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5화 (216/261)

#215화. 다시 미국으로

제이슨이 자신도 모르게 서이렌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미쳤다. 완전 마네킹이네.”

서이렌은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알아본 그를 보며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렉의 친구 서이렌이라고 합니다.”

티나와 제이슨은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서이렌을 보며 인간이 아니라 인형과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도 그렉의 친구입니다. 원세강이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예.”

티나와 제이슨은 나와 짧은 인사를 마친 뒤, 시선을 그렉과 서이렌에게 고정했다.

나는 관심도 없는 건가?

서이렌과 함께 다니면 이런 일이 항상 벌어지기에 그러려니 했다.

티나와 제이슨은 서이렌과 나란히 서 있는 그렉을 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비주얼 커플이네.”

“욕 나오게 잘 어울리는데?”

두 사람은 그렉에게 연구소로 돌아와 달라고 하소연하기 위해 공항까지 찾아온 것이었지만 그동안 본 적 없는 그렉의 모습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 우리 소장님도 연애는 하고 사셔야지. 안 그래, 제이슨?”

“티나 말이 맞아. 그동안 소장님이 너무 일만 하고 사셨지.”

티나와 제이슨이 눈빛을 맞추며 웃었다.

그렉은 두 사람이 몰래 귓속말을 하며 웃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티나, 제이슨. 왜 웃는 거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소장님. 그나저나 여자 친구 좀 소개해 주시죠?”

제이슨의 말에 그렉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이슨. 이분은 내 여자 친구가 아니야. 오해하지 말라고.”

“그러세요? 알겠습니다. 우선은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는데. 정말이야. 오해라고.”

그렉은 말해도 믿지 않는 티나와 제이슨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그만하고 돌아가. 휴직 중이지만 당분간 미국에 있을 예정이니까. 조만간 연구소에 가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봐줄게.”

그렉이 연구소에 오겠다고 하자 티나와 제이슨의 얼굴이 밝아졌다.

“정말로 오시는 거 맞죠?”

“그렇다니까. 그러니까 이만 가 봐.”

“꼭 오셔야 합니다. 연구 자료는 미리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알았다고. 빨리 가라고.”

티나와 제이슨은 몇 번이나 신신당부하고 뒤돌아섰다.

그들은 서이렌과 함께 떠나는 그렉의 뒷모습을 보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우리 소장님이랑 서이렌 씨 말이야. 너무 잘 어울린다. 선남선녀 커플이야.”

“소장님 같은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이랑 만나나 했는데. 역시 미남은 미녀를 만나는구나.”

티나와 제이슨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간다고 말만 하고 떠나지 않고 공항에 남아 그렉과 서이렌을 관찰했다.

엄마 미소로 두 남녀를 지켜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서이렌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갑자기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어? 어???”

“저 사람 뭐지? 왜 저렇게 다정하게 스킨십을 하는 거지?”

그 남자는 서이렌의 가방을 대신 들어 주더니 그녀와 팔짱을 끼고 공항을 가로질러 갔다.

그렉은 두 사람 사이에 조금 거리를 두고 마치 보디가드처럼 앞서 걸었다.

가끔 그렉이 서이렌을 돌아보곤 했는데 표정이 좋지 않았다.

티나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뭐야? 우리 소장님이랑 안 사귀나 본데?”

“소장님 혼자 짝사랑인가 봐. 이게 말이 돼? 완벽하신 우리 소장님이 짝사랑한다고???”

“방금 그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몰라. 이름이 너무 어려웠어. 원……. 뭐라고 했던 거 같은데.”

티나와 그렉은 공항을 빠져나갈 때까지 끝까지 팔짱을 풀지 않는 서이렌과 원세강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한편, 공항 밖으로 나가던 그렉이 매서운 눈으로 뒤돌았다.

“두 사람 말입니다. 대체 한국에서는 어떻게 참았나요?”

“응. 우리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커플이 당신들 말고 아무도 없잖아요.”

그렉은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 진상 커플을 보며 두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한국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서 그런지 자제했는데 미국에만 오면 커플 진상 짓이 도를 넘었다.

서이렌이 그렉을 보며 억울한 눈을 했다.

“한국에서는 연애하기 너무 힘들어요. 그렉이 이해해 줘야죠.”

그렉은 아련한 눈빛을 한 서이렌을 보며 표정을 풀었다.

서이렌은 이제 그 눈빛을 내게 쏘며 말했다.

“대표님. 우리 그냥 사귄다고 발표하면 안 돼요?”

“이렌 씨. 그러면 나 죽어요.”

“대표님 이제 완치했잖아요. 안 죽어요.”

“우리 두 사람이 사귄다고 발표하면 전 국민의 질타를 받을 겁니다. 욕먹어서 죽을 거예요.”

“쳇. 우리 팬들은 착하다고요. 내 행복을 빌어 줄 거라고요.”

서이렌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그렉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렌 씨. 세강 말이 맞아요. 이렌 씨 팬들이 테러라도 안 하면 다행이죠.”

“뭐라고요?”

“한국에 처음 가 봤지만. 그 나라는 이렌 씨한테 미쳐 있던데요? 어디를 가도 이렌 씨 광고판이 넘쳐나고 텔레비전을 틀면 CF가 흘러나오고, 말입니다.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스타를 빼앗아간 남자라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겁니다.”

그렉은 한국에 와서 서이렌의 인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한국의 팬 문화 특성상, 서이렌과 스캔들이 난 남자는 꽤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나는 서이렌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렌 씨. 비밀 연애가 더 재미있잖아요. 내가 잘할게요. 그러니까 삐지지 마요. 이렌 씨는 삐져도 예쁘지만, 웃으면 더 예쁜 사람이잖아요.”

“그건 나도 알죠.”

서이렌은 쭉 내밀었던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내게 팔짱을 끼었다.

“어휴. 또 시작이네.”

그렉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택시 정류장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 * *

로스앤젤레스의 스튜디오에서는 촬영 준비가 한창이었다.

세계적인 청바지 브랜드 후즈의 새로운 화보를 찍기 위한 자리였다.

오늘 찍은 사진은 2월에 출간되는 매거진에 실릴 중요한 사진이었다.

포토그래퍼 다니엘은 후즈 본사에서 온 제인과 함께 컨셉 사진을 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서이렌의 프로필 사진을 보며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제인은 걱정하는 다니엘을 보며 말했다.

“내가 보증해요. 진짜로 괜찮은 모델입니다.”

“제인의 눈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 사진들만 봐서는 영 별로네요.”

“서이렌 씨 사진이 별로라고요?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제인은 서이렌의 사진을 보고, 별로라고 말하는 다니엘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진에 보정이 너무 심하게 들어갔어요. 모델의 진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네요.”

다니엘은 아티스틱에서 보낸 서이렌의 사진이 보정으로 만들어 낸 사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이렌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본 제인의 의견은 달랐다.

그녀는 한국 도나텔로 패션쇼에 섰던 서이렌의 런웨이 영상을 직접 봤기에 지금 다니엘의 걱정이 기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니엘. 걱정하지 말고 내 말만 믿으세요. 조금 있으면 서이렌 씨가 올 텐데. 이렌 씨를 보면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갈 테니까요.”

“흠…….”

다니엘은 그래도 못 믿겠는지 미간의 주름이 펴지지 않았다.

“제인. 내가 추천한 모델은 어떤가요?”

“아샤 말인가요?”

“아샤야말로 후즈의 모델에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아샤는 이미 재작년에 후즈 모델이었어요.”

“아예 후즈의 브랜드 모델로 가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샤는 대단한 모델이라고요.”

“우리도 아샤를 고려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샤는 다른 광고를 너무 많이 찍고 있어요. 희소성이 없어요.”

제인이 거절의 의사를 밝히자 다니엘의 얼굴이 굳었다.

* * *

스튜디오가 있는 지하 주차장에 서이렌의 차량이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김경록이 차의 뒷문을 열어 줬다.

“고마워요. 김 매니저님.”

차에서 검은색 코트를 입은 서이렌이 내렸다.

뒤이어 나와 그렉 그리고 미하엘이 차에서 내렸다.

김경록은 트렁크에서 커다란 박스를 꺼냈다.

“이게 다 뭡니까? 형님?”

“촬영 준비물이지.”

나는 김경록이 꺼낸 상자를 살폈다.

지난날 내가 트로이 촬영장에 갈 때마다 챙겨갔던 것들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일정이 급해서 제가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 형님이 이렇게 준비해 주셔서 좋네요.”

“나 잘 배우고 있는 거 맞지?”

“예. 너무 잘하고 계세요.”

미하엘은 꼼꼼하게 스태프들의 간식까지 챙겨 온 김경록을 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루크. 너무 멋져요. 내가 좋아하는 것까지 챙겼네요.”

“하하. 미하엘 입맛은 내가 잘 알지.”

김경록은 그렉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그렉. 당신 것도 있어요.”

“봤어요. 고마워요.”

김경록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비록 임시였지만 서이렌 크루에 합류하게 된 김경록은 누구보다 기뻐했다.

원세강과 서이렌이 돌아가고 회사에서 서류 업무만 담당했던 그였기에 현장직이 그리웠다.

“가자. 세강아. 나도 궁금하다. 대체 할리우드는 광고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서 들어가 보죠.”

* * *

다니엘에게 스태프가 다가왔다.

“다니엘. 모델이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우선 메이크업와 헤어를 먼저 해 달라고 하세요.”

스튜디오의 조명을 확인하고 있던 다니엘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스태프에게 말했다.

“오늘 촬영할 모델이 먼저 다니엘에게 인사를 한다고 하는데요?”

“동양인들은 대체 왜 그렇게 인사를 좋아하는 거야?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촬영할 때 보자고 전해요.”

다니엘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조명 기사와 함께 논의를 계속했다.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나는 서이렌을 돌아봤다.

“이렌 씨. 포토그래퍼님이 바쁘신가 본데요.”

“그러게요. 인사도 안 받아 주시네.”

뻘쭘한 얼굴로 다가온 스태프가 내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대기실로 가시죠. 가서 헤어와 메이크업을 먼저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나와 서이렌은 스태프의 안내로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실에 가 보니 미하엘이 이미 그곳의 스태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서이렌의 헤어와 메이크업을 맡아 줄 사람은 할리우드에서도 유명한 사람이었다.

미하엘과 친해진 스콧은 서이렌을 보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미하엘 말이 맞았네요.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천사 같아요.”

스콧은 서이렌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서이렌입니다.”

“목소리도 너무 예쁘네요.”

“너무 칭찬만 해 주시는데요.”

“칭찬밖에 할 게 없어서 그런 거죠.”

서이렌이 검정 코트를 벗자 후즈 청바지와 흰 티를 입은 그녀의 몸이 드러났다.

스콧은 완벽한 서이렌의 마네킹 몸매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머릿결도 환상적이네요. 대체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건가요?”

스콧의 물음에 서이렌은 한국에서 하던 것처럼 답했다.

“제가 쓰는 오가닉 샴푸가 있는데. 그걸 쓰면 머릿결이 이렇게 좋아져요.”

방금 말한 오가닉 샴푸는 서이렌이 한국에서 삼 년째 모델을 하는 브랜드다.

이렌 씨 같은 모델이 어디에 있을까?

인터뷰 때마다 그녀가 모델인 브랜드를 홍보해 주는 서이렌이었기에 광고주들이 우리 이렌 씨를 너무 좋아한다.

“혹시 화장을 안 하고 온 거예요?”

“예. 스킨과 로션만 발랐어요.”

“난 또 한 줄 알았죠. 피부가 예술이네요. 광택이 흘러요.”

스콧은 서이렌에게 칭찬을 쏟아 냈다.

미하엘이 계속 끼어들어서 서이렌의 스타일링을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내놨고 스콧은 그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드디어 헤어와 메이크업을 모두 마친 서이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비로운 눈화장에 조금은 힘을 준 컬이 들어간 머리.

서이렌은 마치 록스타 같은 모습이었다.

스콧은 미하엘에게도 칭찬을 잊지 않았다.

“미하엘. 센스가 좋네요.”

“스콧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데요?”

“나중에 또 같이 일해요.”

“말씀만이라도 고마워요. 스콧.”

서이렌이 준비를 마치자 대기실로 스태프가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가 깜짝 놀라서 잠시 말을 못 했다.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서이렌을 탈의실로 안내했다.

한편, 모든 촬영 준비를 마친 다니엘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본업은 배우라는 동양인 모델이 잘할지 걱정스러웠다.

그때 촬영할 의상으로 갈아입은 서이렌이 제인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