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13화 (214/261)

#213화. 싸가지와 선배님(1)

윤조의 인터뷰가 뜬 다음 날, 스타탄생에서 준비한 서이렌의 계약 기사가 떴다.

[서이렌, 세계적인 에이전시 아티스틱과 전속 계약]

[아티스틱과 계약한 서이렌. 미국 진출에 청신호]

윤조의 인터뷰로 인하여 아티스틱이란 회사도 함께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기사는 큰 이슈로 떠올랐다.

일반인들도 서이렌의 미국 진출이 순조롭다는 것을 알게 됐고 서이렌의 팬들도 흥분했다.

- 대박. 윤조가 그래서 한국에 왔던 거임???? 서이렌이랑 계약하려고??

- 그런가 보네. 미치겠다. 아티스틱이면 진짜 유명한 곳이잖아.

- 서이렌의 스타성을 알아본 윤조가 전속 계약을 주도했다고 기사에 나오네. ㅋㅋㅋㅋ- 서이렌 대박이다. 미국에서 찍었다는 영화도 기대해 봐도 되는 건가?

- 대니 라모로 감독 영화다. 당연히 기대해야지. ㅋㅋㅋ- 이러다 월드 스타 되는 거 아님?

-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와꾸는 여신이고. 서이렌이라면 전 세계는 물론이고 외계인한테도 먹힐 거라고.

└ㅋㅋㅋㅋ

└1111

└2222

└333333

?ㅇㄱㄹㅇ

* * *

서이렌이 아티스틱과 전속 계약을 맺었다는 기사가 뜨고 얼마 후, 미국으로 돌아간 윤조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윤조가 보낸 일정표를 보며 물었다.

“일정이 예상보다 빡빡하네.”

[응. 미국에 오면 먼저 청바지 광고 촬영을 할 거야.]

윤조는 지난번 내가 이야기했던 청바지 광고를 손쉽게 따냈다.

“그런데 이 광고 말이야. 단독이었네?”

[당연히 단독이지.]

“난 여러 모델이 촬영하고 우리 이렌 씨가 그중에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누구야? 나 찰리 윤이라고. 단독이 아니면 계약을 안 했을 거야.]

“그래. 우리 찰리 윤 능력이 출중한 거야 당연히 알지.”

[오빠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다. 사실 나도 단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지. 진짜로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우리가 보낸 이렌 씨 프로필을 후즈 쪽에서 좋게 봤나 봐.]

“그 사람들이 이렌 씨 실물을 보면 더 놀라겠다.”

[그렇겠지? 하하하.]

순간 내 머릿속에 서이렌의 광고가 뉴욕 타임스퀘어 한복판에 뜨는 것이 떠올랐다.

지금은 상상뿐이지만 멀지 않은 날에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광고 촬영 후에는 곧바로 뉴욕으로 가야 해.]

“알아. 뉴욕 패션 위크에 출연해야 하니까.”

[대체 도나텔로의 얀 필립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도나텔로에서 모델로 서 달라는 제안을 받고 내가 얼마나 당황한 줄 알아?]

윤조는 도나텔로에서 온 메일을 보고 처음에는 단순한 패션쇼 초청장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열어 보니 관객이 아니라 모델로 와 달라는 초청장이었다.

“우리 이렌 씨가 얀 필립의 뮤즈야. 사실은 작년에 도나텔로 한국 런칭 쇼에서도 이렌 씨가 무대에 오른 적이 있거든.”

[서이렌 씨 맡고 자료 조사하면서 본 거 같아. 암튼, 이거 되게 좋은 기회인 건 알지?]

“도나텔로 패션쇼하고 나서 곧바로 청바지 광고가 뜨면 타이밍 적으로 딱 좋겠다. 어때?”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날짜를 잡아 보고 있어.]

“네가 미국에서 지원해 주니까 너무 든든하다.”

[청바지 광고 건은 오빠가 낸 의견이잖아. 오빠야말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또 알려 줘. 내가 적극적으로 반영해 볼게.]

“내가 이렇게 아티스틱의 부사장님을 막 부려 먹어도 되나?”

[당연히 되지. 오빠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야.]

윤조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정말 고마워.”

[쳇. 낯부끄럽게 그런 말 좀 하지 마.]

“알았어. 이제 전화를 끊어야겠다. 다시 연락할게.”

내가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윤조가 소리쳤다.

[아! 깜박했다.]

“응? 왜 그래?”

[이번 도나텔로 패션쇼에 서이렌 씨 말고 다른 스타도 함께 모델로 서더라고.]

“그래? 그게 누군데?”

[오빠는 잘 모를 거야. 내가 자료를 보내 줄게. 뉴욕에 오면 두 사람이 하루 동안 함께 모델 워킹을 배우게 될 거야.]

“그래? 유명한 사람이야?”

[모델이긴 한데. 하이패션 모델이 아니라 커머셜 모델이래.]

“말해 줘도 난 잘 모르겠다. 우선 자료를 보내 줘.”

전화를 끊은 나는 윤조의 메일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서이렌은 모델 워킹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는 스타가 한 명 더 있다니 연습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나는 작년에 도나텔로 런칭 패션쇼 무대를 찢었던 서이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새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 떴다.

[도나텔로 패션쇼에 함께 서는 모델 정보]

윤조가 보낸 메일을 클릭한 나는 마우스의 휠을 움직여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화장품 광고 이미지가 떴다.

향수를 손에 들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우리 이렌 씨와 함께 런웨이에 선다고?

* * *

후즈 청바지 촬영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 나와 서이렌은 대전의 한 촬영장을 방문했다.

대전의 구도심에 있는, 지은 지 오십 년이 넘는 오래된 주택에서는 한창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하자 배진영 감독이 감독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 대표님……??”

“일어나지 마세요. 저희는 응원차 들린 겁니다.”

“그래도 원 대표님과 서이렌 님이 직접 오셨는데 어떻게…….”

이제 갓 서른 살이 된 신인 감독은 나와 서이렌을 보자 당황한 듯싶었다.

함께 온 박진숙 이사가 웃으며 배진영 감독을 다독였다.

우리의 깜짝 방문에 감독은 잠깐 촬영을 접고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스태프들이 우리가 가져온 간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서이렌도 박선호를 도와 샌드위치 박스를 날랐다.

“서이렌 배우님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일 년 만에 보는 거 같네요.”

서이렌과 함께 샌드위치를 옮기던 박선호는 수줍게 웃으며 귀까지 빨개졌다.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지수연만 끼지 못하고 멀찌감치 서 있었다.

스태프들은 그런 지수연을 보고 중얼거렸다.

“지수연은 이런 간식 안 먹겠지?”

“당연하죠. 밥차 밥도 안 먹고 매니저가 싸 온 도시락을 밴에서 혼자 먹잖아요. 원래 밥차 밥은 안 먹기로 유명하대요.”

“그럼, 샌드위치 먹을 거냐고 안 물어봐야겠다.”

“그래도 물어봐야죠. 내가 다녀올게요.”

조명 스태프가 지수연에게 다가가 간식을 먹자고 했지만, 지수연은 매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스태프는 뻘쭘한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안 먹겠다는데요.”

“되게 까칠하네.”

“됐어요. 남는 건 우리가 먹으면 되죠.”

스태프들은 평소에 그들과 말도 섞지 않는 지수연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서이렌이 저 멀리 외딴섬처럼 서 있는 지수연을 힐끔 쳐다봤다.

“박선호 배우님. 지수연 배우님은 같이 안 먹어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같아요.”

“그런가요?”

서이렌은 지수연이 원해서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들었다.

서이렌이 아는 지수연은 연기 욕심 때문에 이렇게 작은 영화에 출연하겠다고 나설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문이 앞섰다.

그렇게 원했던 영화 촬영장에서도 이렇게 겉돌지 않는가?

순간 서이렌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박선호 배우님. 우리가 함께 가서 지수연 배우님을 불러올까요?”

“우리가요?”

“예. 우리가 가서 말하면 올 거 같은데요?”

“임 매니저님이 말해도 안 오시던데요.”

“한번 가 봐요.”

서이렌이 박선호를 이끌고 지수연에게 걸어갔다.

뚱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지수연은 서이렌과 박선호가 다가오자 순식간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서이렌은 지수연의 표정이 확 바뀌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짐작한 것이 맞다고 확신했다.

서이렌은 뒤로 슬쩍 빠지고 박선호를 떠밀었다.

졸지에 지수연 앞에 선 박선호가 얼떨결에 입을 열었다.

“지수연 배우님.”

“왜 그러세요?”

“같이 가서 간식 먹을래요? 원 대표님과 서이렌 씨가 사 오신 건데요.”

“……흠.”

지수연은 바로 답하지 않고 어물쩍거렸다.

하지만 서이렌은 방금 지수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을 캐치했다.

“죄송합니다. 별로 안 내키시면 그냥…….”

“잠깐만요.”

“예?”

“먹을래요.”

“그러시겠어요?”

“가요. 한번 먹어 보죠.”

지수연은 새침한 표정으로 박선호의 옆에 섰다.

서이렌은 두 사람의 뒤로 슬쩍 빠졌다.

서이렌이 안 보이자 박선호가 고개를 돌렸다.

“서이렌 배우님. 같이 가요.”

박선호가 다정한 목소리로 서이렌에게 말하자 지수연의 표정이 굳었다.

“대표님이 저를 찾으시네요. 저는 저쪽에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서이렌은 아무런 연락도 없는 핸드폰을 흔들며 웃었다.

“대표님이 찾으시면 가 보셔야죠.”

“그럼, 두 분이 간식을 맛있게 드세요.”

서이렌이 간다고 하니 지수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 * *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은 해가 지기 전에 끝이 났다.

촬영을 마치고 밴으로 돌아가던 지수연은 모여 있는 스태프 무리를 발견했다.

서이렌이 스태프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지수연의 매니저가 이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이렌 배우님은 진짜 성격이 좋으시네요. 반나절 만에 스태프들과 친해졌어요.”

“누구는 안 친해지고 싶어서 그럴까요? 역에 몰입하느라 다른 건 관심을 안 두니까 그런 거죠.”

지수연이 매니저를 흘겨보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멘트를 수습했다.

“맞습니다. 우리 지 배우님은 워낙에 작품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라. 촬영장에만 집중하시죠.”

“알면 됐어요.”

지수연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스태프뿐만 아니라 박선호와도 다정하게 웃고 떠드는 서이렌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박선호가 촬영장에서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건 지수연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자신은 지난 이 주일간 박선호와 제대로 말을 섞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오늘 간식을 먹으며 나눈 대화가 지금까지 나눈 대화 중에 제일 길었다.

지수연이 고개를 획 돌려 밴에 올라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지수연 씨.”

지수연은 차에 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서이렌이 서 있었다.

서이렌은 환하게 웃으며 지수연에게 다가왔다.

“밴에 탈 거죠? 같이 타요.”

“왜요?”

“내가 할 말이 있으니까요.”

서이렌은 지수연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그녀를 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지수연의 뒤를 이어 밴에 올라탄 서이렌이 지수연의 매니저를 보며 말했다.

“여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기다려 주세요.”

“아. 예.”

지수연의 매니저는 서이렌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서이렌과 밴에 탄 둘이 있게 된 지수연은 황당했다.

“서이렌 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나가요.”

지수연이 서이렌을 밴 밖으로 쫓아내려는 순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박선호 배우님 좋아하죠?”

“…….”

지수연은 순간 얼음이 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박선호 배우님을 좋아하잖아요. 내 말이 틀렸어요?”

“지……. 지금 뭐라는 거예요? 내가 왜 박선호 배우님을 좋아해요?”

“그럼, 싫어하나요?”

지수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서이렌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녀의 속마음이 송두리째 까발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선배로서 충고 하나만 할게요.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드러내요. 그렇게 뒤에서 바라보기만 하면 어떻게 알겠어요?”

“선배라니 말이 웃기네요. 우리 데뷔 연도가 같은 건 알아요?”

“누가 연예계 선배라고 했나요?”

“그럼, 뭔데요?”

“짝사랑 선배.”

“???”

“어때요? 이제 선배님 말을 들을 준비가 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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