번도 못 찍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나한테 하는 겁니까?”
“어떻게 할래요? 나랑 공개 연애나 한번 해 볼래요?”
“그렉이 했던 말 기억 안 나요? 열애설이 나면 난 진짜로 국민 역적이 되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국민 역적쯤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무서워요? 난 인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상관없다고요. 하나도 안 무서워.”
“…….”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서이렌의 행보에 나라는 사람이 지장을 줄까 봐 우리의 만남을 숨긴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걸까?
내가 욕을 먹는 게 두려워서 피하고 있는 걸까?
이런 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에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내 눈빛이 떨리는 걸 본 서이렌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이렌 씨. 나는…….”
내가 뭔가를 말하려는데 복도 끝에서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서이렌을 밀쳐 내고 똑바로 섰다.
서이렌도 이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들키는 건 싫었는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캐리어를 들고 섰다.
그런데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오는 사람들이 눈에 익었다.
내내 피해 다녔는데. 여기까지 찾아왔어?
샤오엔과 팡닌의 모습을 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샤오엔이 중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여배우인지 나한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빚 받으러 온 빚쟁이 같았다.
나는 첫 번째 월드 프리미어 애프터 파티장에서도 숨바꼭질하듯 그녀를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묶는 호텔까지 찾아오다니.
대체 왜 저래?
샤오엔은 캐리어를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놀라서 뛰어왔다.
“세강. 한국에 돌아가는 겁니까?”
팡닌이 뒤에서 그녀의 말을 재빨리 영어로 통역했다.
“원세강 대표님. 우리 샤오엔을 왜 피해 다니는 겁니까?”
“저는 샤오엔 씨와 할 말이 없습니다.”
“일 이야기 때문에 그래요.”
“일이라고요?”
“펑황 엔터가 한국에 진출한 건 잘 아시죠?”
펑황 엔터의 한국 진출은 업계에서도 소소히 화제가 됐었다.
중국의 거대 엔터사가 한국에 진출했다는 것보다는 LOK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슈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요?”
“샤오엔은 스타탄생과 합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시간 좀 내주시죠.”
“저는 중국 회사와 함께 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LOK의 작품에 투자하셨다고 들었는데요.”
“LOK는 LOK죠. 샤오엔이 원하는 건 스타탄생입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와 팡닌이 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샤오엔은 서이렌과 대치 중이었다.
샤오엔은 서이렌이 중국어를 할 줄 안다는 걸 기억했는지 중국어로 물었다.
“콜린 스미스와 무슨 사이죠?”
“뭐가 말입니까?”
“레드카펫에서 콜린 스미스가 서이렌 씨의 풀어진 신발 끈을 묶어 줬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게 왜요?”
“…….”
샤오엔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서이렌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뻔뻔하시네요. 원 대표님이 계시는데 다른 사람이 신발 끈을 묶어 주게 놔둔다고요?”
“신발 끈이 풀렸으면 묶어 줄 수도 있죠.”
“뭐라고요?”
샤오엔은 당당하게 응수하는 서이렌을 슬쩍 쳐다봤다.
갑자기 샤오엔의 머릿속에 문 씨어터의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안드로이드 루나.
영화를 보며 루나라는 캐릭터에 감탄해 마지않았던 샤오엔은 루나를 연기한 서이렌이 자신을 쳐다보자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야?’
샤오엔은 재빨리 마음을 다잡고 그녀가 잡아야 할 골키퍼인 서이렌을 노려봤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서이렌에게 루나가 겹쳐 보여서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서이렌과 샤오엔이 싸우는 것 같아서 황급히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놨다.
“이렌 씨. 갑시다. 비행기 시간 때문에 지금 내려가야 해요.”
나는 서이렌의 손을 잡았다.
서이렌은 내게 손이 잡히자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대표님. 아까는 손잡지 말라면서요. 남들이 본다고.”
서이렌은 맞잡은 두 손을 보란 듯이 샤오엔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샤오엔 씨.”
“왜요?”
“신발 끈이 풀렸네요.”
“어?”
서이렌의 말대로 샤오엔이 신고 있는 스니커즈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대표님. 잠시만요.”
샤오엔의 앞으로 걸어간 서이렌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후즈 청바지를 입은 서이렌은 바지가 더러워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았다.
서이렌이 샤오엔의 신발 끈을 묶어 주려는데 놀란 샤오엔이 휘청거렸다.
서이렌은 그런 샤오엔을 잡았고,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앉게 했다.
서이렌의 키가 샤오엔보다 훨씬 크고 샤오엔이 워낙 말라서 그런지 서이렌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서이렌은 그녀의 무릎에 샤오엔을 앉히고 신발 끈을 묶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풀어진 신발 끈 묶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걸 왜 당신이…….”
서이렌은 아무 말 없이 샤오엔의 신발 끈을 다 묶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샤오엔은 당황하여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난 매너 있는 사람이니까요.”
“…….”
“잘 가요. 샤오엔. 영국에서 다시 봐요.”
서이렌은 할 일을 다 끝냈다는 듯이 뒤돌아섰다.
난 내가 지금 뭘 본 건가 싶었다.
서이렌은 내 손을 꽉 잡더니 나를 이끌었다.
그녀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나는 계속 뒤를 돌아봤다.
샤오엔은 여전히 발그레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상하다.
왜 내 기분이 나쁘지?
진짜 이상하다.
* * *
- 리뷰어 제리가 쓴 SNS봤어?
- 3177이 뭐지? 제리가 그거 올리자마자 리트윗한 사람들 리스트가 떴는데 모두 문 씨어터를 관람한 사람들이더라.
- 3177이 뭔가 스포일러 같던데.
- 사람 아니었음? 3177의 매력에 빠질 거라고 썼잖아.
- SF라서 그런지 스포도 이해하기 어렵네.
- 시사회 후기를 보면 영화에 반전이 있는 거 같은데 뭔지 도통 모르겠어.
- 엠바고가 걸려서 그래. 관계자들도 쉬쉬하는 분위기.
- 대체 언제쯤 엠바고 풀리는 거임?
- 중국 시사회 끝나고 풀린다던데?
- 뭐야? 그럼, 이 주 후잖아.
- 중국 다음이 한국이니까. 한국에서 내한 행사할 때는 엠바고 풀린 상태겠다.
- 3177이고 뭐고 관심 없고 빨리 서이렌 분량이나 많았으면 좋겠다.
- 대사 없이 병풍이어도 좋으니까 화면에 많이라도 나왔으면. ㅠㅠㅠㅠ
* * *
영국 프리미어가 끝나고 드디어 중국 프리미어 일정이 시작됐다.
중국 상해에 있는 트로이 테마파크에서 무려 2박 3일 동안 행사가 열렸다.
둘째 날까지는 펑황 엔터가 벌이는 축하쇼였고 마지막 날에야 문 씨어터의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진행된다.
서이렌은 오늘 한국의 한복 디자이너인 이혜윤이 디자인한 의상을 입었다.
이혜윤은 지난번 얀 필립과 콜라보를 진행했던 디자이너로 이번에 서이렌을 위해 멋진 퓨전 한복을 만들어 줬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고 등장한 서이렌을 보며 한국에서 중국까지 날아온 빈선예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와. 이렌 씨한테 도포를 입히다니. 이혜윤 디자이너가 열일했네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서이렌은 이번 월드 프리미어 행사 때마다 보통 생각하는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미국에서 열린 첫 번째 월드 프리미어에서는 제복 드레스를.
영국에서 열린 두 번째 월드 프리미어에서는 영국인 디자이너의 종이로 만든 드레스를.
그리고 오늘 중국에서는 이혜윤 디자이너가 만든 퓨전 한복을 입는다.
그것도 남자가 입는 도포를 말이다.
손에는 매화가 그려진 접부채를 들었는데 서이렌이 부채를 펼칠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서이렌 미친 거 아님.
- 존잘과 존예는 한 끗 차이라더니. 오늘 서이렌 존잘이라고.
- 부채로 얼굴 가리는 거 봤음? 서이렌이 얼굴로 사람 죽여요. ㅋㅋㅋㅋ- 중국 실검도 서이렌이 장악함. ㅋㅋㅋ- 중국이 알고 보면 어둠의 서이렌 빠임.
- 원래 중국이 서이렌 같은 스타일을 좋아함.
- 서이렌은 중국이 아니라 외계인도 좋아할 거라고.
└ㅋㅋㅋㅋ
└이게 맞다.
└2222
└33333
- 치파오 입고 온 샤오엔도 오늘 이쁘더라.
- 이 좋은 날 팬파라치 기사 뜬 거 봤음?
- 신주원 그 기레기를 어쩌면 좋지? 지난 이주 내내 서이렌이랑 문 씨어터 씹는 기사만 냈잖아.
- 서이렌을 콕 집어서 씹은 것도 아니잖아. 샤오엔이랑 비교하면서 묘하게 돌려 깠어. 완전 음습해.
- 보니까 신레기가 펑황 엔터 기사를 전문적으로 올리던데 펑황에 뒷돈 받은 거 아님?
- 신레기라면 그럴 수도.
- 너희 그거 앎? 신레기 키운 사람이 천재용이래.
- 천재용이 누구??
- 몇 년 전에 퇴출당한 기레기 말이야.
- 천재용이면 스타탄생이랑 서이렌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기레기잖아.
- 미친 거 아님?
- 기레기심은 데 기레기 난 거네.
- 방금 신레기가 또 기사 올렸는데 서이렌 때문에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한국 배우들의 위상이 확 꺾였대. 미친놈 아닌가?
- 신레기. 미쳤구나.
- 오늘 엠바고 풀리는 날 아님?
- ㅇㅇ. 오늘 영화평 뜨는 날임.
- 신레기가 일부러 오늘을 겨냥하고 기사 쓴 거네.
- 이 주 동안 빌드업 미쳤네.
- 영화평에서도 서이렌은 언급도 없을 휠인데. ㅠㅠㅠㅠ- 신레기가 그거 가지고 또 물어뜯을 듯. ㅠㅠㅠㅠ
* * *
영화 리뷰어 제리는 시계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00시가 넘어가면 엠바고가 풀려서 어떤 글이라도 올려도 된다.
제리는 그가 제작한 동영상을 비공개로 미튜브에 올린 상태다.
이제 시계가 00시를 가리키면 곧바로 영상을 공개를 돌릴 거다.
23H 59:58
23H 59:59
00H 00:00
…….
시계가 00시를 알리자마자 제리는 리뷰 동영상을 공개로 돌렸다.
[Moon Theater Review:Spoiler Alert! My Favorite 3177]
선 넘은 기레기
중국의 트로이 테마파크에서 진행된 문 씨어터의 시사회가 끝났다.
암전됐던 극장에 불이 들어오고 거대한 스크린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수많은 중국인 연예 관계자들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샤오엔은 특별 출연으로 짧게 스쳐 지나갔지만, 병풍이라 생각했던 한국의 스타가 영화의 진 히로인이었다.
그런데 그걸 뭐라 탓할 수도 없었다.
여주인공임을 숨겨야 하는 반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영화 관계자들의 시선이 앞줄에 앉아 있는 배우들에게 쏠렸다.
그중에서도 한가운데 앉아 있는 서이렌이 제일 먼저 보였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났던 그녀는 레드카펫에서도 존재감이 드러냈다.
관계자들이 놀라서 멍하게 있는 사이, 배우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뒤 돌아 시사회에 참석한 관계자와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자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를 들었다.
극장 안의 모든 카메라가 한 곳을 응시했다.
중국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서이렌은 그들이 아끼는 샤오엔과 비교할 수 없는 슈퍼스타였다.
* * *
팬파라치에서는 신주원이 문 씨어터를 위해 새로운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기사의 초안을 쓰고 퇴고하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선배 기자가 신주원에게 말했다.
“또 서이렌 기사 준비해?”
“왜요? 같이하시려고요?”
“왜 그렇게 서이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났어?”
신주원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이렌이라는 이름에 부정적인 단어만 들어가도 팬들이 난리를 치잖아요. 조회 수를 빨아 먹을 기회인데 놓칠 수는 없죠.”
“너도 참 이상해. 그렇게 욕을 먹고 싶냐?”
선배 기자의 걱정에 신주원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는 지금 서이렌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그가 지금 쓰고 있는 기사의 종류는 딱 세 가지였다.
펑황 엔터 찬양, 불안한 LOK 그리고 병풍 서이렌이다.
펑황 엔터와 LOK 기사도 충분히 문제가 될 정도로 적나라한 기사였지만 워낙에 서이렌의 이슈가 커서 사람들은 그가 쓰는 다른 기사는 주목하지 않았다.
“근데 왜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선배?”
“문 씨어터 말이야. 첫 번째 매체 평가가 떴어.”
“어디서요? 외국에서요?”
“할리우드 영화니까 당연히 미국이지.”
“뭐라고 떴는데요? 평점은 좋아요?”
“네가 한번 봐 봐.”
선배 기자는 들고 있던 태블릿 PC를 신주원에게 건넸다.
신주원은 신중한 얼굴로 문 씨어터의 평가를 확인했다.
“……음?”
신주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평가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표정이 굳었다.
“선배님. 이거 진짜 맞아요?”
“거기 뉴욕타임스, 버라이어티라고 쓰여 있는 거 안 보여? 그게 진짜지. 가짜겠니?”
“선배님. 여기에 있는 마지막 평이요. 여기서 말하는 게 서이렌일까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선배 기자는 모르겠다는 얼굴로 신주원을 쳐다봤다.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로튼
24개 리뷰 89%, 8.8점
(탑크리틱 16개 리뷰 - 83%, 8.4점)
메타 80점
- 저게 잘 나온 거야?
- SF치고는 잘 나온 거임.
- SF 아니어도 잘 나온 거지. 아직 24개밖에 안 쌓여서 모르겠는데 이 정도면 시작이 좋아.
- 젭알. 문 씨어터 대박 나게 해 주세요.
- 엡바고 풀리는 날이라 확실히 다르네. 지금 미튜브에 영화 리뷰도 올라오고 있나 봐.
- 제리가 올린 영상은 스포일러 포함인데도 벌써 10만 뷰가 넘었다.
└이 새끼들이 시사회를 본 인원이 몇백 명이 채 안 되는데. 왜 스포일러 리뷰를 보는 거냐고.
└제리가 SNS로 3177을 하도 말해서 팬들이 궁금해서 보나 봄.
- 나도 궁금한데 스포 밟을까 봐 볼 수가 없다.
- 영화 미리 본 사람이 서이렌 분량이나 말해 줬으면 좋겠다.
- 10분만 나와 주라. 더 많이 바라지도 않는다. ㅠㅠ
- 대사 없이 병풍처럼 서 있기만 해도 카리스마 쩌는 언니니까. 카메라에만 많이 잡히면 소원이 없을 듯. ㅠㅠㅠㅠ- 우리 왜 이렇게 꿈이 소박해졌냐?
- 내 말이 ㅋㅋㅋ 날 때부터 원탑인 서이렌 팬들 아니었냐? ㅋㅋㅋ- 얘들아. 매체 평 떴음. ㅅㅂㅅㅂ- 평가 미쳤음.
버라이어티
초반의 가면극은 블랙 코미디를 방불케 하고 후반부에서 제대로 된 SF 영웅 서사를 그린다.
뉴욕타임스
대니 라모로 감독은 놀라울 정도로 활기차고 반전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 3177 만세.
데드라인
이렇게 우울하지 않은 미래 이야기는 오랜만이다. 대니 라모로 감독은 특유의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몰입도 높은 SF를 만들었다.
할리우드 리포터
이 영화는 SF 블록버스터가 나아갈 길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연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캐스팅 담당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가디언
영화는 우주왕복선 디오티마처럼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세이렌에게 홀린 어부처럼 침몰할 것이다.
- 평가가 되게 좋은데???
- 와. 미친. 너무 기대된다고. ㅠㅠㅠㅠㅠ
- 가디언 평가가 쫌 걸리는데? 왜 갑자기 세이렌이라는 단어를 쓴 거지???
└오. 나도 느꼈어.
└설마? 서이렌???
└아니겠지. ㅠㅠ
- 캐스팅 담당자 이야기도 나오고.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 내 촉이 말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서이렌 말하는 거 같은데??
- 서이렌 말하는 거 맞음. 제리 리뷰 보고 왔다.
└ㅅㅂ
└????
└진짜?
- 제리 리뷰 방금 보고 왔는데. 결말까지 다 깠어. 너넨 절대 보지 마.
└서이렌 많이 나옴?
└3177이 뭐라고 나옴?
└평론에 나온 세이렌이 서이렌 맞아?
└스포가 될 수 있으니까 그냥 짧게 말하겠음. 개봉하는 날 지체하지 말고 극장으로 달려가라. 이것밖에 말해 줄 게 없음.
- 와. 미치겠다.
- 지금 예매율 어떻지?
└48%인가 그럴걸?
└왜 이렇게 낮아? 무려 서이렌 님이 나오시는데.
└한국이 SF 불모지잖아. ㅠㅠ
- 약속 있어서 개봉 주말에 볼 예정이었는데 당장 첫날 표 조조로 예매한다.ㅋㅋㅋ
* * *
중국의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끝난 다음 날 배우들은 곧바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부 배우들은 일정이 있어서 미국으로 돌아가고 감독인 대니 라모로와 배우는 콜린 스미스와 서이렌까지 총 세 명이다.
그들이 인천 공항에 들어서자 눈부신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콜린 스미스는 공항을 뒤흔드는 함성에 깜짝 놀랐다.
“와우. 이렌. 이 사람들 당신 팬입니까?”
“제 팬들이 좀 열정적입니다.”
서이렌은 손을 흔들며 팬들에게 화답했다.
“콜린 내가 알려 준 거 안 잊었죠?”
“그럼요. 동양식 인사말이죠?”
콜린 스미스는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서이렌이 알려 준 동양식 인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 한 발짝 앞으로 나선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콜린 스미스가 허리 숙여 인사하자 팬들이 큰 소리로 화답했다.
콜린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 씨어터 팀은 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오늘 내한 행사가 열릴 서울체육관으로 곧바로 향했다.
서울체육관은 일만 명을 유치할 수 있는 꽤 큰 규모의 체육관이다.
그런데도 팬들은 표를 구하는 게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이곳 서울체육관으로 왔다.
내가 서울체육관에 도착하자 강진석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내게 걸어왔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지금 문 씨어터 예매율이 터졌다고. 알아?”
어제 매체 평이 뜬 뒤, 갑자기 문 씨어터의 예매율이 치솟았다.
인터넷에는 서이렌이 반전의 열쇠를 쥔 캐릭터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그것 때문에 영화에 관심 없던 사람들도 예매 행렬에 동참했다.
“그렇게 좋으세요?”
“사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지난 몇 달 동안 이렌 씨가 잘 안 될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냐?”
“아직 잘될지 안 될지 모르잖아요.”
“평점이 그렇게 좋은데 잘되겠지. 근데 평점은 다 필요 없고. 우리 이렌 씨가 그렇게 극에서 중요한 역이었다니 정말 몰랐다. 내가 진짜 사람들 말대로 병풍일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
강진석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뭐가 어야?”
“영화 내용을 아세요? 혹시 보셨어요?”
“아니. 못 봤어.”
“방금 그건 뭔데요?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아. 그거.”
강진석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입을 닫았다.
“뭔데 그래요? 인터넷에 스포일러가 떴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해외에서 유명한 미튜버가 스포일러 리뷰를 올렸기에 내가 못 참고 봤어.”
“제리가 올린 리뷰를 말하는 건가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리가 올린 리뷰는 하루 만에 백만 조회 수를 찍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예상 보다 크자 제리는 황급히 스포일러 리뷰를 편집해서 오늘 아침에 다시 올렸다.
스포일러가 퍼진 것 같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 영상을 본 많은 이들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며 인터넷에 글을 남겨서 그게 또 입소문을 타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팬파라치는 어떻게 할 거야? 아무리 기레기라고 불리는 연예부 기자라지만 신주원은 너무 심한 거 아니냐?”
“개봉하면 안 그러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그럴까?”
“스포일러 보셨다면서요? 그래도 걱정이 되세요?”
“아니. 전혀 안 돼.”
강진석이 어찌나 능글맞게 웃는지 이 모습을 신주원 기자가 봤다면 한 대 치고 싶을 거다.
나는 나오는 웃음을 꼭 참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주원 기자의 행보가 심상치 않아서 지금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선 지켜보다가 나중에 처리하죠.”
“그래. 그러자.”
강진석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근처에 기다리고 있던 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도착했나 보네요. 가죠. 형님.”
“그래. 세강아.”
* * *
신주원은 어렵게 구한 기자 시사회 표를 들고 극장을 찾았다.
엊그제 뜬 한국 내한 행사 이후에 한국 평론가 평이 떴는데 평가가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그리고 서이렌이 극 중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렸다.
문 씨어터의 홍보 기간 내내 서이렌의 할리우드 진출을 까는 기사를 썼던 신주원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었다.
홍보 티저와 예고편에서도 철저하게 배제된 사람이 서이렌인데 비중이 크다니 말도 안 된다.
‘스타탄생이 미리 밑밥 까는 거 아냐? 비중도 크고 괜찮은 역이었으면 언플을 했겠지.’
신주원은 오늘 기자 시사회에서 직접 그의 눈으로 문 씨어터가 어떤 영화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그가 극장에 들어서자 그를 알아보는 다른 기자들이 보였다.
그때 톱스타 뉴스의 강유미가 신주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강유미는 그의 앞에 서더니 팔짱을 끼었다.
신주원은 자신을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강유미가 불편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저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신주원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강유미는 피식 웃으며 신주원의 어깨를 잡았다.
“뭐 하는 겁니까?”
“역시 어깨가 가볍네요.”
“뭐요?”
“아무리 연예부 기자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시대라지만, 그래도 기자로서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고작 이 년 선배면서 지금 나한테 충고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후배 가르치는 선배들. 그거 나도 싫어요. 근데 신주원 기자는 너무 심해요.”
“내가 뭘 어쨌다고요?”
“펑황 엔터와 무슨 사이인가요?”
“…….”
“펑황 엔터를 물고 빠는 기사를 쓰는 건 좋아요. 그런데 왜 같은 한국인인 서이렌과 스타탄생은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건데요?”
“이거 왜 이래요? 다른 기자들도 서이렌의 할리우드 진출에 관해 걱정하는 기사를 많이 냈잖아요.”
“그래도 신 기자처럼 한 달 내내 쓰지는 않았죠. 한 달 동안 펑황 엔터 추켜세워 주는 기사를 35편, 서이렌 씨를 까는 기사를 28편을 썼더라고요.”
“지금 뭐라는…….”
신주원은 화가 나서 험한 말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주위에 보고 있는 눈이 많았기에 욕을 내뱉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때 한국 트로이 관계자가 나와서 기자 시사회가 곧 시작함을 알렸다.
강유미는 신주원의 어깨를 다시 한번 꾹 눌렀다.
“내가 쓰는 기사는 쓰레기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쓰세요. 그게 기자입니다.”
강유미는 할 말을 다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뭐 저런 또라이가 다 있어?”
신주원은 강유미에게 가려다 사람들도 지켜보고 있고 시사회도 곧 시작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배정된 자리에 앉은 신주원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