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그녀와의 첫 만남
스태프들은 촬영을 준비하는 다니엘을 힐끔거리며 귓속말을 했다.
“대체 다니엘은 왜 그렇게 아샤한테 목을 매는 거야?”
“다니엘뿐인가? 업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아샤를 좋아하잖아.”
“아샤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나는 오늘 촬영하러 온 그 동양인 배우가 더 예쁘던데? 너도 프로필 사진 봤지?”
“못 봤어. 모델인데 당연히 예쁘겠지. 근데 업계 인사들이 왜 아샤를 좋아하는 거야?”
“몰랐어? 아샤가 그렇게 감독과 스태프들한테 잘한다잖아. 유명 에이전시보다 아샤가 홍보 일을 더 잘한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해.”
“대단하네. 그래서 의수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빨리 톱 커머셜 모델로 자리 잡은 건가?”
“듣기로는 이제 하이패션 모델 쪽도 기웃거리고 있나 봐.”
“잘될까?”
“우리야 뭐. 지켜보면 알겠지.”
그때 촬영장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서이렌이 들어왔다.
아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던 스태프들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마친 완벽한 서이렌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와. 사람 맞아? CG 아니야?”
“미쳤다. 사람 맞아?”
* * *
제인은 서이렌과 걸어가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티스틱에서 온 서이렌의 포트폴리오를 봤을 때도 놀랐지만 이렇게 실물을 보니 사진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무명이나 다름없는 저를 광고 모델로 발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이렌이 제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제인이 웃었다.
“아티스틱의 찰리 윤이 직접 보내온 포트폴리오라서 기대하고 봤어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함께 일하게 돼서 저희가 더 영광입니다.”
“찰리가 직접 포트폴리오를 보냈군요. 몰랐어요.”
“아티스틱의 부사장이 보낸 포트폴리오니 안 열어 볼 수 없었죠. 찰리 윤이 안목이 있다고 이 바닥에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제인은 서이렌의 포트폴리오를 보자마자 곧바로 윗선에 알렸고 모델로 낙점됐다.
후즈에서는 서이렌의 스타성뿐만 아니라 곧 프로모션에 들어가는 트로이의 신작 영화 문 씨어터와의 협업 기획안도 높게 샀다.
“다니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네요. 깐깐한 사람이니까 고생 좀 할 거예요.”
“다니엘의 사진은 저도 잘 알아요. 좋은 작품이 나오도록 제가 열심히 해야죠.”
무심한 듯 시선을 돌리던 다니엘이 걸어오는 서이렌을 발견했다.
다니엘은 걸어오는 서이렌을 보고 들고 있던 펜을 놓쳤다.
* * *
카메라 셔터음이 쉴 새 없이 들렸다.
촬영장 뒤편에서 세 남자가 서이렌의 촬영을 구경하고 있다.
나와 미하엘은 광고 촬영이 익숙하지만, 그렉은 처음이라 그런지 정신이 혼미해 보였다.
계속 새로운 포즈를 주문하는 포토그래퍼와 카메라 셔터 소리 그리고 강풍기까지.
서이렌은 강풍기의 바람을 맞으면서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한 번도 같은 포즈를 취한 적 없는 서이렌을 보며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히려 자신이 서이렌을 못 따라갈 정도였다.
“이렌 씨. 방금 포즈 너무 좋았어요. 한 번만 더 보여 주세요.”
서이렌은 다니엘의 주문을 듣자마자 방금 했던 포즈를 취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방금 보여 줬던 포즈를 취하자 다니엘은 다시 감탄사를 터트렸다.
“좋아요. 아주 좋아요.”
서이렌은 평소에도 완벽하지만 이렇게 사진을 찍거나 런웨이에 올라가면 마치 신 같았다.
그렉이 내게 귓속말을 건넸다.
“역시 사람을 홀린다는 세이렌으로 불렸던 마네킹답네요.”
나는 그렉의 말에 담담하게 웃었지만, 속으로는 서이렌이 자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이 사람이 내 배우다.
한국에서 온 국민적인 스타다.
그리고 내 여자 친구라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 수 있게 소리라도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미하엘이 내게 말을 건넸다.
“세강. 도나텔로 패션쇼에 아샤도 함께 런웨이에 오른다면서요.”
“……아샤.”
그녀의 이름을 듣자 나는 얼굴을 굳혔다.
“아샤가 누굽니까, 미하엘?”
“유명한 모델인데 몰라요, 그렉?”
“모릅니다. 그렇게 유명합니까?”
“데뷔한 지는 몇 년 안 됐는데 커머셜 모델 쪽에서는 톱스타예요.”
미하엘은 핸드폰으로 아샤의 사진을 검색해서 그렉에게 보여 줬다.
아샤의 사진을 본 그렉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아샤의 모습을 보고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이 잘 나왔네요.”
“지금 그게 끝입니까?”
“그럼요. 모델한테는 최고의 칭찬 아닌가요?”
그렉은 아샤의 미모보다 다른 곳에 시선이 갔다.
“미하엘. 아샤라는 사람 말입니다. 혹시 의수예요?”
“맞아요. 아샤가 유명해진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장애를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서요.”
의사인 그렉은 의수를 한 채 웃고 있는 아샤를 보자 눈빛이 대번에 달라졌다.
나는 그렉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세상에 남아 있는 세이렌 마네킹이 두 개라고 했잖아요.”
“…….”
“나머지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말을 하며 아샤를 손으로 가리켰다.
여태까지 담담한 얼굴을 하던 그렉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렉은 놀란 눈으로 아샤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사실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봤던 세이렌 마네킹은 서이렌이 유일했다.
다른 마네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강. 그럼, 이분과 심장을 나눠 가진 건가요?”
“그럼 셈이죠.”
마침 촬영이 잠시 멈췄고 서이렌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미하엘은 화장 도구를 들고 서이렌에게 달려갔다.
우리 둘만 남자 그렉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안 떨려요?”
“왜 떨려야 하죠?”
“아샤와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잖아요.”
“그냥 일이죠.”
“그래요? 두 사람은 심장을 나눠 가진 운명인 거잖아요?”
“내 운명은 서이렌 씨입니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세강과 아샤가 운명으로 엮이지 않나요?”
“영화나 드라마는 전혀 안 보는 사람이 말이 많군요.”
아샤가 같은 세이렌 마네킹이라서 서이렌이 친근함을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르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께름칙했다.
최대한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다.
부디 아무 일 없이 잘 넘어갔으면 한다.
* * *
촬영은 아까 낮에 끝났지만, 스튜디오는 밤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다니엘은 낮에 찍은 서이렌의 사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탄하기도 지쳤다. B컷이 없어. 몽땅 다 A컷이야.”
오늘 하루 동안 수천 장의 사진을 찍었기에 그 안에서 A컷을 골라내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서이렌의 사진은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게 말이 돼?”
다니엘은 서이렌이라는 모델을 탐탁지 않아 했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다니엘이 감탄하고 있는데 스튜디오 문이 열리며 소리가 들렸다.
‘또각.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들은 다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이 밤중에 힐을 신은 여성 방문자라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다니엘이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아샤. 왔어?”
다니엘에게 가까이 다가온 아샤의 손에는 와인이 들려 있었다.
“촬영은 잘 다녀왔어? 로마는 어때, 아샤?”
“잘 다녀왔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어요?”
“응. 그렇게 됐어.”
“다니엘이 세계 최고의 포토그래퍼로 십 년도 넘게 군림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겠죠. 업계 동료로서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다니엘은 그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아샤가 너무 좋았다.
아샤는 다니엘의 책상을 힐끔 쳐다봤다.
커다란 모니터에는 수많은 서이렌의 사진이 떠 있었다.
아샤는 의자를 가지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오늘 찍은 사진인가 봐요?”
다니엘은 서이렌의 사진에 관심을 가지는 아샤를 보며 웃었다.
“맞아.”
“모델의 이름이 뭔가요?”
“서이렌. 한국이라는 나라의 배우래.”
“이름이 예쁘네요. 사진도 다 잘 나왔고요.”
“사진을 정말 잘 찍더라고. 완벽한 피사체였어. 내가 조명을 잘 바꾸는 거 아샤도 알지?”
“그렇죠. 다니엘은 빛을 다양하게 쓰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서이렌이라는 모델은 내가 조명을 바꿀 때마다 그 빛에 대비될 수 있도록 포즈를 바꾸는 거야. 내가 촬영하는 동안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래요?”
“그렇다니까. 이 사진들을 좀 봐 봐. 모두 완벽해. B컷 따위는 찾을 수가 없어. 오늘 삼천 장 이상을 찍었는데 그 삼천 장이 모두 예술로 찍혔다고.”
다니엘은 아샤를 보며 침이 마르게 서이렌의 칭찬을 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 다니엘의 표정이 좋았던 거군요.”
다니엘은 아샤가 감정 없이 대꾸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샤. 미안해. 내가 너무 다른 사람 이야기를 했지? 나 이제 퇴근할 건데 식사라도 할래?”
“아뇨. 괜찮아요. 나도 방금 도착해서 피곤해요.”
차갑게 대꾸한 아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니엘은 황급히 책상을 정리하고 아샤를 따라 일어섰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제 매니저가 아래층에서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어요.”
아샤가 간다고 하니 다니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샤는 다니엘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샤. 내가 내일 연락할게.”
“예. 기다릴게요.”
일 층으로 내려온 아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올라탔다.
아샤의 일을 봐주는 케인이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샤. 집으로 갈까?”
“아니. 패트릭의 집으로 가 줘요.”
“뷰의 편집장인 패트릭 말이지?”
“맞아요. 패트릭을 보고 나면 켈리 감독님한테도 가야 해요. 같은 미드타운에 살고 있으니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알았어. 아샤.”
아샤는 말을 마치고 옆자리에 있는 작은 캐리어를 열었다.
거기에는 이탈리아에서 사 온 와인이 잔뜩 들어 있었다.
* * *
패션 위크 참석을 위해 우리는 곧바로 뉴욕으로 갔다.
패션 위크가 열리기 전까지 이틀이나 남았지만 런웨이에 서는 서이렌은 할 일이 많았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풀고 곧바로 도나텔로로 갔다.
서이렌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얀 필립이 한걸음에 피팅룸이 있는 아래층으로 달려왔다.
얀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서이렌을 맞이했다.
“이렌!”
“얀. 오랜만이에요.”
“이렌. 보고 싶었어요. 영화 의상 작업을 하면 맨날 만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놈의 보안! 보안! 촬영장에도 몇 번 못 가 보고 말이죠.”
“그러게요. 대신 이렇게 얀의 패션쇼에서 보게 됐잖아요.”
“맞아요. 오늘부터 쇼가 끝날 때까지 이렌 씨는 내 겁니다.”
서이렌과 인사를 마친 얀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원 대표님. 여전히 잘생겼네요. 어쩜 해가 갈수록 더 젊어지는 거 같아요.”
“나까지 칭찬 안 해 줘도 돼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입니다. 그런데 원 대표님. 이분은 누구실까요?”
얀은 내 옆에 서 있는 그렉을 보며 은근한 눈길을 보냈다.
“혹시 원 대표님이 새로 미는 신인 배우인가요?”
“아뇨. 이렌 씨의 스태프입니다.”
“스태프라고요? 이렇게 눈이 부시게 잘생겼는데요?”
“…….”
그렉은 자신을 보며 잘생겼다고 칭찬의 말을 쏟아 내는 얀을 보며 그러려니 했다.
평생 듣고 자란 말이었으니까.
“대체 이런 미남이 어떤 일을 하는데요?”
“이렌 씨 건강을 관리해 줍니다.”
“트레이너인가?”
“아. 뭐 그런 셈이죠.”
세계적인 제약회사 젠셀의 연구소장인 그렉을 트레이너라고 소개한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렉은 쿨하게 받아들였고 웃는 얼굴을 보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이렌 씨의 트레이너입니다. 그렉 루이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루이. 어머? 내 스승님도 성이 루이셨어요. 장 루이라고 정말 유명하신 분이죠.”
그렉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얀. 이분이 바로 당신의 스승인 장 루이의 아들인 그렉 루이라고요.
그때 피팅룸의 문이 열리고 오늘 서이렌과 함께 의상을 입어 볼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나는 올 게 왔다는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아샤가 서 있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본 아샤의 실물을 처음 보는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아샤는 서이렌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나와 그렉은 없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던 아샤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아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아샤는 갑자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 역시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이 공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