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저승사자
한성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중국의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한국에 진출한다니.
한국 연예기획사 역사의 산증인인 그로서는 뭔가 께름칙했다.
한지욱이 준비한 제안서를 읽어 보니 펑황은 웨이티비라는 그들의 동영상 플랫폼을 한국에 런칭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 회사와 합작해서 웨이티비를 위한 독점 콘텐츠를 제작한다고 했다.
“한국의 노하우로 콘텐츠를 만들어서 중국 OTT 서비스에 올린다고?”
한성제의 굳은 미간은 풀릴 줄 몰랐다.
“아버지가 뭘 걱정하시는 줄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둘도 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손을 안 잡아도 결국엔 한국의 누군가와는 손을 잡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제안서의 마지막 장을 보십시오.”
한성제는 의심쩍은 눈빛으로 마지막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펑황이 제시한 투자금액과 계약 조건이 적혀 있었다.
합작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 적혀 있었기에 한성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년간 두 편의 콘텐츠만 만들면 됩니다.”
“이렇게 쉬운 계약이 있다고? 위약금 같은 조건도 없는데?”
“첫 합작만 이럴 겁니다. 웨이티비가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다음부터는 이런 퍼 주기식의 계약은 없겠죠.”
이런 계약은 하지 않겠다며 당장 치우라고 하고 싶었던 한성제는 고민이 됐다.
이 제안을 받아들이면 대탈출로 얻은 피해는 충분히 해결될 터였다.
“아버지.”
한성제는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한지욱을 쳐다봤다.
한지욱의 말대로 LOK가 거절해도 누군가는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 분명했다.
이 정도 투자금이면 어떤 드라마라도 만들 수 있었다.
의심하던 한성제의 표정이 풀어지자 한지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대표님. 이번만 저를 믿어 주세요. 다시는 대탈출 같은 일은 없을 겁니다. 저는 제작에 관여하지 않을게요. 제작은 김승민 대표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정말 안 끼어들 생각이냐?”
“믿어주세요. 저는 그저 펑황과 LOK의 투자 건만 처리할 생각입니다.”
한성제는 사나운 눈빛으로 한지욱을 노려봤다.
한지욱은 이번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한성제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한성제는 제안서를 덮으며 말했다.
“주주들이 대탈출 때문에 너를 대표에서 끌어내리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어.”
“저도 압니다. 그래서 펑황이 내민 손을 잡으려는 겁니다. 하늘이 준 기회죠.”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는 실수 없이 처리해라.”
한성제가 허락하자 한지욱의 굳은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잘할게요. 아버지.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습니다.”
* * *
윤서혁 감독과 서주희 작가가 오랜 시간 동안 준비했던 유플릭스 독점 드라마의 촬영이 시작됐다.
드라마의 제목은 저승사자.
저승사자는 주인공 문지성이 일 년간 준비했던 취업 시험에서 떨어지면서 시작된다.
일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면접에서 떨어진 문지성은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할아버지의 과수원으로 내려간다.
지방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며 홀로 사는 할아버지.
태양 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한낮의 여름날, 할아버지는 과실수에 퇴비를 주고 쉬기 위해 대청에 앉았다.
쉬고 있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양복의 사내를 보고 깜짝 놀란다.
시골에서는 젊은 남자도 보기 어려운데 이렇게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있을 리가.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왜 이리 일찍 오셨소. 난 아직 갈 때가 안 됐단 말이오.”
문지성은 자신에게 이상한 말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당황했다.
‘할아버지가 왜 저러시지? 뭘 잘못 보셨나?’
문지성은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봤지만 과수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할아버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그대로 대청에 쓰러졌다.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할아버지!”
문지성은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119에 전화를 건 문지성은 할아버지가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119 구조대가 오길 기다리며 안절부절못하는데 그의 시선에 검은 물체가 언뜻 보였다가 사라졌다.
“……?”
문지성은 화들짝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시골 마을에서도 변방에 있는 할아버지의 과수원.
근처에 민가는커녕 아무것도 없다.
그의 눈앞에 자신과 같은, 검은 양복을 차려입는 누군가 서 있었다.
문지성은 그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과수원을 확장하고 읍내 농협과 잘 아는 지인에게 돈을 빌리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도 할아버지는 자신이 갚을 수 있다며 한사코 아버지의 도움을 사양했다.
문지성은 마당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자마자 그가 빚쟁이임을 깨달았다.
문지성이 노려보자 마당으로 들어서던 이가 걸음을 멈췄다.
“이봐요. 거기 비켜서요.”
“…….”
“저기 사이렌 소리가 안 들려요? 119 구조대가 오고 있으니 비키라고요.”
문지성이 소리치는데도 눈앞의 남자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키라니까 뭐 하는 겁니까?”
“그대는 내가 보이는가?”
“당장 나가라고! 빚은 나중에 받으러 와도 되잖아.”
문지성은 마당 한가운데서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그를 옆으로 잡아끌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외지인은 문지성이 자신의 팔을 잡자 몸이 굳었다.
문지성은 그의 표정을 살필 겨를도 없이 그를 밀쳐 내고 마당으로 진입하는 119 구조대를 반겼다.
그렇게 문지성의 할아버지는 병원으로 이송됐고 다행히 응급처치가 빨랐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문지성은 그날 할아버지의 집에서 봤던 검은 양복을 입은 방문자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의 앞에는 끝나지 않는 구직 활동이 남아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까지 기억할 여력이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일 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문지성은 여전히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한 그는 늦은 밤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바닥을 보고 걷는 그의 눈앞에 새하얀 맨발이 보였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웬 맨발? 취객인가?’
문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 길이라 그런지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름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검은색 양복을 걸치고 있었다.
‘면접이라도 보고 왔나?’
문지성은 작년에 취업에 실패하고 고시원이 가득한 이 동네로 이사를 왔다.
집에서 더는 눈치를 보지 않고 홀로 공부하기 위해서다.
문지성은 눈앞에 서 있는 의문의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들었다.
면접에서 떨어지고 죽고자 마음을 먹고 신발을 벗은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됐다.
이 동네에서 이런 일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근처에 목양천이 있는데. 설마 죽으려고 신발을 벗었다가 실패한 건가?’
문지성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매고 있던 가방을 열었다.
가방에서 슬리퍼를 꺼낸 문지성은 그걸 눈앞의 사람에게 건넸다.
도서관에서 쓰려고 매일 챙겨서 다니는 슬리퍼였다.
“이거라도 신어요.”
“…….”
“신으라니까요. 누가 알아준다고 그렇게 청승을 떨어요?”
눈앞의 그는 그저 묵묵부답인 채로 서 있다.
“아. 진짜.”
문지성은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순간 문지성의 눈이 커졌다.
‘뭐가 이렇게 얇아? 한 손에 잡히잖아?’
문지성은 그의 발목이 너무 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고시원에서 살며 밥도 제대로 못 먹은 건가?’
문지성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슬리퍼를 신겼다.
일어선 문지성은 속으로 가늠했다.
‘돈이 얼마나 있지? 밥이나 먹이고 돌려보낼까? 컵라면과 삼각김밥 정도는 사 먹여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결심한 문지성이 눈앞의 그를 쳐다봤다.
“저녁 안 먹었죠?”
“…….”
“시간 많은 거 알아요. 나랑 같이 밥이나 먹읍시다.”
문지성이 그의 팔을 잡았다.
한 줌인 발목처럼 팔에도 살이 하나도 없었다.
“놔라.”
“뭐라고요?”
“두 번 말하지 않겠다. 놔라.”
종이 한 장도 못 들 것같이 연약해 보이는 몸으로 이렇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라니.
“사극이라도 찍어? 말을 왜 그렇게 해? 먹기 싫으면 말든가?”
문지성은 괜히 기분이 상해서 화가 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눈앞의 그를 훑고 있었다.
‘분명히 여자 목소리인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때 위엄 있는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의 귓가를 울려 퍼졌다.
“문지성. 경진(庚辰)년, 신미(辛未)월, 기미(己未)일, 병인(丙寅)시에 태어났구나. 명계의 운명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 그 말이 맞는구나. 분수를 모르고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더니 그 말이 맞도다.”
“뭐라고? 분수를 몰라?”
문지성은 화를 내며 그를 노려봤다.
그들은 지금 하나밖에 없는 가로등 불빛이 가려진 골목 어귀에 서 있다.
문지성은 빛 쪽에 서 있었지만, 의문의 사내는 어둠 쪽에 서 있다.
슬리퍼를 신은 그의 발이 움직였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그의 몸이 서서히 가로등 불빛 아래로 들어왔다.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본 문지성은 화들짝 놀랐다.
검은 양복을 입고 맨발로 위태롭게 서 있던 그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여자는 문지성에게 성큼 다가왔다.
갑자기 드는 위압감에 문지성은 당황했다.
한여름인데도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났다.
여인은 문지성의 앞에 서더니 말했다.
“그대 때문에 망자를 데려가지 못한 것은 나의 실수다. 사자의 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벌로 지난 일 년간 뢰탑에 갇혀 있었다.”
망자. 사자. 저승.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듣던 생소한 단어들이 여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사자인 나를 볼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대의 능력일터. 그대는 나를 도와라.”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던 여자의 손에 갑자기 서책 한 권과 족자가 나타났다.
문지성은 마술과도 같은 광경에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누군가 그의 발을 바닥에 딱 붙여 놓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말은 할 수 있었기에 문지성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대체 누구야? 내가 왜 당신을 도와야 한다는 건데?”
“나는 저승의 사자다. 너는 나를 도와 지상으로 도망친 악귀 일곱 명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저승사자가 어디에 있다고? 당신 미쳤어?”
그때 여인의 손이 문지성의 눈으로 향했다.
문지성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여인의 차가운 손이 문지성의 눈에 닿았다.
그녀가 문지성의 눈을 가리자 눈앞에 생생한 광경이 떠올랐다.
여인이 손을 떼자 문지성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이……?”
문지성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일 년 전, 그 사람이라고? 빚쟁이가 아니었어?”
여인은 문지성의 팔을 잡았다.
여인은 문지성의 팔에 옥으로 된 팔찌를 채웠다.
상서로운 빛을 띠던 옥이 조여들더니 그의 손목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염왕께 받은 쇄를 찾으니 너는 이제 나를 도와야 한다. 그대는 사자인 나를 도와 칠 인의 악인을 나락에 데려가는 임무를 수행하라.”
“뭔 소리야……?”
문지성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그의 팔이 저려 오기 시작했다.
팔부터 시작된 떨림은 온몸에 퍼졌다.
사지에 전기를 흘려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지성은 정신이 아득해져 왔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