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여자 친구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어색했다.
명품 브랜드의 딱 떨어지는 정장에 나비넥타이까지 하고 나니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렉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렉은 웃으며 내게 걸어와 내 옆에 섰다.
그 역시 파티장에 가려고 차려입었는데 남자가 보기에도 멋져 보였다.
“왜요? 잘 어울리는데?”
“이렇게 비싼 옷은 처음입니다. 나비넥타이 같은 것도 해 본 적이 없고요.”
“뭐든지 처음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차려입고 가야 하는 건가요?”
“왜요? 옷이 마음에 안 드나요? 세강이 파티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다고 이렌 씨가 부탁한 겁니다. 내가 빌려준 옷이 마음에 안 든다면 당장 나가서 새로 살까요?”
“아뇨. 됐어요. 뭐 하러 그런데 돈을 쓰나요. 그냥 입을게요. 어색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러게요. 여자 친구가 그렇게 원하는데 들어주셔야죠.”
그렉은 나를 놀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렉과 서이렌은 요즘 매일같이 붙어 다니면서 나를 어떻게 놀릴지 그것만 연구하는 것 같다.
* * *
윤조는 나를 보자마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윤조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내 입으로 먼저 말하기로 했다.
“너도 그 파파라치 사진을 본 거구나?”
“오빠. 사진 잘 나왔더라.”
“놀리지 마. 내가 그 사진 때문에 진짜 식겁했다.”
“샤오엔이면 중국에서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스타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긴 우리 파티에 왔으니까 알지.”
“여기에 샤오엔이 왔다고?”
나는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다.
“파파라치 사진이 찍힌 두 사람이 이렇게 여기서 또 만나네. 운명인가?”
“운명은 무슨. 그냥 재수가 없었다.”
윤조가 자꾸 놀려서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 집 되게 좋다. 집이 이렇게 넓으니까 집에서 파티도 열고 말이야. 역시 할리우드야.”
“사실 여기는 앤드류 집이야.”
“혹시 너도 여기 살아?”
“어떻게 알았어?”
“인테리어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역시 오빠는 세심해. 연애할 때 눈치 제로였던 거만 빼면 오빠도 꽤 자상하고 섬세한 남친이었단 말이지.”
“방금 그 말 칭찬이지?”
“칭찬이야.”
“내가 눈치가 없어서 네 말을 못 믿겠다.”
“쳇. 어차피 이제는 내 남자도 아닌데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알았어. 그만 놀려라.”
윤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서이렌과 그렉이 다가왔다.
윤조는 서이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눈치 없는 대표님이랑 사귀느라 힘드시죠?”
윤조의 한마디에 우리는 모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윤조야. 너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그래서 커플 파티라고 거짓말한 거야. 안 그랬음 오빠가 이렇게 잘 차려입고 왔겠어?”
서이렌과 윤조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었다.
이제 보니 내가 당한 것 같았다.
내가 한마디 하려고 입술을 떼는데 웃고 있던 서이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샤오엔과 팡닌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윤조는 서이렌이 오해할까 봐 재빨리 귓속말로 오늘 파티에 그녀도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윤조의 말을 들은 서이렌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러니까 초대도 안 했는데. 본인이 오겠다고 했다는 건가요?”
“어젯밤에 연락이 왔더라고요.”
서이렌은 팔짱을 끼고 샤오엔을 노려봤다.
내 앞으로 다가온 샤오엔이 손을 내밀었다.
“원세강 대표님. 또 뵙네요.”
나는 샤오엔이 내민 손을 무시하고 뒤로 한 발짝 물러나서 말했다.
“중국에 가신다고 했던 거 같은데 안 가셨네요.”
샤오엔은 내가 악수를 받아 주지 않자 무안했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샤오엔은 팡닌을 옆으로 끌더니 그녀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팡닌은 샤오엔이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대신 내게 말했다.
“원 대표님. 우리 샤오엔이 대표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는데요. 시간 좀 내주실래요?”
팡닌이 말을 마치자 샤오엔이 나를 보며 은근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순간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서이렌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윤조도 굳은 표정으로 샤오엔을 보고 있었다.
서이렌이 윤조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방금 봤어요. 우리 대표님을 보고 웃는 거?”
“보통내기가 아닌데요. 이렌 씨.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우리 대표님이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거 알죠?”
“잘 알죠. 완전 호구잖아요. 눈치도 없고.”
“그럼, 이렌 씨가 가서 남자 친구를 지켜요.”
윤조는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서이렌을 떠밀었다.
서이렌이 다가와 내 옆에 서자 샤오엔의 눈빛이 돌변했다.
연예계에 있으면서 미인을 볼 만큼 봐 왔고, 자신도 외모로는 어디에서도 꿇리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눈앞의 여자는 레벨 자체가 달랐다.
서이렌이 내 옆으로 다가오자 나도 긴장했다.
보다 못한 팡닌이 대신 내게 물었다.
“원 대표님. 이분은 누구시죠?”
“이분은…….”
내가 서이렌을 소개하려는데 그녀가 내 팔을 잡았다.
“내가 할게요. 대표님.”
“이렌 씨.”
서이렌이 직접 자신을 소개하려고 입을 열었다.
“저는 서이렌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서이렌의 입에서 유창한 중국어가 나오자 샤오엔과 팡닌이 화들짝 놀랐다.
나 역시 서이렌이 이렇게 중국어를 잘할 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내 서이렌이라는 이름을 떠올린 샤오엔의 눈빛이 달라졌다.
샤오엔은 문 씨어터에 출연하는 조연 배우가 이렇게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일 줄 몰랐기에 당황했다.
샤오엔은 질투 섞인 눈빛으로 서이렌에게 말했다.
“저는 샤오엔입니다. 제가 누군지는 아시죠?”
“아뇨. 모르는데요.”
“모른다고요? 원 대표님과 찍힌 파파라치 사진을 못 봤나요?”
“음?”
서이렌은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샤오엔을 바라봤고 그녀는 기분이 나빠졌다.
“원 대표님께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아뇨. 관심이 많죠. 우리 대표님이신걸요. 다만 쓸데없는 건 잘 안 찾아보는 편입니다.”
“쓸데없는 거라고요? 열애설이 떴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닌 거라는 건가요?”
“우리 대표님이 열애설이 떴나요? 금시초문인데요. 그냥 일하다 찍힌 사진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 보니 누군지 알 것 같네요. 혹시 그 사진 속의 여자가 본인이신가요?”
“맞아요. 내가 그 사람입니다.”
“사진이랑 얼굴이랑 좀 다르게 생기셨네요. 한 번에 몰라봤어요.”
“이봐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화가 난 샤오엔이 서이렌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놀란 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두 사람이 중국어로 대화를 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왠지 나를 두고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팡닌이 참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대표님. 서이렌 씨가 말이 좀 심하네요. 대체 우리 샤오엔한테 왜 저러는 겁니까? 혹시 서이렌 씨가 샤오엔을 질투하고 있는 겁니까?”
“뭐라고요? 내가 왜 샤오엔을 질투해요?”
“원세강 대표님이 우리 샤오엔한테 호감을 보이니까 지금 질투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요?”
나는 화내는 서이렌의 팔을 잡았다.
“내가 설명할게요.”
“대표님이 뭘 설명해요. 설명할 게 뭐가 있다고.”
나는 서이렌의 곁으로 가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서이렌의 손을 잡자 샤오엔과 팡닌의 눈이 커졌다.
“팡닌. 중국어로 통역해 줘요.”
“……예?”
“서이렌 씨는 내 여자 친구입니다.”
“뭐라고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서이렌 씨는 내 여자 친구예요.”
팡닌은 너무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팡닌. 방금 원세강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샤오엔…….”
팡닌은 차마 통역을 못 하고 안절부절못했다.
“팡닌. 방금 걸 프렌드라고 하지 않았어요?”
“샤오엔. 우리 이만 가자.”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이렌의 허리에 내 손을 둘렀다.
샤오엔은 그걸 보고 기함했다.
“샤오엔. 나가자. 나가서 설명해 줄게.”
팡닌은 정신이 나간 듯한 샤오엔을 끌고 파티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나는 다급히 서이렌의 허리에 두른 내 손을 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서이렌이 내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이렌 씨. 다른 사람들이 봅니다.”
“그렇게 창피하면 하지 말았어야죠.”
“예?”
“다 해 놓고 창피해하시네.”
서이렌이 내 팔을 꽉 잡더니 내 품에 안겼다.
하지만 이곳이 미국이라서 그런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나는 갑자기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제 한국에 가면 이런 애정 행각도 못 하겠지.
나는 내 품 안에 안긴 서이렌을 꽉 안아 줬다.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윤조와 그렉은 고개를 돌렸다.
“그렉이라고 했죠? 고생하시네요. 우리 오빠가 원래는 저런 사람이 아닙니다.”
“윤조 씨는 좋겠네요.”
“왜요?”
“저는 저 두 사람을 따라서 이제 한국에 가야 합니다.”
“어머. 이를 어쩌나.”
“이겨 내야죠.”
* * *
LOK에서는 지금 긴급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회의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임원급 인사들이다.
그들은 상석에 앉아 있는 한성제 왕 대표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성제는 앞자리에 앉은 한지욱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제작비 대비해서 얼마나 건진 거야?”
평소 눈치가 없는 한지욱이었지만 오늘을 꽤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아직 해외 판권 협의가 끝나지 않았고, 절찬 상영 중이라서 정확히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절찬 상영 중인 작품이 하루에 오만도 안 들어와? 크리스마스에 신정 연휴까지 끼어서?”
“개봉한 지 이제 삼 주밖에 안 지났으니까. 조금만 더 지켜보면…….”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힌 한성제는 손을 들어 한지욱의 입을 막았다.
“한 대표는 입 다물어.”
한지욱은 마지못해 굳게 입을 다물었다.
“김승민 대표. 말해 봐. 손실이 얼마나 될 것 같아?”
TOP의 김승민 대표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한지욱 대표가 말한 것처럼 아직 극장 수익과 2차 수익이 남았지만 크게 기대할 수 있는 수치는 아닌 것 같습니다. 중국의 그래픽 회사에 외주를 줬기에 그 비용도 나가야 하고요.”
“그래서 손실액이 얼마나 되지?”
“그나마 안정적으로 계산하면 칠십억 정도 됩니다.”
“최악으로 계산하면?”
“…….”
김승민을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답했다.
“백억 정도로 예상합니다.”
백억이라는 말에 조용하던 회의실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한성제는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몰아 내쉬었다.
김승민은 조용히 한지욱을 쳐다봤다.
한지욱은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조용히 책상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탈출은 만듦새가 좋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액션이라는 강점이 있는 영화다.
연말 특수가 있어서 절대 이렇게 망할 작품은 아니었다.
하지만 작품이 나오기도 전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심사등급이 바뀌어서 가뜩이나 감정선이 부족한 영화가 뭉텅이로 잘려 나갔으며, 한지욱이 불러일으킨 가짜 스캔들까지.
대탈출은 이 모든 것이 쌓여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개봉한 지 삼 주가 지났으나 아직도 백만 명을 넘지 못한 것이다.
한성제 왕 대표가 깊게 한숨을 들이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TOP 미디어에서 손을 떼.”
“예?”
“한지욱 대표는 오늘부로 TOP 미디어 대표가 아니야.”
“아버지. 그런 게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회의 중이야. 여기 네 아버지가 어디에 있어?”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TOP 첫 작품인 멜랑꼴리를 성공시켰습니다. 한번 실패했다고 저를 이렇게 버리시면 안 되죠.”
한성제는 멜랑꼴리를 들먹이는 한지욱을 보며 한숨이 났다.
멜랑꼴리는 한번 엎어질 뻔한 걸 김경록이 깡그리 다 뜯어고쳐서 만들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한성제가 잘 알고 있다.
“꼴 보기 싫으니까 모두 나가.”
“왕 대표님.”
한지욱은 굳은 얼굴로 한성제를 불렀다.
한성제는 못난 아들의 얼굴을 보며 속에서 열불이 났다.
한성제는 자신을 붙잡는 한지욱을 뒤로 하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임원들 모두가 사라지고 커다란 회의실에는 한지욱만이 남았다.
한지욱의 눈에는 독기만 남아 있었다.
“제길.”
한지욱은 회의실 창으로 보이는 시티타워를 바라봤다.
시티타워 십오 층에 있는 스타탄생을 떠올리자 더 화가 났다.
한지욱은 핸드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오늘 대탈출의 반값 표를 푼다고 했다.
예매율이 얼마나 반등했나 궁금했던 한지욱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영화 예매율을 확인했다.
그런데 포털 메인 페이지에 떡하니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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