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24화 (225/261)

#224화. 레드카펫에서 생긴 일

샤오엔이 팡닌의 부축을 받으며 레드카펫에 섰다.

그녀는 무거운 드레스 자락을 뒤로하고 천천히 레드카펫 위를 걸었다.

샤오엔이 너무 말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녀의 드레스가 너무 비대한 걸까?

샤오엔은 마치 드레스에 파묻혀서 걷는 것 같았다.

그때 레드카펫을 구경하던 누군가가 탄식하듯 말했다.

“Too much…… dress.”

다른 구경꾼들도 공감하는지 동시다발적으로 드레스 이야기가 쏟아졌다.

“저건 대체 무슨 컨셉이지?”

“저 배우는 대체 누군데 저렇게 꾸미고 온 거야?”

“저 사람이 루나 아닌가? 루나가 동양인이라고 했잖아.”

“루나는 방금 지나갔던 제복 드레스 입은 여신이고. 저 배우는 아니라고.”

“그럼, 대체 누군데?”

샤오엔은 사람들이 자신을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걸 보고 자신감이 차올랐다.

‘역시 저우씽의 드레스야. 너무나도 아름답고 웅장해서 보자마자 감탄사가 쏟아져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샤오엔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사람들의 반응에 화답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카메라와 기자들이 즐비한 구역에 도달했다.

주연 삼인방과 메인 캐스트들은 이미 도착해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척에 서이렌이 보였다.

청록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샤오엔은 움찔했다.

지난번 아티스틱의 파티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원세강은 서이렌의 손을 잡고 그녀를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다.

샤오엔은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서이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서이렌을 취재하는 인터뷰어도 있었지만 그렇게 많지 않았다.

서이렌은 인터뷰에서 최대한 영화에 대한 언급은 자제해야 했기에 자신의 배역이 루나라는 것 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 뉴스에서 나온 인터뷰어 툴리는 레드카펫에서 서이렌을 보자마자 그녀가 누군지 알아봤다.

“서이렌 씨죠?”

“안녕하세요. 서이렌입니다.”

서이렌의 부드럽고 힘 있는 목소리를 들은 툴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서이렌은 한국어로 말할 때와 영어로 말할 때 분위기가 전혀 딴판이었다.

영어로 말할 때는 마치 고전 영화의 주인공 같다고나 할까?

툴리는 마이크를 서이렌에게 건네며 말했다.

“구원의 밤이라는 영화로 국제 무대에서도 크게 이름을 날리고 계시죠.”

서이렌은 처음으로 자신에게 도나텔로와 후즈 모델이 아닌 영화, 구원의 밤 이야기를 꺼낸 인터뷰어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서이렌은 질문을 해 준 툴리를 보며 활짝 웃었다.

여자인 툴리도 단숨에 반할 정도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툴리와 함께 온 카메라맨도 서이렌을 찍으며 심장마비에 걸릴 지경이었다.

“구원의 밤을 보셨나요?”

“그럼요. 제 인생 영화 중 하나가 구원의 밤입니다. 그 영화에서 서이렌 씨의 연기가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툴리는 이것이 문 씨어터의 인터뷰라는 것도 잊은 채 팬심을 드러냈다.

“감사합니다.”

“문 씨어터에도 서이렌 씨의 환상적인 연기를 볼 기회가 있을까요?”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서이렌이 카메라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하며 K하트를 선보였다.

‘이 정도는 스포가 아니겠지?’

서이렌은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는데 툴리와 카메라맨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럼, 시사회 잘 봐 주세요.”

서이렌은 환하게 웃으며 툴리의 앞을 지나쳐 갔다.

툴리는 카메라맨과 눈을 마주치며 속삭였다.

“레이. 방금 그거 봤어?”

“봤어. 진짜 세이렌 같아. 나 완전히 홀려 버렸어.”

“그거 방송에 꼭 내보내자. 대박이다.”

툴리와 카메라맨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때 그들의 앞에 샤오엔이 나타났다.

샤오엔을 본 툴리는 깜짝 놀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샤오엔이 아니라 샤오엔의 드레스를 보고 놀란 것이다.

하지만 프로패셔널한 툴리는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고 그녀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갔다.

“……어라?”

하지만 툴리는 더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샤오엔이 입은 드레스의 치맛자락이 너무 거대해서 가까이 다가갔다가는 그녀의 치마를 밟을 것만 같았다.

툴리는 손을 길게 뻗었다.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이크는 샤오엔의 가슴 근처에서 멈췄다.

“중국에서 온 샤오엔 배우님이시죠? 첫 번째 월드 프리미어 행사일 텐데 소감을 말씀해 주시죠.”

샤오엔은 웃으며 뒤를 쳐다봤다.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팡닌이 옆으로 나와서 중국말로 번역해서 알려 줬다.

에이전시에서 그녀를 위해 전문 통역사를 붙여 줬지만, 샤오엔은 팡닌이 자신의 말을 통역해 주는 것이 제일 마음이 편했다.

샤오엔은 웃으며 중국으로 자신의 소감을 말했고 팡닌이 재빨리 통역했다.

“중국에도 이런 큰 홍보 행사는 있습니다. 다만 제가 미국에 있다는 것만 다를 뿐이죠.”

“그러시군요. 오늘 드레스가 아주 아름다우십니다.”

툴리가 드레스 이야기를 꺼내자 샤오엔의 얼굴에 자신감이 차올랐다.

“중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저우씽이 만든 드레스입니다. 황제가 기거했던 자금성의 황금색 지붕을 형상화한 것이죠.”

“아. 그렇군요.”

툴리는 그 이후로도 영화에 대해 몇 가지를 더 물어보고 마이크를 내렸다.

인터뷰를 마친 샤오엔은 드레스 자락을 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와우. 팔 떨어지는 줄 알았네.”

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한국의 커뮤니티는 실시간으로 뜨고 있는 문 씨어터의 월드 프리미어 사진을 보며 흥분의 도가니였다.

- 서이렌 오늘 입은 드레스 봤음? ㅅㅂ 제복 드레스야. 미쳤어. 그냥 돌아 버림.

- 레드카펫을 지배하러 가심. ㅋㅋㅋㅋ

- 오늘 헤메코도 찰떡임.

- 다른 배우들도 멋진데 서이렌 혼자 분위기가 남달라. ㅋㅋㅋ- 서이렌은 대체 언제쯤 별로일까?

- 분위기만 봐서는 주인공인데. 왜 영화에서는 병풍인 거냐고. ㅠㅠ? 뭐래? 공개된 게 하나도 없는데 웬 병풍 타령?

└좋은 날 재 뿌리는 것도 능력임.

└너 서이렌 안티지? 이 아이피가 꼭 긁는 소리 하는 거 같지 않냐?

?이거 통피임. 그냥 어그로야.

- 너네 중국 배우가 입은 단무지 드레스는 보고 글 쓰는 거니? ㅋㅋㅋ- 샤오엔은 특출인데도 월드 프리미어 나오네.

- 드레스에 대륙의 기상이 살아 있네.

- 딱 봐도 중국답네.

- 저거 만리장성이 모티브인가? 드레스 자락으로 만리장성도 덮을 수 있겠는데???

- 투머치네. 와. 너무하다.

- 샤오엔은 예쁜데 얼굴이 안 보임. 드레스 자락에 파묻혀서. ㅋㅋㅋㅋ- 문 씨어터 출연진들 나란히 선 사진 떴어. 개웃김. ㅋㅋㅋㅋ- 미치겠다. 서이렌이랑 샤오엔이 양 끝에 섰는데 샤오엔은 혼자 섬이야.

- 드레스 때문에 가까이 못 가서 그래. ㅋㅋㅋㅋ

- 아무리 봐도 샤오엔이 입은 드레스는 벌칙 옷임. ㅋㅋㅋ

* * *

문 씨어터의 모든 캐스트들이 나란히 서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응대했다.

샤오엔은 드레스 자락 때문에 제일 끝에 섰지만, 기자들이 카메라가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스태프들이 다가왔고 캐스트에게 이제 극장으로 이동할 시간이라고 했다.

주인공 에릭 역의 콜린 스미스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서이렌을 유심히 쳐다봤다.

서이렌은 콜린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콜린은 서이렌 앞에 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발 끈이 풀렸어요.”

콜린의 말에 서이렌이 고개를 내렸다.

왼쪽 워커의 신발 끈이 풀려 있었다.

“어? 정말이네.”

서이렌은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말했다.

“이제 극장에 들어갈 텐데 그냥 놔두죠.”

“그건 안될 일이죠.”

콜린은 웃더니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레드카펫 바닥에 앉았다.

카메라를 내려놨던 기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동시에 카메라를 들었다.

‘찰칵. 찰칵.’

플래시 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고 사방에서 불빛이 번쩍거렸다.

콜린 스미스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서이렌의 풀린 신발 끈을 천천히 묶었다.

“콜린. 뭐 하는 거예요?”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있죠.”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한다고요?”

“이렌. 그거 알아요?”

“뭘요?”

“신발 끈이 풀린다는 건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거래요.”

콜린의 말을 듣는 순간 서이렌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평생을 좋아했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원세강.

서이렌은 원세강을 떠올리며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신발 끈을 다 묶는 콜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서이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죠. 이렌.”

“예.”

서이렌이 뒤도는데 옆으로 다가온 콜린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렌. 나 때문에 신발 끈이 풀어진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묶어 준 거예요.”

“……?”

서이렌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콜린 스미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이렌은 콜린이 이렇게 월드 프리미어라는 큰 행사에서 고백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서는 서이렌은 대기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원세강을 떠올렸다.

방해꾼은 있을 수 없으며 여지를 줘서도 안 됐다.

서이렌은 콜린만 알아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콜린 때문이 아닙니다.”

“……?”

“내 남자친구가 지금 나를 생각하고 있어서 신발 끈이 풀어진 겁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아. 그런가요?”

“오해하시면 곤란해요.”

“예. 그렇군요.”

콜린의 얼굴에서 낙담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이내 평상시처럼 웃으며 답했다.

“그래요. 내가 오해한 것 같네요.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게요.”

“가요. 내 파트너.”

“파트너라…….”

콜린은 파트너라고 꼭 집어서 말하는 서이렌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좋네요. 파트너.”

* * *

서이렌과 콜린의 사진이 뜬 후, 한국의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혔다.

- 방금 뭘 본거지?

- 콜린 미쳤나 봐.

- 이거 로맨스 드라마지??

- 신발 끈 묶어 주는 거 로코의 클리셰잖아요. 왜 그걸 전 세계인이 보고 있는 레드카펫에서 하느냐고.

- 내가 망붕일 리 없다. 하지만 이건 내가 문제가 아니야. 콜린이랑 서이렌이 문제라고.

- 콜린 팬들도 난리 났네. ㅋㅋㅋㅋ

- 내 탐라는 벌써 두 사람 사진으로 도배가 됨.

- 그냥 신발 끈만 묶어 주는 걸 수도 있잖아. 왜들 이렇게 난리야. ㅋㅋ- 콜린 서이렌이 너무 잘 어울려서 그런 듯.

- 두 사람 영화에서 러브 라인 없지?

└서이렌은 분량이 없. 어….

└ㅅㅂ 좋은 날 초 치지 말라고.

* * *

돌비 극장이 사람들로 꽉 찼다.

문 씨어터의 첫 공개 자리답게 각종 매체에서 온 사람들이 극장 안을 가득 메웠다.

영화 평론가와 미튜브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영화 인플루언서도 트로이의 초대를 받아 이곳에 왔다.

샤오엔은 드레스 때문에 무려 좌석을 세 자리나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 때문에 팡닌은 자신의 자리를 드레스에 양보하고 나가야만 했다.

샤오엔은 레드카펫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분명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데? 설마 원세강 대표님이랑 헤어진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샤오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골키퍼가 알아서 팀을 옮겨 준다면 나야 좋지.’

샤오엔은 시사회가 끝나고 있을 파티에서 원세강에게 제대로 들이대야겠다고 생각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때 소란스러웠던 극장의 불이 꺼졌다.

샤오엔은 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기대앉았다.

영화의 시작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과 같았다.

초반에 샤오엔의 출연 장면이 회상으로 스쳐 지나갔다.

샤오엔은 예상보다 짧은 출연에 깜짝 놀랐다.

‘일 분도 안 나왔네? 이게 끝인가?’

샤오엔은 자신의 짧은 분량이 끝나자 심드렁한 표정으로 영화를 봤다.

‘서이렌도 나만큼이나 분량이 없네. 나야 특출이라지만. 서이렌은 메인 캐스트에 이름을 올린 조연인데도 너무하네.’

샤오엔은 옆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서이렌이 무슨 표정으로 영화를 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극장 안이 어두워서 서이렌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샤오엔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나오지 않아 답답했지만, 영화가 재미있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는 중반에 다다랐고 서이렌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루나로 분한 서이렌이 에릭을 보며 말했다.

“저는 가짜죠.”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극장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진 히로인이 등장하는 진짜 문 씨어터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