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8화 (219/261)
  • #218화. Sun and Moon

    자신에게 말도 없이 떠난 그렉을 떠올리며 아샤는 생각에 빠졌다.

    그녀의 매니저인 케인이 다가와 물었다.

    “아샤. 그만 갈까?”

    아샤는 그렉의 명함을 주머니 속에 넣고 케인을 돌아봤다.

    “케인. 내 의수를 바꿔 볼까 하는데요.”

    “갑자기? 지금 것도 잘 쓰고 있잖아. 뭐 문제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좋은 의사를 소개받아서요.”

    “그럼, 내게 연락처를 줘 봐요. 알아봐 줄게.”

    “아뇨. 내가 직접 합니다.”

    케인은 갑자기 의수를 바꾸겠다는 아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러려니 했다.

    아샤의 최근 활동은 난관에 봉착했다.

    데뷔 때 쏟아지던 세간의 관심은 이제 사그라진 지 오래였고, 커머셜 모델이 아닌 다른 분야로 진출해야만 했다.

    도나텔로 패션쇼가 그 시작점이라 할 수 있었다.

    “아샤가 원하면 그렇게 해요.”

    “고마워요. 케인.”

    “병원은 언제 갈 건가요? 아샤의 심장통 때문에 걱정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의수 때문에 미팅할 때 같이 진찰을 받아 보면 되니까.”

    케인은 아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가기 싫다고 버티던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본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 * *

    도나텔로 패션쇼가 열리는 날.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패션쇼의 스트리밍 사이트에 서이렌의 팬들이 모여들었다.

    - 동접 30만 명이네.

    - 점점 더 올라가고 있어. ㅋㅋㅋㅋ

    - 버퍼링 짜증 나. 서버 좀 더 늘리라고.

    - 이러다 서이렌 나올 때 서버 다운되는 거 아니냐? ㅋㅋㅋ- 그나저나 옛날 생각난다. 서이렌이 한복 입고 처음 패션위크에 갔을 때.

    └그때 존예였는데. ㅋㅋㅋ

    └뉴욕을 찢었었지. ㅋㅋㅋ

    - 서이렌이 그때는 신인배우였는데 지금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톱스타야. 캬. 너무 멋져.

    - 지금도 신인배우긴 함. 미국에서. ㅋㅋㅋㅋ

    └경력직 신입이잖아요. ㅋㅋㅋ

    - 난 두 번째 패션쇼가 더 좋더라.

    └리폼 드레스 입고 간 날??

    └이게 맞지. 한국보다 해외 포럼에서 난리 났었는데. ㅋㅋㅋ? 심지어 그린피스가 리트윗하고 그랬음. ㅋㅋㅋㅋ- 다들 한국에서 열린 도나텔로 패션쇼는 기억을 못 하시나 봄. 난 이게 끝판왕이라고 본다.

    └이거지. ㅋㅋㅋ

    └ㅇㄱㄹㅇ

    - 한국 도나텔로 패션쇼는 서이렌의 필모에 추가해야 하는 수준임. ㅋㅋㅋㅋ- 서이렌 위키를 보면 패션쇼 항목이 따로 페이지가 만들어져 있긴 함. ㅋㅋㅋ- 미치겠다. 또 뽕 차오르려고 함.

    - 서이렌은 마지막이라고 했지?

    └ㅇㅇ

    └피날레라고 기사 떴어.

    - 쇼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 40만 돌파. ㄷㄷㄷ- 서버야 힘내. 이렌이 나올 때까지 버텨라.

    * * *

    무대 뒤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아직 쇼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있었지만, 무대 뒤는 수십 명의 모델과 그녀들의 헤어와 의상을 봐주는 스태프가 일대일로 붙어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미하엘도 스태프 자격으로 무대 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하엘만 서이렌에게 보내 놓고 근처에 가지 않았다.

    내가 가 봤자 가뜩이나 사람에 치일 텐데 동선만 복잡해질 터였다.

    그리고 서이렌의 옆에 아샤가 있어서 내가 가면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이 다시 공명할지도 모른다.

    멀리서 준비 과정을 지켜보다 보니 오늘 쇼의 콘셉트가 한눈에 들어왔다.

    태양과 달 그리고 흑과 백.

    쇼에 출연하는 모델들은 정확히 반으로 나뉘어 한쪽은 밝은 태양처럼 나머지는 한쪽은 어두운 달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의상뿐만 아니라 헤어와 메이크업도 두 가지 컨셉으로 완벽히 분리해 놨다.

    서이렌은 누가 봐도 태양이었다.

    황홀한 금빛이 도는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에는 골드 티아라를 썼다.

    그리고 반대편 달 쪽에는 아샤가 있었다.

    아샤는 아이홀이 깊어 보이는 진한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에는 은색 티아라를 썼다.

    두 사람이 같은 세이렌 마네킹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확실히 닮았어.

    외모가 아니라 분위기가.

    두 사람이 풍기는 이미지는 정반대였다.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 서이렌과 차분하고 서늘함이 느껴지는 아샤.

    하지만 확실히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파이널을 선다고 했던가?

    이미 쇼의 컨셉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녀들이 등장할 마지막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대기실 밖의 복도에는 수많은 스태프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데 옷걸이에 걸린 의상을 점검하는 스태프들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오늘 피날레에 서는 동양인 봤어?”

    “봤어. 예쁘더라. 얀이 뭐에 꽂혔는지 알겠더라고.”

    “얀은 사랑에 쉽게 빠지는 스타일이야.”

    “디자이너는 그래야 하는 거라고 하지 않았나? 모든 여성을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좋은 옷이 나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 그렇긴 하지.”

    “근데 아샤는 봤어?”

    아샤의 이름이 나오자 나는 긴장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봤지. 역대급 데뷔 쇼잖아. 커머셜 모델이 하이패션 모델로 데뷔를 하는데. 도나텔로의 피날레 무대라니. 기가 막히지.”

    그때 누군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샤는 진짜 대단해. 대체 어떻게 얀을 꼬신 거지?”

    “제이크. 그게 무슨 말이야?”

    “아샤가 사방에서 인맥 관리를 하고 돌아다닌다잖아. 패션 쪽은 물론이고 매거진, 에이전시 등 가리지 않고 사교 파티가 있으면 가서 눈도장을 찍는다더라.”

    “대단하네. 그래서 일이 잘 들어오는 건가?”

    “나는 걔만 보면 눈빛이 야망으로 이글거려서 보기 좀 그렇더라.”

    “하긴 좀 그렇긴 해.”

    “암튼, 이번 쇼 피날레는 좀 그래. 다 특혜로 뽑힌 모델이잖아. 다른 모델도 많은데 무명에 이름도 처음 들어 보는 동양인에 커머셜 모델로 활동하던 아샤라니.”

    “아샤는 그렇고 다른 모델은 왜? 무명인 게 문제야? 아니면 동양인이라는 게 문제야?”

    “둘 다 문제지. 동양인이 태양 컨셉이라니 말이 돼?”

    가만히 서서 스태프들의 말을 듣고 있다 보니 기분이 상했다.

    그것은 분명히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었다.

    제이크라는 스태프의 말에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도 문제가 있다고 여겼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문제가 된 발언을 한 남자에게 걸어갔다.

    “이봐요. 방금 그 말,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라는 건 알고 있나요?”

    등 뒤에서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수다를 떨던 스태프들이 놀라서 뒤돌아섰다.

    나는 팔짱을 끼고 다시 한번 말했다.

    “얀 필립이 직접 섭외한 모델입니다. 그렇게 불만이 있으면 직접 가서 말하세요.”

    “뭐라고요? 당신 누구야? 지금 말 다 했어? 내가 언제 그랬어? 그게 무슨 인종차별이야?”

    “동양인이라는 게 문제라면서요?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바쁘게 움직이던 스태프들은 큰소리가 나자 우리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제이크는 참지 못하고 내게 반박했다.

    “오늘 쇼의 컨셉이 Sun and Moon입니다. 태양 컨셉에 동양인이 안 어울린다고 한 거라고요. 그게 왜 인종차별인가요?”

    “이보세요. 길을 막고 물어보라고요. 그게 바로 차별적인 발언입니다.”

    “나야말로 이해가 안 갑니다. 동양인들은 피부색이 노랗잖아요. 그러니 골드가 어울리겠어요?”

    제이크가 당당하게 그의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그가 말을 내뱉자마자 분위기가 싸해졌다.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스태프들도 얼굴이 사색이 돼서 제이크를 쳐다봤다.

    “왜 그래? 내가 못 할 말을 한 거야?”

    “제이크. 미쳤어? 너 방금 선을 넘었어.”

    “내가? 언제 그랬어?”

    스태프들은 제이크라는 스태프를 보며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냐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지만, 주위의 시선이 싸늘하니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때 대기실에서 눈부신 여신이 걸어 나왔다.

    “대표님!”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서이렌의 목소리를 듣자 굳어 있던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언제 인상을 쓰고 있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쇼의 첫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은 서이렌이 서 있었다.

    하늘거리는 금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를 보니 개안하는 것 같았다.

    서이렌의 투명하고 새하얀 팔과 다리는 마치 신전에 전시된 조각상같이 매끈했다.

    머리에 쓴 금빛 티아라도 의상과 너무 잘 어울렸다.

    패션에는 문외한인 나지만 나 같은 일반인도 지금 서이렌의 모습이 대단하다는 것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동양인의 피부색이 어쩌고저쩌고 말을 늘어놓던 제이크는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서이렌을 보자마자 입을 닫았다.

    제이크의 커진 동공만 보더라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대표님. 이제 쇼 시작 십 분 전이에요.”

    “왜 나왔어요? 빨리 가서 준비해야죠.”

    “난 준비 끝났죠. 보세요. 완벽하죠?”

    나는 서이렌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 * *

    - 이제 쇼 시작한다.

    - 동접 100만 돌파.

    - 서버가 버벅대기 시작했어. ㅠㅠㅠㅠ

    - 와. 깍두기 미친다.

    - 오늘 쇼 컨셉 멋지다.

    - Sun and Moon이래. 서이렌은 어느 쪽일까? Sun??

    - 서이렌은 당연히 Sun이지.

    - 사실 서이렌은 둘 다 잘 어울리긴 함. 서이렌 이즈 뭔들.

    └이게 맞다.

    └1111

    └22222

    └333333

    - 서이렌 나온다.

    - ㅅㅂ 언니 오늘 욕 나오게 이뻐.

    - 사람인가? 여신인가? 미쳤네.

    - 그리스 조각상 아니냐?

    - 우리 언니는 얼굴로 무대를 찢어요.

    - 서이렌 워킹이 바뀐 건가? 이번엔 다른 모델들처럼 걷네?

    - 미치겠어. 워킹도 엄청나게 잘해. 그냥 본투비 모델이잖아.

    - 턴 하는 것 좀 봐. 일부러 치맛자락 잡고 뒤돌아서 드레스 자락이 허공에 날리게 연출했어. 미친.

    - 서이렌 대박이다.

    - 버벅거리던 서버도 갑자기 괜찮아짐. 버퍼링도 사라졌어. ㅋㅋㅋ- 서버도 아는 거지. 서이렌이 나왔다는걸. ㅋㅋㅋㅋ

    - 앞으로도 지금처럼 눈치 있게 굴어라. ㅋㅋㅋ

    서이렌이 무대를 떠나고 이윽고 아샤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 아샤다.

    - 이 모델은 누구냐? 카리스마 쩌네.

    - 미국에서 엄청 인기 있는 모델임. 오늘 패션쇼에 처음으로 데뷔하는 거야.

    - 모델인데 쇼가 처음이라고???

    - 커머셜 모델임. 그래서 광고 위주로 활동했는데 하이패션 쪽으로는 오늘이 데뷔야.

    -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아샤라는 모델이 이쁘다는 건 알겠다.

    - 근데 저 모델 팔이 좀 이상한데???

    - 한쪽 팔이 의수일 거야.

    - 엥??? 그럼, 가짜 팔이라고???

    - 아샤가 유명해진 게 저 의수 때문일걸? 의수인 자신의 팔을 안 숨기고 나와서?

    - 와. 얼굴이 너무 예뻐서 팔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 그거 아샤 팬들이 자주 하는 주접인데. ㅋㅋㅋㅋ

    시간이 흐를수록 패션쇼의 실시간 스트리밍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수는 계속 늘었다.

    쇼의 피날레를 앞두고 드디어 동접이 이백만을 넘었다.

    - 미친. 200만이야.

    - 저 200만 중에 한국 사람이 10만 명은 될 듯. ㅋㅋㅋㅋ- 이제 파이널인가 보다.

    - 오오. 서이렌 나온다.

    - 서이렌이랑 아샤랑 같이 나오네.

    - 두 사람 완전 다르게 생겼는데 뭔가 이미지가 비슷하네???

    - 와꾸합이 미쳤음. 왜 저 두 사람이 피날레인 줄 알겠다.

    - 둘 다 여자 모델인데. 케미 무엇???

    - 미친. 방금 서이렌 눈빛 봤음? 존나 좋아.

    - 와 진짜 모델 같다. 미쳤어.

    - 아샤도 짱이다. 모델이 이렇게 멋진 거였냐? 두 사람 다 무대를 씹어 삼켜 버리네.

    - 마지막이라고 도나텔로 디자이너도 나오네.

    - 디자이너가 서이렌이랑 아샤랑 팔짱 끼는 것 좀 봐라. ㅋㅋㅋ-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네. ㅋㅋㅋ- 표정이 말해 주고 있음. 입이 귀에 걸리겠어. ㅋㅋㅋㅋ- 내가 유일하게 아는 디자이너 얀 필립. ㅋㅋ

    └ㄴㄷㄴㄷ

    └서이렌 팬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음.

    └익숙하신 분. ㅋㅋㅋㅋ

    - 실트에 서이렌 올랐다.

    - 전 세계 실트네. 대박.

    - 도나텔로 패션쇼 할 때마다 리즈 갱신하는 서이렌. ㅋㅋㅋㅋ- 아샤도 실트에 올랐네.

    - 난 오늘 아샤 팬 될 거 같아. 너무 좋아.

    - 아샤 팬들도 서이렌 예쁘다고 난리 났네. ㅋㅋㅋ

    - 오늘부터 서이렌이랑 아샤랑 같이 파는 덕후들 존나 많을 듯.

    └그게 나다.

    └ㄴㄷㄴㄷ

    └ㅇㄱ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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