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25화 (226/261)

#225화. 펑황의 야망

한국의 서이렌 팬들은 오랜만에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오늘 올라온 기사가 다 좋은데?

- 서이렌을 외모로 깔 수는 없거든. ㅋㅋ

- 와꾸로 세계정복. ㅋㅋㅋ

- 제발 영화만 잘 빠졌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우리 서이렌 분량도 좀 챙겨주고.

- 영화는 대니 라모로 영화라서 걱정이 안 되는데. 언니 분량은 크흑. ㅠㅠㅠㅠ- 예고편을 둘째고 영화 소개된 거 보면 그냥 우주 왕복선에서 일하는 1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분량은 기대하지 말자. ㅠㅠㅠㅠㅠ? ㅠㅠㅠㅠ

└이미 마음은 비웠어. ㅠㅠ

- 그래도 우리에겐 앞으로 남은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있다. ㅋㅋㅋ? ㅇㄱㄹㅇ? 여신 서이렌을 세 번은 더 볼 수 있다는 말씀.

└이거면 됐다. ㅋㅋㅋㅋ

- 누가 서이렌 팬 아니랄까 봐 다들 긍정충인 듯. ㅋㅋㅋ

* * *

관객들은 휘몰아치는 반전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왼쪽 끝의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은 나는 처음에는 좌석 위치가 별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여기야말로 최적의 장소다.

나는 지금 두 개의 영화를 관람하고 있다.

하나는 문 씨어터.

나머지 하나는 루나가 진 히로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관객들의 리액션.

두 가지 모두 내게는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이었기에 눈을 깜박이는 찰나의 시간도 아까웠다.

거대한 스크린에는 정체를 밝힌 루나가 서 있었다.

관객들은 안드로이드 3177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

“지져스.”

“오마이갓!”

“오! 쉿!”

“왓더…….”

살면서 이렇게 다양한 감탄사를 듣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때 루나의 차갑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델 넘버 3177. 디오티마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이제부터 명령이 아닌 자의에 의해 동작하겠습니다. 마스터 시스템 권한에 접속합니다.”

루나는 1구역으로 걸어 들어갔고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영화는 에릭의 시선 속에서 루나를 보여 주고 있었다.

루나는 극 중에서 웃지 않았다.

간혹 짓는 웃음도 기뻐서 웃는다기보다는 토니가 개소리했을 때 어이가 없어서 살짝 피식하는 게 다였다.

그런 루나가 에릭을 돌아보며 웃었다.

남자 주인공인 에릭이 보는 시선 그대로를 지금 관객들이 함께 보고 있었다.

그걸 보는 내 심장이 요동쳤다.

서이렌은 감정이 없어 보이는 차갑고 퉁명스러운 연기를 했는데, 지금 장면 역시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일전에 서이렌이 루나를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루나의 감정선이 남들과 다르다며.

남들이 1부터 10까지의 경계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연기한다면 자신은 8에서 10까지의 바운더리밖에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렵지 않겠어요?”

“어려운데 재미있을 거 같아요.”

“그럼, 마지막 클라이맥스가 돼서야 이렌 씨의 절제된 10을 보게 되는 건가요?”

“맞아요. 기대하라고요.”

]

그리고 그녀의 호언장담은 지금 내 눈앞에서 그녀의 말이 마술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술렁이는 관객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A Star is Born.

서이렌이라는 세계적인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 울려 퍼졌다.

* * *

팬파라치의 신주원 기자는 아침 일찍부터 약속이 있었다.

호텔 커피숍에 들어서자 누군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LOK에서 쫓겨난 고중기였다.

신주원은 신수가 훤해 보이는 고중기를 보며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보이시네요. 고 매니저님.”

“하하. 이제는 매니저가 아니지요. 여기 내 명함입니다.”

고중기는 오만한 표정으로 신주원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펑황 엔터, 고중기 이사]

고중기가 펑황 엔터에서 재기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러고 보니 중어중문학을 전공하셨다고 했죠? 고 이사님.”

고중기는 자신을 곧바로 이사님이라 부르는 신주원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쓸모없는 전공이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내게 날개를 달아 줄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하하.”

고중기는 그때의 일로 연예계에서 거의 퇴출당하다시피 했다.

유명 기획사에는 이력서에서 커트 당했고 작고 이름 없는 소규모 기획사에서나 그를 받아 줬다.

그렇게 힘들게 일 년을 버티니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펑황 엔터의 한국 지부 설립.

펑황 엔터는 경력자를 뽑으려고 했는데 한국의 스태프들은 중국 기업으로 이적하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했다.

워낙에 중국 기업의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다.

신주원은 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쪽에서 노하우만 쏙 빼먹고 버릴 거라는 걱정은 없으신가요?”

고중기의 눈빛이 순간 매서워졌다가 다시 온화해졌다.

“우리 신 기자가 뭘 잘 모르고 있네요. 중국이 한국에서 인재를 흡수해서 노하우만 빼먹던 것도 이제 옛날 일입니다.”

“그 말씀은?”

“중국 엔터 업계도 이제 궤도에 올랐다고 봐야겠지요. 한국뿐만 아니라 홍콩, 대만의 노하우와 기술력을 이미 그들 나름대로 적용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주원은 벌써 중국 연예계를 찬양하는 고중기가 우스웠다.

아무리 물량을 투하하고, CG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중국의 연예 콘텐츠는 한국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

한국의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도 톱을 달리는 것도 한몫하지만, 결론은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아직도 넘을 수 없는 큰 벽이 존재했다.

“잘 알겠습니다. 고 이사님이 얼마나 펑황 엔터의 앞날을 밝게 바라보는지 잘 알고도 남겠네요.”

고중기는 신주원의 말에서 가시를 느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저를 보자고 하신 건 무슨 일이시죠?”

신주원의 질문에 고중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신주원은 고중기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 기자. 펑황 엔터는 전 세계적으로 뻗어 나가고 있지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제 시작입니다. 펑황 엔터의 기사를 신 기자가 맡아 주세요.”

“제가요?”

신주원은 고중기의 눈빛을 살폈다.

회사가 담당 기자를 지정하는 건 평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호텔에서 따로 만나서 청탁할 일이 아닌데. 내게 뭘 원하는 거지?’

생각을 정리한 신주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신가 보군요. 그게 뭐죠?”

“역시 신 기자라면 내 말을 바로 알아들을 줄 알았어요. 그러니 천재용 기자의 바통을 이어받아 지금 팬파라치에서 한자리를 꿰차고 있는 거 아닙니까?”

신주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재용은 오늘날의 신주원을 있게 한 스승이자 선배였지만 그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 루저 이야기는 왜 하십니까?”

“천재용은 헛발질로 날아갔지만, 우리 신 기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펑황 엔터의 기사를 신 기자가 독점할 수 있게 해 줄게요.

대신 기사를 잘 써 줘야 합니다. 요즘 업계에서 우리를 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 신 기자도 아시죠? 팬파라치 대표님과 편집장님께는 이미 신주원 기자가 우리 펑황의 전담 기자라고 말씀드려 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신주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담당 기자가 되면 기사를 신경 써서 써 드리는 거야 당연한 거죠. 하지만 단지 그것만 원하는 건 아니겠죠?”

“역시 신 기자가 눈치가 빨라요.”

“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씀하시죠. 뭘 원하는 겁니까?”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고중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내내 오만한 태도를 일관했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분노로 일그러졌다.

“LOK.”

“…….”

“LOK를 흔들어야겠습니다.”

신주원은 고중기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펑황 엔터가 한국에 진출하며 손잡은 회사가 바로 LOK다.

그런데 LOK를 흔든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이지?

“펑황 엔터의 지시인가요? 아니면 고 이사님의 개인적인…….”

신주원은 말을 아꼈다.

고중기가 LOK에서 쫓겨난 건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신주원은 확답이 필요했다.

개인의 어설픈 복수심에 그가 놀아날 수는 없으니까.

“신 기자가 나를 오해하나 본데요. 내가 오늘 말한 모든 일은 펑황 엔터의 의지입니다.”

“그 말씀은 펑황 엔터가 LOK를 손에 넣길 원한다는 건가요?”

“신 기자한테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지 않아도 돼서 좋습니다. 맞아요. 펑황이 원하는 게 그겁니다.”

신주원은 소름이 돋았다.

펑황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펑황의 목적이 LOK였군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리 펑황이 고작 LOK라는 작은 회사를 노릴까요? 그건 아니죠.”

“그럼,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LOK는 중간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중기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고중기는 펑황 엔터의 한국지사 대표로 온 중국인 탕궈의 야망을 알고 있었다.

탕궈의 최종 목표는 펑황의 자본을 앞세워 한국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뭐가 됐든 고중기에게는 지난 치욕을 씻을 좋은 기회였다.

고중기가 음산하게 웃자 신주원은 소름이 돋았다.

* * *

사무실로 돌아온 신주원은 책상 위에 앉았다.

그가 확인해야 할 기사 리스트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펑황 엔터로 가 있었다.

‘중국 기업인데 도와야 하나? 하지만 거절하기엔 너무 큰 거래인데.’

기사로 흔든다고 해서 십 년 넘게 대한민국 연예기획사로 이름을 날린 LOK가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냥 장기 말 정도겠지. 뭔가 다른 계획이 있을 거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신주원은 그제야 웃었다.

‘까짓 내가 기사 한 줄을 쓴다고 해서 LOK는 무너지지 않아. 난 매국노가 아니라고.’

결정을 마친 신주원은 편한 얼굴로 책상 위에 올려진 기사 리스트를 확인했다.

다른 건 그냥 올리면 되는데 첫 번째 항목이 그의 눈에 확 꽂혔다.

[문 씨어터, 월드 프리미어 기사 작성해 줘. 서이렌과 원세강이랑 스캔들이 난 중국 배우가 함께 나와.]

갑자기 눈빛이 번뜩인 신주원이 재빨리 노트북을 열었다.

‘샤오엔이 펑황 엔터 소속이라지? 펑황과 손잡은 기념으로 기사 하나를 선물해 줘야겠군.’

기사를 쓰기 전, 신주원은 월드 프리미어 행사가 어땠는지 반응을 살폈다.

시사회에 참석한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이 단평을 남겼는데 모두 영화를 극찬하는 내용만 있었다.

‘엠바고가 걸렸나 보네. 영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못 하고 있어.’

영화평은 아주 좋았는데 모두 한결같이 영화의 후반을 주목하고 있었다.

영화평을 모두 읽은 신주원은 그 안에 서이렌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역시 병풍이었어. 배우들의 연기 이야기가 종종 나왔는데 서이렌 이야기는 전혀 없잖아.’

신주원은 서이렌과 샤오엔과 엮어서 어떻게 기사를 내야 할지 생각하며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 * *

영화와 드라마 리뷰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인플루언서 제리는 SNS에 올릴 글을 몇 번이나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오. 영화평을 제대로 남길 수가 없잖아.”

제리는 핸드폰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보고 왔던 문 씨어터가 계속 맴돌았다.

제리는 문 씨어터의 시사회 초대장을 손에 넣고도 별생각이 없었다.

SF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액션을 좋아했고 특히 여전사 이야기라면 환장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문 씨어터의 후반 장면은 액션 영화만큼 스펙타클했고 루나는 그가 본 어떤 여전사보다 인상 깊었다.

루나가 안드로이드임을 밝히고 우주 왕복선을 구하러 갈 때 그는 극장 안에서 크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당장 영화의 솔직한 감상평을 남기고 싶은데 엠바고가 걸려서 참아야 했다.

“아. 죽겠네. 못 참겠다.”

제리는 다시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고심하며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간 제리는 다 쓴 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정도는 스포가 아니겠지? 어차피 영화를 못 본 사람은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까 말이야.”

몇 번을 고민한 제리는 결국 작성 버튼을 눌렀다.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제리가 올린 SNS는 그의 천만 팔로워에게 단숨에 알려졌다.

[문 씨어터는 위트 있고 그야말로 재미있는 영화다. 올해 나온 영화 중에 가장 엔터테이닝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앙상블 캐스트가 좋고 연기가 모두 훌륭하다. 하지만 후반 20분은 영화의 모든 것을 바꿔 버린다. 영화를 보면 당신은 3177의 매력에 빠져 버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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