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04화 (205/261)
  • #204화. 연말 파티

    나는 지금 제3 촬영장 앞에서 그렉과 함께 서이렌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렉에게 캔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마셔요.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커피예요.”

    “압니다. 루크도 제게 권하더군요. 당분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안 드시겠다고요?”

    “아뇨. 안 마신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렉은 내 손안에서 캔 커피를 빼앗듯 채 갔다.

    그렉은 차가운 남자였지만 의외로 내 말을 잘 들었다.

    “원래는 올해 말까지 휴직이라고 했죠?”

    “그랬죠.”

    “대체 언제까지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겁니까? 저는 이제 완치했다면서요?”

    “원세강 씨는 이제 제 관심 밖입니다. 저는 이렌 씨를 지키려고 남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이봐요. 이렌 씨가 나고. 내가 이렌 씨입니다. 우리는 한 몸이니까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죠.”

    “엄연히 두 사람인데 한 명이라뇨. 미하엘이 왜 그렇게 두 사람의 연애 행각에 치를 떠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연애 행각이라뇨? 제가 언제 그랬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부끄러움에 두 뺨이 달아올랐다.

    미하엘이 본 건 그렉이 본 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 단맛을 끊을 수가 없네요.”

    “이렌 씨를 지킨다면 한국에도 따라오실 건가요?”

    “당연하죠. 지금 한국어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이래 봬도 언어에도 소질이 있습니다. 5개 국어를 한다고 하면 믿으실까요?”

    “대단하시네요.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 우리 이렌 씨를 지켜 주신다니 너무나도 감격스러워요.”

    “그렇죠. 당연한 거죠.”

    그렉이 너무 뻔뻔하게 나와서 내가 대화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그때 제3 촬영장의 문이 열리며 촬영을 끝낸 배우들과 대니 라모로 감독이 나왔다.

    그들의 흡족한 표정을 보니 오늘도 우리 이렌 씨가 인생 연기를 한 것 같았다.

    서이렌과 미하엘도 촬영장에서 나오면 우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미하엘이 한걸음에 내게 달려오더니 나를 붙잡고 흥분해서 말했다.

    “세강! 세강! 루나가 안드로이드였어요. 대박.”

    “쉿. 조용히. 일급비밀입니다.”

    “…….”

    미하엘은 순간 놀라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었고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하엘은 내게 붙으며 귓속말을 건넸다.

    “오늘 이렌이 얼마나 멋졌는지 모르죠?”

    “그랬나요?”

    “정체를 밝힌 후 모두를 구하고 남자 주인공인 에릭도 구해 내요. 완전 여신인 줄 알았어요.”

    나는 서이렌을 힐끔 쳐다보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고생했어요. 이렌 씨.]

    [고마워요. 대표님.]

    미하엘의 흥분 섞인 말을 들어 주고 있는데 때마침 대니 라모로 감독과 빈센트 테일러 촬영감독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대니 라모로는 서이렌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였고 빈센트 테일러도 환하게 웃었다.

    하루빨리 편집된 화면을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 * *

    레전드 필름에서는 12월의 마지막 전체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박진숙과 강진석이 레전드 필름의 업무 내용을 진설에게 브리핑했다.

    “블랙 마치의 흥행은 순조롭습니다. 이번 주 크리스마스 연휴에 오백만을 넘을 것 같습니다.”

    “박 이사. 우리 손익 분기점이 얼마였죠?”

    “칠백만입니다. 신정 연휴까지 생각하면 거뜬히 넘을 겁니다. 지금 해외 판권 계약도 순조롭고요.”

    손익 분기점을 넘는다는 말에 강진석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이고 다행입니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강진석을 보며 피식거리며 웃었다.

    진설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블랙 마치는 레전드 필름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들어간 블록버스터예요. 물론 할리우드 영화 제작비에 비하면 인디 영화 수준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적은 예산으로 이만한 성과를 낸 건 아주 고무적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인적인 일로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회의실에 모인 레전드 필름 직원들이 너나 할 거 없이 기뻐했다.

    지난 일 년간 블랙 마치에 쏟아부었던 노력이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한바탕 웃음꽃이 지나가고 진설은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회의실 화면에 ‘다락방’의 기획안이 뜨자 진설이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LOK의 지수연 배우가 여주인공을 하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죠?”

    “맞습니다. 대표님.”

    “지수연 배우면 한창 인기 있는 신세대 배우인가?”

    “요즘은 신세대 배우라는 말은 잘 쓰지 않지만, 인기가 많은 배우는 맞습니다.”

    “다락방이 저예산 영화라서 개런티가 보잘것없고, 촬영 환경도 고될 텐데. 그래도 하겠다고 하나요?”

    “꼭 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연락을 해 왔습니다.”

    “흠.”

    진설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다락방은 레전드 필름이 작년에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젊은 영화인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저예산 영화다.

    “그래서 배 감독과 다른 스태프들은 뭐라고 하나요?”

    “배진영 감독이야 당연히 좋아하죠. 박선호 배우가 참여하는 것도 그렇고 지수연 배우도 그렇고. 이름값이 있는 배우들이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지수연 배우가 촬영장에서 까탈스럽게 군다는 소문 때문에 마음에 들지는 않습니다.”

    박진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진설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젊은 배우가 연기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 작품을 선택한 건데, 한번 믿어 보죠. 배 감독도 좋아하고 있다고 했으니까요. 저는 지수연 배우의 캐스팅에 찬성합니다.”

    다른 임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설의 선택에 동의했다.

    모든 회의가 끝나자 강진석이 연말 파티를 공표했다.

    “다음 주에 스타탄생에서 레전드 필름과 함께 연말 파티를 열 예정입니다. 꼭 참석해 주세요.”

    “그런데 강 이사님. 무슨 연말 파티를 아침부터 해요?”

    “박진숙 이사님도 참. 아침부터 해서 오전 중에 끝나면 집에도 일찍 가고 얼마나 좋습니까?”

    진설이 강진석의 옆구리를 콕 찌르며 물었다.

    “강 이사. 미국에 있는 원 대표랑 이렌 씨가 원격으로 참석하려는 거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원세강과 서이렌이 원격으로 참석한다는 말에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그런 거였어요? 그래서 오전에 연말 파티를 하는 거군요.”

    직원들은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며 웃었다.

    강진석은 좋아하는 직원들을 보며 다행이다 싶었다.

    “미국물이 얼마나 좋은지 오랜만에 원 대표랑 이렌 씨 얼굴이나 봅시다. 하하하.”

    * * *

    드디어 모든 촬영이 끝났다.

    다른 배우들은 12월 초에 촬영이 끝났지만, 마지막 반전의 주인공인 서이렌과 에릭 역의 콜린 스미스만은 바로 어제까지 제3 촬영장에서 마지막 촬영을 진행했다.

    거리에 캐럴이 들리고 연말 느낌이 물씬 났다.

    우리는 촬영을 마치자마자 아파트로 돌아갔다.

    김경록이 이미 연말 파티 준비를 모두 끝마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으로 가 보니 나를 위해 도수가 없는 무알코올 샴페인에 다과까지 깔끔하게 준비해 놓았다.

    김경록은 쭈뼛거리며 일어서더니 외투를 챙겨 들었다.

    “세강아. 나는 이만 가 볼게.”

    “왜요? 집에 가도 할 게 없으시잖아요. 같이 있어요.”

    “됐어. 한국에서 나를 보면 얼마나 놀랄 거야?”

    “그럼, 그냥 이렇게 가시겠다고요?”

    “나도 염치가 있는 놈이야. 좋은 자리에 내가 끼면 안 되지.”

    “언젠가는 한국에서도 우리가 함께 일하는 걸 알게 될 텐데요.”

    “그러니까, 나중에 보자고. 연말이라 기쁜 마음으로 모인 자리일 텐데 내가 굳이 끼어서 초를 칠 필요는 없지.”

    김경록은 말리는 내 손을 뿌리치고 황급하게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서이렌이 다가오더니 나를 이끌었다.

    “대표님. 오세요. 이제 연결할 겁니다.”

    “그래요. 그러죠.”

    화상 회의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접속하니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에 영상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고화질의 영상은 아니었으나 오랜만에 보는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 식구들의 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모두 스타탄생 대회의실에 모여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와! 이렌 씨다!!!]

    [이렌 씨. 오랜만이에요.]

    [원세강 대표님. 왜 이렇게 살이 빠지셨어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떠드는 통에 귀가 아팠다.

    “모두 잘 계셨어요? 얼굴은 다들 좋아 보이네요.”

    [화면이 부하게 나오는 거야. 원 대표 잘 있었어?]

    상석에 앉은 진설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진설의 옆에 박선호가 얌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진설 대표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옆에 박선호 배우님도 반가워요.”

    [안녕하셨어요. 원세강 대표님.]

    우리는 그 이후로도 모든 직원의 안부 인사를 물으며 시간을 보냈다.

    모든 직원과 인사를 마치자마자 강진석의 궁금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세강아. 이렌 씨 옆에 있는 저 훤칠하게 생긴 분은 대체 누구셔?]

    “이분이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렉을 돌아봤다.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있는 정장을 쫙 빼입은 그렉이 화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고화질 영상은 아니었지만 한눈에 봐도 멋지게 생긴 그를 보며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 직원들은 그가 누군지 궁금해했다.

    나는 그렉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빨리 대답을 못 했다.

    [원 대표님. 혹시 미국에서 캐스팅한 배우인가요? 너무 잘생기셨는데요?]

    윤서혁의 질문에 그렉이 웃으며 답했다.

    무려 한국어로.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렉을 쳐다봤다.

    진짜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건가?

    내가 당황하자 서이렌이 나 대신 그렉을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이쪽은 그렉 루이. 저와 원 대표님이 사는 아파트의 이웃사촌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그렉 루이라고 합니다.”

    아직 발음은 어색했지만, 또박또박 한국말을 하는 그렉을 보며 너무나도 놀랐다.

    [세상에 이런 이웃이 어디에 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혹시 미국에서 배우 일을 하시나요? 너무 잘생기셨는데요?]

    스타탄생과 레전드 필름의 직원들은 갑자기 나타난 미남을 보며 이것저것 물어보기 바빴다.

    그렉은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짤막하게 영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직업은 의사입니다.]

    [이렌 씨의 이웃사촌이죠.]

    [만나서 반가워요.]

    그때 내 핸드폰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한국에서 빈선예가 보낸 문자였다.

    [대표님. 두 사람이 잘해 보라고 미국으로 보내 놨더니 저렇게 잘생긴 남자랑 친해지면 어쩌자는 겁니까? 지금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문자에서 빈선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피식하고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빈 팀장님.

    빈 팀장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연애.

    지금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핸드폰을 덮으며 서이렌을 쳐다봤다.

    서이렌은 어느새 부엌으로 가서 김경록이 준비한 다과를 이쪽으로 가져오고 있었다.

    서이렌을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걸어오더니 갑자기 내게 윙크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다행히 서이렌이 카메라 뒤쪽에서 걸어오고 있어서 아무도 그녀가 내게 윙크한 걸 보지 못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비밀연애를 하려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다.

    한참 동안 웃고 떠들며 연말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화면 속의 한국 분위기가 갑자기 어수선해 보였다.

    “강 이사님. 그쪽은 왜 그래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내가 묻자 강진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세강아. 이상한 기사가 떴는데?]

    “지금요? 대체 무슨 기사인데 그러세요?”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기사가 떴어.]

    생뚱맞게 중국이라니. 대체 무슨 말이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컴퓨터에 능숙한 이락이 프로그램을 조작하더니 화면을 공유해서 보여 줬다.

    화면에는 커뮤니티에 올라온 중국 기사의 사진이 떠 있었다.

    망원 렌즈로 찍은 것 같은 파파라치 사진이 떠 있었다.

    두 남녀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찍혀 있었는데. 남자가 너무나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샤오엔과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내 얼굴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트로이 촬영장 아냐?

    대체 어떻게 찍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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