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20화 (221/261)
  • #220화. 첫 번째 티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아샤는 대기하고 있던 연구소 직원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챙이 넓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선글라스까지 쓴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소장님. 드디어 오셨군요.”

    티나가 그렉 앞으로 달려가서 반겼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원들도 그렉을 보며 기뻐했다.

    아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렉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렉은 연구원들을 보며 한소리를 했다.

    “여기서 뭣들 하는 겁니까? 일 안 해요?”

    “소장님이 연구를 봐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소장님이 안 계셔서 지금 막히는 거 천지라고요.”

    “맞습니다. 소장님이 해결해 주셔야죠.”

    “알았으니까. 우선 돌아가 봐요. 손님도 계시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연구원들은 그제야 그렉과 함께 온 아샤에게 시선을 돌렸다.

    티나와 제이슨의 머릿속에 동시에 공항에서 봤던 서이렌이 떠올랐다.

    “제이슨. 그때 공항에서 봤던 그 여자인가?”

    “아냐. 다른 사람이야.”

    “다른 사람이라고?”

    제이슨은 몰라봤지만 티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여자는 확실히 공항에서 봤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렉은 아샤를 데리고 그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다들 비키세요. 이따 오후에 봅시다. 내가 1팀부터 차근차근 돌 테니까.”

    그렉이 사라지자 복도에 모여 있던 연구원들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티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놀란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티나. 정말로 공항의 그 여자가 아니야?”

    “아냐.”

    “그럼 누군데?”

    제이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티나를 바라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모델이야.”

    “그게 누군데?”

    티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샤.”

    * * *

    매니저를 그만두고 티켓박스에 출근한 임지형은 문 씨어터의 티저 이미지가 떴다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신분을 숨기고 신입 사원으로 티켓박스에 입사한 그는 회의실의 제일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임지형은 핸드폰을 꺼내 무릎 위에 올리고 사진을 검색했다.

    오늘 공개된 티저는 총 세 장.

    처음 공개된 사진은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전경이었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떠 있는 우주 왕복선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두 번째 티저 사진은 진짜 승무원인 다섯 명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는 특별 출연이었던 샤오엔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티저 사진은 가짜 승무원 다섯 명의 뒷모습이었다.

    진짜 승무원은 앞으로 서서 모습을 당당히 드러냈지만, 가짜 승무원은 뒷모습만 보여 준 것이다.

    임지형은 마지막 사진에서 서이렌을 발견하고 주먹을 꽉 쥐었다.

    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제일 왼쪽 끝에 서 있는 사람이 서이렌이 확실했다.

    ‘뒷모습만으로도 포스 작렬이네.’

    임지형은 기쁘면서도 맥이 탁 풀렸다.

    ‘그런데 우리 이렌 씨는 얼굴이 안 나오네.’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쉬던 티켓박스 직원들이 방금 뜬 문 씨어터의 티저 사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다.

    “서이렌이 한국에선 톱스타지만 역시 미국에서는 무명이네요. 오늘 뜬 티저 사진에 서이렌은 없는 거죠?”

    임지형은 사수인 박 대리의 말에 흠칫 놀랐다.

    ‘아닌데. 마지막 사진에 우리 이렌 씨가 있는데.’

    임지형은 당장 일어서서 서이렌이 누군지 콕 짚어 주고 싶었다.

    “어쩔 수 없죠. 할리우드에 진출하는데 처음부터 주연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분량이 조금은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요. 혹시 문 씨어터에서 무슨 역을 맡았는지 박 대리님은 아세요?”

    “모르겠습니다. 스타탄생이나 레전드 필름이나 이걸로 언플을 전혀 안 하니까요. 그런데 티저 이미지에서도 실종인 걸 보면 아마 분량이 얼마 안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스타탄생에서 서이렌이 무슨 역을 맡았는지 알려 주지 않는 거겠죠.”

    “그렇군요. 기대했는데 실망이네요.”

    선배들이 떠들고 있는데 임지형이 슬쩍 손을 들었다.

    그의 사수인 박 대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막내. 뭐야? 할 말 있어?”

    “박 대리님. 티저에 서이렌 씨가 있습니다만.”

    “뭐라는 거야?”

    “제일 왼쪽에 서 있는 사람 말입니다. 서이렌 씨잖아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막내가 오늘 이상하네.”

    임지형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서서 박 대리의 눈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여기 이 사람 보이시죠?”

    “…….”

    “뒷모습을 보면 서이렌 씨 맞아요. 이렌 씨가 다리가 되게 길잖아요. 봐요. 허리가 여기에 달렸죠? 제가 보장합니다. 이 사람이 이렌 씨라고요.”

    박 대리는 식겁한 얼굴로 임지형을 쳐다봤다.

    회의실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같은 표정으로 임지형을 쳐다봤다.

    “여기 서이렌 씨가 찍은 음료 광고 사진이 있습니다. 보면 뒷모습이 똑같아요? 그렇죠?”

    임지형은 광고 사진을 사람들에게 들이밀며 열변을 토했다.

    임지형은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일로 사내에서 그의 별명이 서이렌 빠돌이가 됐다.

    * * *

    한국에서는 문 씨어터의 티저 사진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 티저 사진에 서이렌은 코빼기도 안 보이네.

    - 마지막 사진, 제일 왼쪽 끝이 서이렌이잖아.

    - 원세강이랑 스캔들 났던 중국 배우 샤오엔은 얼굴이 나왔는데 서이렌은 뒷모습만 나왔네. ㅋㅋㅋ- 서이렌 단역이었음? 왜 얼굴이 하나도 안 나오냐?

    - 문 씨어터 주인공인 콜린 스미스도 서이렌처럼 뒷모습만 나왔잖아. 알못들이 목소리는 커요.

    - 대체 영화 내용이 뭐냐? 티저 사진만 봐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 티저 보자마자 걱정이 앞선다. 이렌 언니 병풍이면 어쩌지???

    - 그럼, 그냥 예쁜 병풍인 거지.

    - 난 영화 내용은 상관없고 서이렌이 어떻게 나오는지가 제일 궁금하다.

    - 중국에서는 샤오엔이랑 서이렌이랑 엮어서 기사가 쏟아지나 봐.

    - 엥? 뭐라고 하는데?

    - 샤오엔은 특출인데도 티저 사진에 얼굴이 나오는데 서이렌은 조연인데도 얼굴이 안 나온다고.

    - 아. 중국 놈들. 웃기는 얘들이네. 이건 그냥 티저 사진이잖아.

    - 샤오엔인지 뭔지 스님이랑 스캔들 떴을 때부터 재수가 없더라니.

    - 이래서 중국이랑은 뭐가 됐든 얽히면 안 돼.

    - 아오. 저런 기사 뜨면 한국 기레기들이 바로 퍼오는데. 짜증 나.

    팬들이 염려한 것처럼 불편한 논조의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서이렌. 할리우드 진출작 문 씨어터에서 단역 수준?]

    [중국의 톱스타 샤오엔과 한국의 톱스타 서이렌. 같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결과는?]

    [서이렌의 미국 진출에 대한 단상. 좀 더 영리한 해외 진출은 없나?]

    * * *

    인천공항 출국장에 한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그것도 모자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마스크까지 착용했다.

    출국장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녀는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가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아탄 그녀는 택시 기사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손님. 이게 뭡니까?”

    “여기. 여기.”

    여자는 어눌한 한국말을 하며 사진에 나온 커다란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택시 기사는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그제야 입을 열었다.

    “손님. 용산에 가시려고요?”

    “여기.”

    “용산 시티타워 말입니까? 이 건물이 한국에서는 초고층 건물로 유명해요. 외국인들도 사진 찍으려고 가려고 많이들 가죠.”

    “아저씨. 고고.”

    “알았어요. 손님. 내가 쌩하니 모셔다 드리죠.”

    택시 기사가 웃으며 사진을 승객에게 돌려줬다.

    택시가 출발하자 여자는 사진을 손에 꼭 쥐었다.

    마스크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 *

    용산 시티타워 앞에 전세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에 올라타는 스타탄생 식구들.

    서이렌, 김이솔, 윤이슬, 이락 그리고 새 식구가 된 정희진까지.

    스타탄생을 이끄는 다섯 명의 스타가 차에 올라탔고 이내 우연미, 빈선예와 강진석 그리고 내가 차에 올라탔다.

    오늘은 리얼리티 MT를 촬영하는 날이다.

    윤서혁과 서주희 작가는 저승사자를 준비하느라 빠졌고, 이윤기 감독님도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우리만 MT에 가게 됐다.

    빈선예는 차에 타자마자 내 옆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빈 팀장님. 신혼은 잘 즐기고 계세요?”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미안해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진득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네요.”

    “됐어요. 대표님이 바쁜 거야 다 알고 있는데요.”

    모두 차에 오르자 우리가 탄 전세 버스가 출발했다.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나는 뒤를 돌아봤다.

    오늘 촬영은 무인도에 들어가는 선착장에서부터 시작한다.

    카메라도 없고 아침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했는지 다들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김이솔과 머리를 맞대고 자는 서이렌을 보고 웃었다.

    그때 옆자리의 빈선예가 내게 음료수를 내밀었다.

    “대표님. 안 힘들어요?”

    “예?”

    “나 말 돌리는 성격이 아닌 거 아시죠?”

    “잘 알죠. 난 그런 빈 팀장님의 호쾌한 성격을 좋아하고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몸은 괜찮아요?”

    “???”

    나는 빈선예의 말의 뜻을 몰라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대표님. 아프시잖아요. 다 알고 있어요.”

    “어디까지. 뭘 안다는 건가요?”

    “심장 섬유화 증후군.”

    나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요 몇 년간 대표님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시한부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요. 혹시 병이 낫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아니면 뭐요?”

    빈선예는 고민하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아니면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고 계신 건가요?”

    “제가 무슨 양초인가요? 마지막 불꽃을 불태우게?”

    “그럼요?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정말로 몸이 나은 건가요?”

    직설적으로 묻는 빈선예를 보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테티스의 심장이란 게 있는데 내가 그걸 먹고 병이 나았다고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요즘 나와 같이 사는 그렉이란 외국인을 알죠?”

    “당연히 알죠. 두 사람은 파파라치 사진까지 찍힌 사이잖아요.”

    “그분이 의사라는 건 알죠?”

    “들었어요. 난 대표님이 의사와 함께 산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그분은 그냥 의사가 아니라 세계적인 기업 젠셀의 연구소장님이세요.”

    “젠셀이면 정말 유명한 회사잖아요. 그런 유명한 사람이 왜 한국에 있는 거죠? 그것도 대표님이랑 같이 살잖아요.”

    “내가 먹고 있는 심장 섬유화 증후군의 신약 말입니다. 그걸 개발한 분이 바로 그렉이죠.”

    “그래서요? 그 말을 먹었는데. 뭐요?”

    나는 잠시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병이 낫고 있어요. 아니, 다 나았어요.”

    “……?”

    빈선예는 내 말을 듣고도 반응이 없었다.

    마치 내 말을 못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빈선예의 두 눈이 커졌다.

    “뭐라고요!?”

    빈선예는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녀의 외침에 잠이 들었던 스타탄생 식구들이 깨서 우리를 쳐다봤다.

    “빈 팀장님. 조용히.”

    “미안해요. 내가 너무 놀라서 그만.”

    나는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는 게 미안했지만 이것 말고는 기적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빈선예는 너무 놀랐는지 들고 있던 물을 단숨에 마시더니 나를 쳐다봤다.

    “대표님. 기적은 있네요.”

    “예. 기적이 제게 올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뭐 하고 있어요?”

    “예?”

    “몸이 다 나았는데 왜 그러고 있어요?”

    “뭘요?”

    빈선예는 아무 말 없이 뒤로 고개를 돌려 서이렌을 응시했다.

    나는 서이렌을 가리키는 빈선예를 보며 할 말이 없었다.

    “대표님. 몸이 나았다는 건 하늘이 기회를 준 거라고요. 어서 이렌 씨를 잡아요.”

    “아. 저는…….”

    내가 우물쭈물하자 빈선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가 단언하는데 대표님은 이렌 씨를 좋아하고 있어요. 더는 숨기지 마요. 이제 다 나았잖아요.”

    나는 입을 꼭 다물고 빈선예의 시선을 피했다.

    내가 이미 이렌 씨와 연인 사이라는 걸 고백하면 빈선예는 뭐라고 할까?

    빈선예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나는 그날로 끝이다.

    전 국민에게 욕을 먹고 재가 되어 사라지겠지.

    * * *

    용산 시티타워 앞에 도착한 여자는 거대한 고층 빌딩을 보며 길게 숨을 토해 냈다.

    용산 시티타워와 쌍둥이 빌딩은 서로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서 있다.

    ‘드디어 왔구나. 힘겹게 받은 휴가야. 반드시 원세강 대표님을 보고 갈 거야.’

    샤오엔은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용산 시티타워가 아닌 그 옆의 쌍둥이 빌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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