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9화 (220/261)

#219화. 성공적인 데뷔

나는 무대 뒤에서 서이렌을 기다렸다.

의상을 갈아입고 내려온 서이렌은 내게 오지도 못하고 다른 모델과 스태프들에게 붙들렸다.

서이렌뿐만 아니라 함께 파이널 무대에 오른 아샤의 근처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서이렌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서이렌에게 오늘 무대가 특별하다.

이곳이 바로 그녀의 고향이니까.

서이렌은 누구보다 멋지게 고향의 무대로 돌아왔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번 무대가 서이렌의 미국 데뷔 무대다.

영화를 먼저 찍긴 했지만, 아직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후즈 광고도 마찬가지다.

순간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국에 돌아와 모델로 데뷔한 것이 마치 운명처럼 느껴졌다.

내가 웃고 있는데 내 옆에 스태프 몇 명이 다가왔다.

힐끔 보니 아까 복도에서 서이렌과 아샤에 대해 떠들던 스태프들이었다.

그런데 동양인이 어쩌고 노란 피부가 어쩌고 했던 제이크라는 스태프는 보이지 않았다.

“오늘 쇼 말이야. 환상이지 않았어?”

“스트리밍 서버도 터졌다더라. 마지막에는 동접이 이백만이었대.”

“와. 작년은 오십만이었잖아.”

“피날레에 선 모델 이름이 서이렌이라고 했나? 어떻게 이름까지 예쁘지?”

“아까 누가 동양인이 파이널에 서는 건 특혜라고 하지 않았어?”

“제이크? 그 사람은 지금쯤 짐 싸고 있을걸.”

“짐을 싸?”

“어쩌자고 그런 발언을 사람들 많이 다니는 복도에서 떠든 건지 모르겠다. 얀의 귀에도 들어갔나 봐. 아까 팀장한테 불려 가더라.”

“와. 팀장한테 불려 간 거면 끝났네.”

“제이크 걔는 언제 한번 이런 사달이 날 줄 알았어. 걔는 자기가 말하는 게 인종차별인지 모르더라. 동양인 비하는 물론이고 흑인, 히스패닉 할 거 없이 다 씹고 다녔잖아.”

“그렇게 소문이 날 정도면 이제 이쪽 일은 끝이네. 이 바닥이 은근 좁아서 소문나면 아무도 안 써 줄걸.”

“인종차별 리스크가 있는데 당연히 업계 퇴출이지.”

스태프들의 말을 들으니 제이크라는 직원과 다시 부딪힐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후련한 기분으로 서이렌을 맞이하러 갈 준비를 했다.

이렌 씨. 이제 집에 갑시다.

* * *

미국의 포럼에서도 오늘 열린 도나텔로 패션쇼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아샤의 팬들이 그녀의 하이패션 입성을 축하하며 시작했던 글은 이제는 서이렌 이야기로 들끓었다.

- 세이렌이라는 모델이 너무 아름다워. 어쩜 그렇게 Sun이라는 컨셉에 딱 맞는지 모르겠어.

- 아샤의 팬인데 세이렌을 보니 아샤의 첫 등장이 떠올랐어.

- 세이렌은 모델이 아니야. 그녀는 배우야. 한국에서는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 원래 모델이었던가? 워킹을 너무 잘하는데?

- 미국의 셀럽 모델들은 이렌을 본받아야 해. 그들은 몸매 관리도 엉망인데다 워킹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 그냥 톱모델인데??? 정말로 모델이 아니라 배우라고?

- 저런 인재가 모델이 아닌 배우로 데뷔했다니 놀라워.

- 다들 세이렌의 연기를 보면 깜짝 놀라겠군. 난 구원의 밤이라는 영화로 세이렌을 먼저 접했어. 그녀는 연기 천재야. 그녀가 미국에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한국의 팬들은 서이렌의 이야기가 올라오는 미국 포럼의 글을 번역해서 퍼 나르기 시작했다.

- 이렌 언니 대박이다. 영화 개봉도 하기 전에 슈스 되겠어.

- 밤을 꼴딱 새 버렸다. 근데 하나도 안 피곤해. ㅋㅋㅋㅋ- 포럼에 글이 너무 많이 올라와서 번역하다가 날이 밝았네. 시험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한국대 갔을 듯. ㅋㅋㅋ- 근데 해외 반응 넘사라서 너무 기분이 좋고요. 날아갈 것 같고요. ㅋㅋㅋ- 우리 언니 슈스길 밟나요?

* * *

다음 날, 한국에서 서이렌의 도나텔로 패션쇼 기사가 떴다.

[서이렌, 뉴욕 패션위크에서 모델로 데뷔]

[세계적인 모델과 어깨를 나란히 한 서이렌]

[서이렌, 도나텔로 패션쇼 모델로 미국에 상륙]

- 서이렌 너무 좋아. ㅠㅠㅠㅠ

- 언니 이제 슈스네.

- 와 이게 국뽕이라는 건가? 미튜브 댓글도 다 칭찬 일색이야.

- 서이렌 진짜 너무 멋있어.

- 어제부터 밤새다시피 커뮤니티에 살고 있는데 진짜 살맛 난다.

- 서이렌 팬질 존잼. ㅋㅋㅋ

- 후즈 공개 가 봐.

- 미친!!!!! 서이렌 후즈 모델 됐나 봐.

- 엥??? 진짜네.

- 한국 모델이 아닌데? 후즈 공식 모델이었네.

후즈가 운영하는 모든 공계에 서이렌의 사진이 올라왔다.

그들은 사전에 이야기가 된 대로 도나텔로 패션쇼가 끝나고 사진을 풀었다.

미튜브 영상을 클릭하니 화보 촬영 영상이 재생됐다.

화보 속의 서이렌은 어제 도나텔로 패션쇼에서 금빛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를 누비던 여신 같은 모습과는 또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해외의 포럼은 다시 한번 뒤집혔다.

- 와. 이미지가 완전 다른데? 런웨이에 섰던 그 모델 맞아?

- 다니엘이 사진을 찍었네.

- 후즈가 세이렌이 유명해지기 전에 기회를 잡았구나.

- 몇 년 전에 아샤가 후즈 광고를 찍었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다.

- 그러고 보니 세이렌과 아샤는 두 사람 다 후즈의 모델이었네.

- 다들 너무 당연하게 세이렌이라고 부르는데?

└세이렌 맞잖아.

└이미 이 게시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서이렌에 홀려 버린 거지. ㅋㅋㅋ- 그런데 원래 모델이 아니라 배우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한국에서는 유명한 배우야.

└할리우드 영화에도 캐스팅됐어. 조만간 개봉할 거야.

- 세이렌이 영화에 나온다면 당장 보러 간다.

- 이렇게 화젯거리일 때 뭐라도 풀어야지. 영화사는 대체 뭐 하고 있지?

- 누가 세이렌이 나오는 영화사에 연락 좀 해 봐. ㅋㅋㅋ서이렌을 모르고 살았던 미국인들.

그들은 지금 다양한 모습을 가진 서이렌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 * *

한국으로 떠나기 전, 아티스틱에 찾아간 나는 윤조에게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광고와 섭외가 몰려들고 있다고?”

나는 윤조가 내민 섭외 목록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도나텔로 패션쇼가 끝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째다.

도나텔로 쇼 이후에 곧바로 후즈 광고가 연속으로 뜬 게 반응이 컸다.

미국에서 미튜브로 영상을 보면 서이렌이 찍은 후즈 광고가 나오기도 했다.

미튜브 광고를 건너뛰지 않고 제대로 본건 나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빠. 큰일이야. 이러다가 우리 계획이 물거품이 되겠어. 우린 문 씨어터의 개봉 전까지 이렌 씨를 꼭꼭 숨겨 둘 생각이었잖아. 고작 패션쇼와 광고 한편으로 이렇게 서이렌 씨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질 줄 몰랐어.”

“그러게. 나도 얼떨떨하네.”

광고안을 들춰 보던 내 손이 멈췄다.

“왜 그래? 오빠?”

“윤조야. 이 광고들 말이야.”

“응.”

“대부분 아샤가 하던 광고네.”

“맞아.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들어온 광고의 상당수가 아샤라는 모델이 하던 광고야.”

나도 모르게 지금 아샤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아샤는 이번 패션쇼의 반응이 어때?”

“……?”

윤조는 아샤에 관해 물어보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궁금해서. 같이 무대에 올랐잖아. 보니까 아샤라는 모델도 되게 잘하던데.”

“오늘 이렌 씨는 안 왔지?”

“응. 호텔에서 그렉과 함께 있어.”

“다행이네. 그런 궁금증이 생겨도 이렌 씨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무슨 소리야. 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러니까 그런 호기심은 이렌 씨 앞에서는 보이지 말라고.”

“흠. 이렌 씨는 질투하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나는 윤조가 이렇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게 우스웠다.

“그나저나 말해 줘. 아샤는 어때?”

“아샤도 반응이 좋아. 하이패션 모델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는 의견이 많아. 그렇지만 지금 하는 커머셜 광고가 모두 이렌 씨한테 몰려드니. 그쪽도 고민이 많을 거야.”

“그렇구나.”

나는 도나텔로 직원들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 대체 어떻게 하려는 걸까?

내가 고민하고 있는데 윤조가 눈앞에 문 씨어터의 홍보 일정표를 띄웠다.

“내일 영화의 첫 번째 티저가 뜰 거야.”

일정표에는 문 씨어터의 앞으로의 홍보 일정이 나열되어 있었다.

트로이는 1, 2차 티저와 캐릭터 예고편, 정식 예고편 등 다양한 홍보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홍보의 정점은 월드 프리미어였다.

“석 달 후에 월드 프리미어를 돌 거야. 이곳 LA를 시작으로 영국, 중국, 마지막으로 한국이 끝이야.”

나는 월드 프리미어라고 불리는 거창한 홍보 일정을 보며 그제야 서이렌이 할리우드에 진출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홍보만으로 한 달을 보내겠네. 바쁘겠다.”

“문 씨어터가 개봉하면 더 바빠질 거야. 지금 후즈 광고와 패션쇼로도 이렇게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잖아.”

“윤조야. 트로이와 사전에 이야기한 대로 문 씨어터 개봉 전까지 언론에 노출되는 건 최대한 자제해 보자. 아쉽지만 여기에 있는 제안들은 모두 거절해 줘.”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런데 아깝지 않아?”

“문 씨어터가 개봉하면 우리가 거절했던 것보다 훨씬 급이 높은 광고와 제안들이 쏟아질 거야. 그걸 생각하면 아쉬울 게 없지.”

“대단히 자신만만하네.”

“당연하지. 넌 어떤데?”

“풋. 나도 그래. 이상하게 이렌 씨만 보면 뒤에서 월드 스타의 후광이 비치는 것 같다고.”

환하게 웃는 윤조를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나는 엊그제 대니 라모로의 전화를 받았다.

대니 라모로는 영화를 편집하면서 느낌이 좋다고 했다.

자세한 건 말해 주지 않았지만 편집하면서 대박의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

“뭐야? 오빠. 갑자기 왜 그렇게 웃어?”

“아무것도 아니야.”

“참나. 혼자 웃고 있어. 그래서 이제 한국에 가면 언제 올 거야?”

“한국에 가면 예능 촬영을 하고 그거 끝나면 곧바로 유플릭스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

“와. 바쁘네.”

“한국이 본진이야. 아무리 할리우드 진출이 큰일이라도 본진을 오래 비워 두면 안 되지. 월드 프리미어가 열리기 전까지 석 달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 * *

호텔에서 짐을 싸고 있는데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 보니 그렉이었다.

그렉은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 잠옷 좀 태워 버립시다. 꼴 보기 싫어 죽겠네요.”

“싫은데요?”

그렉은 얄밉게 웃으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짐은 다 쌌어요?”

“저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짐을 싸던 내 손이 허공에서 그대로 멈췄다.

툴툴대는 그렉이 가끔은 짜증이 났지만, 그가 있었기에 마음 편하게 서이렌과 함께 다닐 수 있다.

구세주 같은 그렉이 함께하지 않는다니.

하지만 이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젠셀이라는 거대한 기업의 연구소장님을 이렇게 개인 주치의로 마구 부려 먹었으니 염치없는 일이긴 했다.

“이제 연구소로 돌아가려고요?”

“예. 연구소에 가서 할 일이 좀 있어요.”

“그렇군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반년이 넘게 붙어 다녔더니 그렉과 정이 들었나 보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세강. 일 처리만 끝내고 곧바로 한국에 들어갈 겁니다.”

“그래요?”

그렉이 다시 오겠다고 하자 나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렉은 환한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시커먼 남자가 나를 이렇게 반기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그렉. 그 잠옷 계속 입어요. 24시간 그것만 입고 다녀도 돼요.”

“세강. 미쳤어요? 이걸 어떻게 매일 입고 다닙니까?”

“하하하. 농담입니다.”

“난 내일 바로 연구소로 출근해야 해서 공항에 같이 못 나갑니다.”

그렉이 쿨하게 웃으며 뒤돌아섰다.

나는 방문을 나서는 그를 보며 크게 외쳤다.

“그렉 고마워요.”

* * *

젠셀 연구소는 아침부터 들떠 있었다.

오랜만에 연구소에 오는 그렉 때문이었다.

티나와 제이슨뿐만 아니라 다른 연구팀도 그동안의 연구자료를 들고 그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슨. 소장님이 정문을 통과했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자. 티나.”

티나와 제이슨은 재빨리 연구소 복도로 내달렸다.

엘리베이터 앞은 이미 다른 팀에서 온 연구원들로 꽉 차 있었다.

그렉은 연구소의 스타였다.

드디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렉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데 그렉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함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