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203화 (204/261)

#203화. 반전

샤오엔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키는 서이렌과 비슷한데 훨씬 마른 모습이었다.

중국 배우들이 특히 마른 걸 선호한다고 듣긴 했지만, ‘저렇게 뼈밖에 없는데 사람이 걸어 다닐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충 인사를 하고 그곳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럼, 촬영장을 마저 둘러보고 가시죠. 저는 이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나는 뒤돌아섰다.

그때 예상치도 못하게 내 귓가에 한국말이 들렸다.

“잠깐만요.”

나는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샤오엔이 내게 한걸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샤오엔입니다.”

나는 샤오엔의 인사를 받고 깜짝 놀랐다.

샤오엔이 한국어로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단지 인사였을 뿐이지만 나는 놀라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큰일이네. 나도 중국어로 인사를 해야 하나?

짜이찌엔밖에 기억이 안 나는데.

나는 당황했지만 이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한국어로 답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원세강입니다.”

샤오엔은 내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나는 너무나도 어색해서 그녀에게 잡힌 손을 잡아 빼려고 했다.

그런데 샤오엔이 내 손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는 놀라서 샤오엔을 쳐다봤다.

그녀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옆에 있는 팡닌에게 영어로 도움을 요청했다.

“팡닌 씨. 실례가 안 된다면 이분께 제 손을 좀 놔 달라고 말씀해 주시죠.”

그러자 팡닌이 웃으며 샤오엔 대신에 답했다.

“우리 샤오엔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적극적으로 표현을 하는 스타일입니다.”

“……아. 네.”

언제 봤다고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손에 잡힌 내 손을 잡아 뺐다.

“저는 제 배우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촬영장 구경 잘하고 가십시오.”

내가 진짜로 떠나려고 하자 샤오엔이 팡닌에게 눈치를 줬다.

팡닌은 재빨리 나를 붙잡았다.

“원세강 씨. 잠시만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팡닌은 내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팡닌 씨. 혹시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저는 이미 팡닌의 명함을 받았습니다.”

“이건 제 명함이 아니라 샤오엔의 명함입니다.”

“샤오엔 씨의 명함이라고요?”

“샤오엔은 아시죠? 중국이 가진 보물 같은 배우죠.”

“그런데요?”

“우리 샤오엔의 명함이라니까요. 안 받으세요?”

나는 명함을 건네는 팡닌의 손을 보며 별생각이 다 들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 불이 켜졌다.

설마? 그거인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팡닌에게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팡닌. 혹시 샤오엔 양이 말입니다.”

“말씀하세요.”

“샤오엔 씨가 한국에 진출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지난번 내 명함을 팡닌에게 건넸으니 내가 한국에서 소속사를 운영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내게 도움을 달라는 거구나.

답을 찾은 나는 편한 얼굴로 팡닌에게 말했다.

“우리 스타탄생은 중국 배우를 케어할 생각은 없지만, 합작할 수 있는 영화가 있는지 알아봐 드릴 수는 있습니다. 만약 영화를 찾으면 샤오엔 씨가 아니라 팡닌의 전화번호로 알려 드릴게요.”

팡닌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봐요. 원 대표님. 우리 샤오엔이 한국에 진출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래서 제게 명함을 주시는 거 아닌가요?”

“원 대표님. 우리 샤오엔은…….”

팡닌이 뭐라고 하려는데 내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잠시만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팡닌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확인했다.

핸드폰에는 윤조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윤조야. 나야.”

[오빠. 촬영 끝났어?]

“응. 이제 정리하고 집으로 가려고. 그런데 왜 전화를 했어?”

[내가 오빠 메일로 초대장을 보냈어. 그거 보고 연락해 줘.]

“뭔데 그래?”

[그냥 아티스틱이 매해 새해마다 파티하거든. 그 초대장이야.]

“아티스틱 주최로 여는 파티야?”

[맞아. 내가 호스트니까 꼭 와야 해.]

“그래. 알았어. 보고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나는 윤조가 메일로 보낸 초대장을 확인했다.

베벌리 힐스에 있는 저택에 와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윤조는 초대장 아래에 깨알 같은 한마디를 적어 놨다.

[오빠. 커플 파티니까. 꼭 오빠 애인도 데리고 와.]

그걸 본 나는 순간 찔려서 움찔했다.

윤조가 나와 서이렌 사이를 알고 있나?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나는 괜히 찔려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때 팡닌이 내게 물었다.

“원 대표님?”

나는 놀란 눈으로 팡닌과 샤오엔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서이렌과 함께 커플 파티에 가는 모습이 연상됐고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팡닌. 내가 일이 있어서요.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아까 팡닌에게 받은 샤오엔의 명함을 흔들며 말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중국 배우와 합작할 영화가 없는지 찾아볼게요. 그럼, 저는 이만.”

나는 빨개진 뺨을 차가운 내 손으로 식히며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갔다.

내가 사라지자 샤오엔이 당당한 얼굴로 팡닌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 말이 맞죠? 내 명함을 받아 들고 얼굴이 빨개졌잖아요.”

“역시 우리 샤오엔을 보고 사랑에 빠지지 않는 남자는 세상에 없구나.”

“난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당연한 거잖아요.”

팡닌의 눈이 가늘어지며 은근한 미소로 샤오엔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요? 조만간 연락이 올 거니까 기다려야죠.”

“정말로 한국인과 사귀려고?”

“내 이상형의 남자라니까요. 그리고 웨이 선배님도 한국인 감독이랑 결혼하셨잖아요. 나라고 못 할 것도 없죠.”

“아이고. 우리 공주님께서 그 원세강이라는 사람한테 푹 빠졌구나.”

팡닌은 평소에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샤오엔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것을 보며 웃었다.

* * *

트로이 제3구역에 불이 켜졌다.

감독을 포함해 단 세 명의 스태프와 함께 아무도 모르게 영화 촬영이 시작됐다.

조종실을 장악한 토니는 그와 사사건건 대치했던 에릭과 함께 내내 그의 심기를 거슬렸던 루나까지 함께 딸려서 2구역에 보냈다.

토니가 조종실을 장악하며 다이안과 로렌스는 기계실에 감금했기에 그들은 에릭과 루나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디오티마 시스템까지 꺼 버린 토니는 에릭과 루나에게 직접 명령을 전달했다.

[부함장은 지금 즉시 1구역으로 가게. 그곳으로 가면 내가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는 마스터키를 전달하겠네. 시스템에 접속해서 1구역을 수동으로 분리하고 돌아오는 것이 자네의 임무일세.]

“이제 연극은 그만하시죠. 이 미치광이 함장 나리.”

[계속 그렇게 떠들 거면 부함장 쪽 마이크는 꺼 버릴 걸세.]

“이봐요. 토니. 그렇게 함장이 되고 싶다면 함장이라고 불러 드리죠.”

[난 자네가 부르든 말든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함장이야.]

“그렇다고 칩시다. 이제 함장이라고 꼬박꼬박 불러 드릴 테니 제발 루나는 돌려보냅시다. 나 혼자 갈게요.”

[시끄럽군. 마이크를 끊겠네.]

“이봐요, 함장님! 함장님!”

에릭이 사정했지만 이내 헬멧에 조종실과 연결된 마이크가 꺼졌다는 표시등이 켜졌다.

“우습군. 이게 무슨 연극이야? 이딴 연극을 한 번만 더 하다간 제 명에 못 살겠어.”

조종실과의 통신이 끊긴 에릭은 씁쓸하게 웃으며 루나를 쳐다봤다.

루나는 승객에게 선물 받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디오티마에서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파티를 보내려고 입은 옷이다.

에릭은 불안한 눈빛을 숨기며 대범하게 말했다.

“루나. 내가 지구에서 뭘 했는지 알지?”

“배관공?”

“맞아. 배관공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못 고치는 게 없었어. 그러니까 루나는 걱정하지 말고 나만 따라와. 그럼,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걱정 안 해요.”

“네 무표정한 얼굴이 항상 불만이었는데. 이럴 때는 좋네. 정말로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빨리 출발해요, 에릭. 빨리 1구역을 디오티마에서 분리해야 해요. 지체하다간 우주 왕복선 전체가 위험해집니다.”

“알았어, 루나. 그런데 그 옷을 입고 갈 건 아니지? 방호복으로 갈아입어야 해.”

“알았어요.”

루나는 지체하지 않고 드레스를 벗었다.

놀란 에릭이 눈을 감고 뒤돌아섰다.

“루나. 말 좀 하고 행동해.”

“다 갈아입었어요.”

루나가 먼저 앞장서자 에릭이 그녀의 곁에 따라붙었다.

에릭은 루나와 함께 2구역을 지나 드디어 1구역 입구 앞에 도착했다.

2구역에 들어서자마자 시작된 방사능 경고 알람은 1구역에 가까이 갈수록 더욱 거세게 울렸다.

에릭이 1구역의 문을 열려는 루나의 팔을 잡았다.

“루나. 넌 들어갈 필요 없어. 나 혼자 안에 들어갈게. 너는 다시 돌아가.”

“에릭.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오는 건 알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1구역의 방화벽을 열고 시스템에 접속하려면 부서진 엔진 근처로 가야 합니다. 우리가 시스템을 리부팅하면 조종실에서 곧바로 분리 절차를 밟겠지요. 그럼, 곧바로 1구역이 완전히 폐쇄되면서 아무도 그곳을 빠져나갈 수가 없어요. 에릭은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에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토니가 자신을 기다려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예상했다.

“까짓 영웅으로 죽는 거지. 너는 꼭 살아서 내 이름이 세상에 길이길이 기억될 영웅으로 남는지 봐줘. 토니 그 개자식이 내 공로를 가로채기만 해 봐. 죽은 다음 우주 귀신이 돼서라도 쫓아다닐 테니까 말이야.”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되잖아요.”

“디오티마에 탑승한 이천 명을 다 죽이라고? 그럴 순 없어. 토니가 아니라도 내가 하려고 했어. 그러니까 나 혼자 들어갈게. 넌 여기에 남아.”

“거짓말쟁이. 말은 그렇게 해도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요.”

“무슨 소리야? 내 심장이 어떻다고 그래?”

“1구역에는 내가 들어갈 겁니다.”

“네가 들어가서 뭘 한다고 그래. 내가 갈게.”

“에릭, 당신은 당장 2구역을 탈출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너 혼자 두고 도망칠 거 같아?”

“나는 안 죽어요. 걱정하지 마요.”

“나보고는 못 돌아오니까 가지 말라며? 너는 왜 들어가겠다는 거야? 지금 저 경보 소리가 안 들려? 방호복을 입었어도 1구역에서 24시간 이상 머물면 사망이야. 디오티마에서 떨어져서 우주 공간을 하루나 더 떠돌다 천천히 죽게 될 거라고.”

“알아요.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아요.”

“루나. 대체 왜 이래?”

루나는 천천히 팔을 들었다.

에릭은 루나가 뭘 하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에릭의 눈에 루나의 손에 나온 작은 바늘이 보였다.

“……루나?”

루나는 그대로 손으로 에릭의 목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성 물질이 에릭의 목에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에릭은 깜짝 놀랐으나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에릭은 이제 십 분간 움직일 수 없어요. 여기서 편히 쉬어요.”

루나는 쓰러지려는 에릭을 붙잡고 벽에 기대 앉혔다.

에릭은 온몸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루…… 루…… 나.”

에릭은 움직이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며 루나의 이름을 불렀다.

루나는 입고 있던 방호복을 벗어 던지고 에릭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에릭은 루나의 몸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까는 급하게 얼굴을 돌리느라 보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그녀의 어깨에 작은 표식이 있었다.

3,177이라고 찍힌 표식을 본 에릭의 눈이 커졌다.

“……루…… 나.”

에릭은 1구역으로 들어가는 루나를 있는 힘껏 불렀지만 들리지 않았다.

드디어 1구역의 문이 닫히며 루나가 담담히 말했다.

“모델 넘버 3,177. 디오티마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이제부터 명령이 아닌 자의에 의해 동작하겠습니다. 마스터 시스템 권한에 접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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