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7화 (218/261)
  • #217화. 아샤

    아샤의 손끝이 떨려 왔다.

    반쪽짜리긴 하지만 그녀를 살아 움직일 수 있게 해 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심장이다.

    아샤는 갑자기 심하게 쿵쿵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위를 긴장했다.

    같은 시각, 나 역시 아샤와 비슷한 심통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달리 이 상황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테티스의 심장이 반응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샤도 나와 마찬가지겠군.

    혹시나 아파하는 나를 서이렌이 보고 걱정하지는 않을까 하고 다급히 피팅룸 안을 살폈다.

    서이렌은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힐끔 고개를 들어 아샤를 쳐다봤다.

    아샤의 아름다운 얼굴은 이미 당혹감으로 물들어 있어서 그녀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지 숨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와 아샤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걸 숨기려고 황급히 의자로 다가가 앉았다.

    그녀의 매니저는 아샤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다가와 몸으로 그녀를 가렸다.

    그렉도 내 표정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다가와 물었다.

    “왜 그래요, 세강? 표정이 나쁜데요? 어디 아파요?”

    “그렉.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심장이 내 속에서 떨리고 있는데요?”

    “심장이 떨린다고요?”

    그렉은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채고 뒤를 돌아봤다.

    매니저가 아샤를 가리고 있어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샤의 굽은 어깨가 보였다.

    그렉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냈다.

    “그걸 가지고 다녔어요?”

    그렉은 가방을 펼쳐서 내게 보여 줬다.

    청진기뿐만 아니라 위급 상황에서 사용할 약병도 보였다.

    “이 정도 준비성은 돼야 주치의죠.”

    “그렇군요.”

    “차로 가서 진찰해 볼까요?”

    “아뇨. 난 차에 가서 쉴 테니 저분을 봐주세요.”

    나는 그렉을 밀어냈다.

    그렉은 내 의도를 알아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세요.”

    “알았어요, 세강.”

    * * *

    아샤는 떨리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움직일 수 없는 마네킹으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났다.

    마네킹으로 돌아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자랑인 몸이 망가지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도려내지고, 팔이 떨어지고.

    그 아픔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샤. 괜찮아? 오늘 피팅은 접고 병원에 갈까?”

    그녀의 매니저인 케인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아샤는 스태프에게 가려는 케인의 팔을 잡았다.

    “안 돼요. 케인.”

    “아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요. 하이패션 모델이라고요. 절대 안 돼요.”

    “하지만 거울을 보라고. 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어.”

    케인은 아샤가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닐까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아샤는 케인을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요. 난 쇼에 반드시 설 거라고요.”

    그때였다.

    아샤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아샤의 한쪽 팔이 서서히 내려왔다.

    아샤는 갑자기 사라진 심통에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풀었다.

    “아샤. 왜 그래?”

    “이제 좀 괜찮아진 거 같아요.”

    “그래? 정말이야?”

    아샤는 그제야 굽었던 등을 폈다.

    고개를 드는데 앞에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청진기를 손에 들고 아샤를 바라보고 있었다.

    케인이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누구시죠?”

    “저는 그렉 루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죠.”

    그렉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사면허증을 케인에게 보여 줬다.

    그의 품 안에는 젠셀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이 있었지만 이걸 건넬 수는 없었다.

    그렉의 의사면허증을 본 케인이 놀라 외쳤다.

    “아샤. 이분이 의사 선생님이시래.”

    의사라는 말에 아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렉은 한쪽 무릎을 꿇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아샤를 바라봤다.

    “몸이 불편하신 거 같은데 제가 좀 봐 드릴까요?”

    “…….”

    아샤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렉은 아샤가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저는 서이렌 씨의 건강을 챙겨 주는 주치의죠.”

    “서이렌이요?”

    “예. 오늘 서이렌 씨와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서이렌 씨도 아픈가요? 왜 주치의가 의상 피팅하는 곳까지 따라나선 거죠?”

    “서이렌 씨가 본인 건강을 끔찍이도 챙기거든요. 자신의 건강 상태에 무심한 것보다는 훨씬 좋은 거죠. 어떻게 하실래요? 진찰을 좀 받아 보시겠어요?”

    “…….”

    아샤는 여전히 걱정됐지만 같은 마네킹인 서이렌의 주치의라니 믿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좋아요. 해 주세요.”

    “그럼, 저기 안쪽에 들어가서 좀 볼까요?”

    그렉이 손을 내밀어 탈의실을 가리켰다.

    서이렌이 들어간 곳의 옆에 있는 탈의실이었다.

    아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차에서 잠시 쉰 나는 다시 도나텔로로 올라갔다.

    하지만 아샤가 있는 피팅룸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에서 대기했다.

    그렉이 문자로 진찰 결과를 내게 알려 왔다.

    [아샤는 괜찮아요. 세강이 떠난 뒤, 심장 박동도 정상으로 돌아왔고요. 하지만 정식으로 검사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세강은 괜찮은 거 맞죠?]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렉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렉은 피팅룸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내게 보내왔다.

    내가 들어가지 못하니 일부러 상황을 알려주는 거다.

    나는 그렉이 말만 차갑게 하고 사실 속마음은 참 다정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때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맞은편에 도나텔로의 직원들이 앉았다.

    두 테이블 사이에 파티션이 있었기에 그들은 내 존재를 모르고 떠들기 시작했다.

    “오늘 아샤가 왔었다며?”

    “또 왔어?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왔대? 어떻게 된 게 우리 팀장님보다 아샤를 더 자주 보는 것 같아.”

    “다음 주 패션 위크 때문에 온 거래. 아샤가 무대에 오르잖아.”

    “대단하네. 그렇게 인맥 관리에 열을 올리더니 결국엔 도나텔로까지 접수한 거야?”

    “아샤 걔가 패션계 인사들한테 이쁨받으려고 선물 공세하고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암튼 난 이해가 안 돼. 아샤 정도면 능력도 출중하고 모델로서 꿀릴 게 없는데 왜 그렇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쓰는지 그걸 이해를 못 하겠어.”

    도나텔로의 직원들은 아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내가 아는 아샤는 데뷔하자마자 모델로서 수많은 광고를 휩쓸고 있는 톱 모델이었기에 이런 업계의 평판에 깜짝 놀랐다.

    나는 숨죽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었다.

    “아샤가 왜 그렇게 성공에 목을 매는지 알아?”

    “팔 때문이겠지. 그게 아샤의 유일한 약점이잖아.”

    “그것도 데뷔했을 때 일이지. 지금은 그것도 마케팅 포인트로 밀고 있잖아.”

    “그런데 그것도 이제 끝물이잖아. 처음에야 신선했지, 지금은 아니라고. 그리고 아샤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오퍼가 온 회사와는 다 계약했잖아. 아무리 스타성이 있어도 그렇게 단시간에 많이 나왔는데 이미지 소모가 너무 컸어.”

    “그래서 지금 그렇게 인맥을 쌓는 데 환장한 건가?”

    “그렇겠지. 커머셜 모델로 언제까지 잘나갈 수는 없잖아. 다른 분야로 서서히 눈을 돌리고 있는 거겠지.”

    “아샤도 힘들겠구나.”

    “암튼 아샤는 너무 야망 캐야. 난 아샤만 보면 속이 울렁거리더라.”

    한참이나 아샤에 대해 떠들던 도나텔로의 직원들은 팀장의 호출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나는 방금 들었던 아샤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국에서도 배우를 띄우기 위해 저렇게 감독과 피디들에게 선물 공세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건 배우가 직접 하는 게 아니라 주로 매니저들이 하는 일이다.

    미국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샤를 팔이 없는 마네킹으로 처음 봐서 그런지 그녀가 욕을 먹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아샤도 세이렌 마네킹이기 때문에 서이렌과 같은 재능이 있을 터였다.

    연기를 할 생각은 없는 건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서까지 모델 일을 고집하는 걸까?

    내 머릿속은 아샤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때 의상 피팅을 마친 서이렌이 미하엘과 그렉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아샤가 따라 나올까 봐 황급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타시죠.”

    나는 서이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대표님. 어디 갔다 왔어요?”

    “트로이 영화사에서 전화가 와서요.”

    서이렌은 내게 눈을 흘기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우리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피팅룸에서 또 다른 일행이 나왔다.

    아샤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왔지만, 서이렌과 그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샤는 방금 탈의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 * *

    “벗으세요.”

    “???”

    아샤가 놀란 눈으로 그렉을 쳐다봤다.

    “재킷을 벗으라고요. 진찰해야죠.”

    그렉이 청진기를 들어 보이자 아샤는 그제야 놀란 눈을 풀고 재킷을 벗었다.

    화려한 프릴이 달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아샤를 본 그렉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죠?”

    “예.”

    아샤는 긴장하며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었다.

    “됐어요. 그 정도면 됩니다.”

    차가운 청진기가 아샤의 심장에 닿았다.

    아샤는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

    “어깨 펴세요.”

    “……예.”

    아샤는 긴장한 채 굽은 어깨를 다시 폈다.

    “숨 들이마시고요. 예. 그렇게요. 좋습니다.”

    그렉은 아샤의 심장 소리를 확인했다.

    심장 박동도 정상이고 소리도 정상이었다.

    ‘역시 테티스의 심장이 공명을 일으킨 건가?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세강과 아샤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할 텐데.’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병원에 갈 리가 없었다.

    “인제 그만 옷 입으세요.”

    “어떤가요?”

    “정상입니다.”

    “그럼, 아까는 왜 심통이 있었을까요?”

    “몸이 약하시네요. 무리한 활동은 하지 마세요.”

    아샤는 블라우스의 단추를 다 채우고 재킷을 입으려고 했다.

    그때 그렉이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아샤는 놀란 눈으로 그렉을 바라봤다.

    “왜요?”

    “팔을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제 팔을요?”

    “의수를 하고 다니신다면서요? 한번 봅시다.”

    아샤는 이렇게 대놓고 의수를 보여 달라는 사람을 처음 봤다.

    아샤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장애가 있는 그녀의 팔은 동정했다.

    하지만 그렉은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로 아샤에게 의수를 보여 달라 말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블라우스 단추를 여미는 걸 보니 동작이 매끄럽지 않은 거 같아서요. 혹시 유틸사의 의수인가요? 최신 모델?”

    아샤는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그렉을 보며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었다.

    “유틸사 보다 좋은 의수가 있는데 한번 해 볼래요?”

    아샤는 그제야 그렉을 알 것 같았다.

    아샤의 팔에 장애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수많은 회사에서 그녀에게 연락을 해 왔다.

    아샤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들과 미팅을 가졌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 회사들은 오히려 아샤와 미팅한 일을 가지고 기사로 냈고 그들의 홍보 수단으로 쓰려고 했다.

    아샤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틸이 의수 업계에서는 제일 유명한 회사예요. 거짓말하지 말아요. 사기꾼.”

    “내가 사기꾼으로 보여요? 방금 아샤를 진찰해 줬는데?”

    그렉은 자신을 사기꾼이라 말하는 아샤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아샤에게 자신의 진짜 명함을 건넸다.

    “이게 뭐죠?”

    “내가 왜 서이렌 씨랑 일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이게 그 답인가요?”

    “맞아요. 그 명함에 그 답이 있죠.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진짜로 돕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받아 둬요.”

    그렉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연락해요.”

    그렉이 웃으며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그곳에 홀로 남은 아샤는 그렉이 남기고 간 명함을 확인했다.

    [젠셀 연구소. 연구소장 그렉 루이]

    아샤는 이 명함 어디에 답이 있다는 건지 궁금했다.

    젠셀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제약회사다.

    이곳에서도 의수를 만드나? 하며 고민하던 아샤의 눈이 커졌다.

    ‘그렉 루이. 루이…… 장 루이.’ 아샤는 명함을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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