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4화 (215/261)
  • #214화. 싸가지와 선배님(2)

    “저기 잠깐만요. 서이렌 씨도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서이렌 씨가요?”

    서이렌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연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서이렌과 자신은 비교가 안 된다.

    서이렌과 데뷔 연도는 같았지만, 지금의 두 사람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자신은 그저 주연에 이름을 올릴 정도는 되었지만, 톱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이렌은 전 국민이 사랑하는 스타였다.

    그런 서이렌이 짝사랑한다고?

    지수연은 놀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그 짝사랑 상대 말이에요. 혹시 박선호 배우님인가요?”

    “무슨 소리예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박선호 배우님이면 내가 지금 지수연 씨를 찾아왔겠어요?”

    “아니라는 말이죠?”

    “당연히 아니죠. 그리고 이제는 짝사랑 상대가 아닙니다. 난 성공했거든요.”

    “그럼 이제 사귀는 거예요?”

    서이렌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연은 눈앞의 서이렌이 갑자기 달라 보였다.

    마치 구원의 천사가 그녀의 앞에 내려온 것 같았다.

    “그래서요? 나한테 해 줄 말이 뭔데요?”

    “부딪쳐요.”

    “부딪치라고요? 대체 뭘요?”

    “박선호 배우님 성격이라면 좋아해도 절대 먼저 나설 사람이 아니에요. 답답한 면이 많죠.”

    “그런가요?”

    “딱 보면 몰라요? 그냥 직진하세요. 정확히 직구로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 줘야 알아들을 겁니다.”

    “그러다 거절당하면요? 그게 무슨 망신인가요?”

    “망신당하면 어때?”

    “???”

    “우리 동갑이잖아. 그냥 반말해도 되지?”

    “어? 그래.”

    지수연은 어느새 서이렌의 곁에 찰싹 붙어 있었다.

    “망신당할 게 두려워서 좋아하는 사람을 포기할 거야?”

    “하지만 같이 일하는데 거절당하면 다시 어떻게 얼굴을 보라고?”

    “오늘 보니까. 두 사람은 같이 촬영하면서 대화도 안 하던데? 어차피 한마디도 안 할 건데 무슨 상관이야?”

    “그거야 박선호 배우님이 원체 말이 없으시니까 그런 거잖아.”

    “나한테는 말을 잘하던데? 너도 봤지?”

    “그거야 박선호 배우님이 너를 좋아…….”

    순간 지수연이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서이렌은 지수연의 뾰로통한 얼굴이 햄스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친해지려고 노력해 봐. 할 말이 없으면 날씨나 밥차 메뉴에 관해서라도 이야기해 보라고.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는 거야.”

    “하지만…….”

    지수연은 자신이 나서서 다가가는 모습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됐다.

    “그리고 스태프들한테도 잘해.”

    “내가 왜? 배우는 연기나 잘하면 되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지수연이 서이렌을 흘겨봤다.

    “네가 그렇게 스태프들한테 막 대하는 거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쏙 들어갈걸?”

    “뭐라고? 너 말 다 했어?”

    “시간 있으면 네 주위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을 한번 봐 봐. 표정이 경직되어 있을 거야. 너랑 일하기 힘들다는 거지.”

    “…….”

    “그리고 스태프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좋지. 함께 일하는 동료잖아.”

    “무슨 동료야? 모두 배우인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인데.”

    “얘가 웃기고 있네. 그러니까 네 연기가 그 모양인 거라고.”

    “뭐라고!!”

    “스태프는 네 하인이 아니야. 조명 감독님이 안 계시면 너를 이쁘게 찍어 줄 사람이 없고, 반사판 드는 스태프가 없다면 네 얼굴이 방송에 환하게 나올 것 같아?”

    “…….”

    지수연은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서이렌이 더 타박할 것 같아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래도 너처럼은 못 해.”

    “누가 나처럼 하래? 그냥 다른 일반 배우들처럼은 하란 말이야. 알았어?”

    “…….”

    “알아들었어?”

    “응. 알았어.”

    지수연은 어느새 꼴찌 학생에 빙의해 서이렌을 선생님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넌 어떤 마음가짐으로 스태프를 대하는데 그렇게까지 다정하게 할 수가 있어?”

    “나 말이야?”

    “응. 아까도 보니까 촬영장 스태프들이 다들 너를 좋아하던데? 너 오늘 우리 촬영장이 처음이잖아.”

    “그렇지?”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갑게 사람들을 대해? 마치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사람처럼?”

    박선호가 서이렌을 보고 웃는 건 이해가 간다.

    그는 서이렌을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스태프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스태프들은 이 주 넘게 촬영했던 자신보다 반나절 본 서이렌을 더 친근하게 대했다.

    “알고 싶어?”

    “말해 줘. 알고 싶어.”

    “영업 비밀인데?”

    “뭔 소리야? 빨리 말해 줘.”

    서이렌이 피식 웃으며 비밀을 털어놨다.

    “감정이입.”

    “대체 무슨 감정이입을 말하는거야?”

    “눈앞의 사람들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막 대할 수는 없잖아?”

    “뭐라고?”

    “그것도 연기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연습해 봐. 넌 연기 연습도 좀 해야겠더라.”

    “야! 서이렌!”

    “그럼, 난 이제 갈게.”

    서이렌이 밴에서 내리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다급한 손길이 서이렌의 팔을 부여잡았다.

    서이렌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지수연도 자기가 한 행동에 놀랐는지 당황한 손길로 서이렌의 팔에서 손을 뗐다.

    “왜 그래? 할 이야기가 남았어? 난 다 했는데?”

    “……서이렌.”

    “말해.”

    지수연이 다짜고짜 핸드폰을 서이렌에게 내밀었다.

    “찍어.”

    “뭘 찍어?”

    “네 번호.”

    “왜? 계속 연락하게?”

    “응. 당연하지.”

    서이렌은 얼굴에 철판을 깐 것처럼 당당한 지수연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런 지수연이 귀엽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가긴 했기만 쉽게 전화번호를 줄 생각은 없었다.

    “싫은데?”

    서이렌이 딱 잘라서 싫다고 하자 지수연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왜? 나랑 연락하는 게 싫어?”

    “너 배신자잖아. 우리 대표님을 배신했지?”

    “…….”

    서이렌이 갑자기 과거의 일을 말하니 지수연은 깜짝 놀랐다.

    뭐라고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서이렌이 말한 대로 원세강을 배신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네가 우리 대표님한테 사과하면 그때 내 전화번호를 알려 줄게.”

    “싫다면???”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고 헤어지는 거지. 잘 가라. 다음에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

    서이렌은 획 고개를 돌려 밴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밴의 문이 열리자 밖에서 지수연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수연과 서이렌이 혹시 밴 안에서 싸운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서 있었다.

    하지만 서이렌이 멀쩡한 얼굴로 웃으며 나오자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마워요. 매니저님. 제 볼일은 이제 끝났습니다.”

    서이렌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자 매니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이렌을 따라 내린 지수연은 환하게 웃고 있는 매니저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오빠!”

    “예. 지수연 배우님.”

    지수연의 매니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지수연을 돌아봤다.

    지수연은 환하게 웃다가 자신을 보자마자 표정을 굳히고 긴장하는 매니저를 보며 멈칫했다.

    아까 밴 안에서 서이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간 있으면 네 주위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을 한번 봐 봐. 표정이 경직되어 있을 거야. 너랑 일하기 힘들다는 거지.]

    서이렌이 했던 말을 떠올린 지수연은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한 번도 스태프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자신이 제일 중요했고 자기감정이 제일 중요했다.

    그래서 남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지수연은 고개를 돌려 서이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

    서이렌은 이미 저 멀리 원세강 대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 * *

    나는 배진영 감독과 박선호와 인사를 하고 차를 주차한 곳으로 걸어갔다.

    마침 할 일이 있다고 사라졌던 서이렌이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멀리서 걸어오는 서이렌을 보며 입만 움직여 말했다.

    [오늘 수고했어요.]

    서이렌은 내 입 모양을 못 알아들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귀에 손을 가져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손가락 하트를 만든 뒤 서이렌에게 보여 줬다.

    서이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도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그녀의 입술에 찍고 내게 보여 줬다.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었다.

    내가 멈춰 서자 서이렌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서이렌 뒤에 서 있는 지수연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방금 봤을까?

    나는 지수연이 나와 서이렌이 손가락 하트를 서로 주고받은 걸 봤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손이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수연은 서이렌을 지나쳐 곧장 내게 다가왔다.

    왜 나한테 오는 거지?

    진짜로 봤나???

    나는 너무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망부석이 되어 아무 생각을 못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지수연이 갑자기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원세강 대표님. 죄송해요.”

    “???”

    뭐라는 거지? 뭐가 죄송해?

    나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서 서이렌을 바라봤다.

    서이렌은 지수연이 내게 고개를 숙인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아 했다.

    아니, 오히려 웃고 있었다.

    고개를 든 지수연이 나를 향해 말했다.

    “원세강 대표님. 제가 그때 계약서를 훔쳐서 LOK로 갔던 일이요. 죄송합니다. 그때는 어려서 그게 나쁜 짓이라는 걸 몰랐어요.”

    “아. 뭐.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제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려고요. 용서해 주실 건가요?”

    지수연은 사과를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뻣뻣하게 굴었다.

    그때 다가온 서이렌이 지수연의 등을 확 눌렀다.

    지수연은 서이렌의 팔 힘에 못 이겨 내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는데 아까 대충 고개만 끄덕였던 것과 달리 머리가 땅에 닿을 것 같았다.

    “야, 서이렌. 너 뭐 하는 거야?”

    “이 바보야.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하라고.”

    “하고 있잖아. 아파. 놔줘.”

    지수연이 버둥거리자 서이렌은 그제야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녀가 삐진 표정으로 서이렌을 흘겨봤다.

    “그게 끝이야? 우리 대표님께 죄송하다고 했어?”

    “했어. 원 대표님께 물어보라고.”

    서이렌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대표님. 지수연이 사과했어요?”

    “예. 했어요.”

    “봐 봐. 했잖아. 그러니까 전화번호 알려 줘.”

    지수연이 그녀의 핸드폰을 서이렌에게 내밀었다.

    서이렌은 피식 웃으며 지수연의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야? 왜들 이러는 거야?

    * * *

    한 달 만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의외의 인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과 함께 멀뚱히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젠셀 연구소에서 나온 티나와 제이슨이었다.

    그렉은 자신을 찾아온 연구소 직원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나, 제이슨. 여기는 웬일이야?”

    “연구소장님.”

    티나가 그렉에게 한걸음에 달려왔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친구가 항공사에서 일해요. 그렉이 탄 비행편을 알려 줘서 바로 달려온 거라고요.”

    “그거 불법 아니야?”

    그렉은 갑자기 찾아온 부하 직원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소장님 대체 언제 복귀하시는 건가요?”

    “한동안 복귀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연구소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

    “소장님이 안 계시니까 일이 진행이 안 돼요. 연구소장 대리로 온 분한테 매일 매일 깨진다고요.”

    티나와 제이슨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때 티나가 그렉의 뒤에 서 있는 나와 서이렌을 발견했다.

    티나가 그렉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소장님. 저 사람은 누구인가요? 혹시 연애하세요?”

    “티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럼, 누군데 같이 오신 건가요?”

    나는 그들에게 인사는 해야 할 거 같아서 앞으로 다가섰다.

    서이렌도 선글라스를 벗고 티나와 제이슨 앞으로 다가왔다.

    티나는 서이렌의 빛나는 얼굴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티나와 제이슨은 동시에 그렉을 쳐다봤다.

    “인사해. 내 친구 미스터 원과 서이렌 씨야.”

    티나는 굳은 얼굴로 제이슨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소장님이 왜 휴직계를 내셨는지 알겠다.”

    제이슨도 놀라 쩍 벌어진 입을 다물며 말했다.

    “사랑에 빠진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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