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위기의 디오티마(2)
지수연이 한지욱을 찾아 대표실로 들어갔다.
한지욱은 대탈출의 개봉과 미미한 성적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지수연은 한지욱이 똥 씹은 얼굴을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대본을 내밀었다.
“저 이거 할래요.”
한지욱은 대본을 힐끔 쳐다보더니 얼굴을 구겼다.
대본의 앞장에 크게 ‘레전드 필름’이라고 적혀 있던 것이다.
대본은 이번에 레전드 필름의 공모전에서 당선된 ‘다락방’이라는 작품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일선으로 돌아온 진설은 다락방의 제작과 감독을 그녀가 운영하는 재단 ‘키노’에서 발탁한 인재로 채웠다.
한마디로 저예산 영화라는 뜻이었다.
한지욱은 갑자기 저예산, 작가주의 영화를 하겠다고 나선 지수연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이봐요. 지수연 배우님. 대본은 제대로 읽어 본 거 맞습니까?”
“대본을 읽지도 않고 하겠다고 할까요?”
“저도 기사를 봐서 압니다. 이 영화는 레전드 필름에서 하는 저예산 영화잖습니까?”
“그래서요? 그게 왜요?”
“내가 지수연 배우를 잘 알고 있는데. 갑자기 방향을 틀어도 너무 튼 거 아닌가요? 지금까지 흥행만 따져 가며 작품 활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영화 대본을 들고 온 겁니까?”
“저는 이런 영화를 하면 안 되나요?”
“해 봤자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거죠.”
“내 커리어예요. 난 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매니저한테 도장 찍을 거라고 할 거예요.”
“내년에 KBC 미니시리즈에 들어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작품을 한다는 이유가 뭡니까?”
“누가 KBC 미니시리즈 한다고 했어요? 사람들이 나보고 KBC에만 출연하냐고 묻더라고요.”
“다 지수연 배우를 질투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은 하나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남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지. 암튼, 나는 이 작품 할 거예요. 대탈출이 개봉해서 바쁘신 거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지수연은 한지욱의 말을 듣지도 않고 쌩하니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저게 지금 사람 놀리는 거야? 뭐야?”
한지욱은 들고 있던 대본을 집어 던졌다.
“아.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딴 영화를 하겠다는 거야?”
한지욱은 인터넷 포털에 접속했다.
페이지에 접속하자마자 메인 페이지에 연예계 기사가 보였다.
[블랙 마치 개봉하자마자 200만 돌파]
[국산 좀비 세계를 강타하다. 블랙 마치 역대급 금액으로 해외 판권 판매 중]
한지욱은 미간을 구기며 포털에서 ‘레전드 필름, 다락방’이라고 검색하고 엔터키를 눌렀다.
검색 창의 제일 위에 눈에 띄는 기사가 보였다.
[박선호. 진설이 제작하는 인디 영화 ‘다락방’에 전격 캐스팅]
* * *
함장 없이 항해를 시작한 지, 이틀 만에 디오티마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승객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벌이던 승무원들은 갑자기 불어닥친 지자기폭풍(Geomagnetic storm)에 놀라 파티를 멈추고 조종실로 달려왔다.
지자기폭풍의 영향으로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시스템이 불안해졌고, 급기야 인공지능 시스템 디오티마가 셧다운 됐다.
진짜 승무원들이 아닌 배우들은 이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이안은 당황한 배우들을 안심시켰다.
“시스템은 조만간 다시 켜질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다이안이 직접 왕복선을 몰 수는 없나요?”
“난 엔진이랑 본체 설계에만 관여 있을 뿐이에요. 우주 왕복선의 조종은 다른 문제예요.”
“이대로 우주 미아가 되는 건 아니겠죠?”
“운항 시스템은 디오티마가 없어도 그대로 동작해요. 걱정하지 말아요.”
에릭은 승객들의 반응을 먼저 살폈다.
지자기폭풍이 처음 불었을 때 잠깐 전력 공급이 잠시 끊겼기 때문에 승객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다이안. 내가 안내 방송을 하려고 하는데 나를 도와줄 수 있나요?”
“안내 방송이요?”
“승객들이 불안해할까 봐서요. 도와줄 수 있어요?”
“조종실 어딘가에 수동으로 방송을 내보낼 수 있는 장비가 있을 텐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잘 몰라요.”
다이안은 디오티마에게만 모든 것을 맡겼기에 어떤 장비를 건드려야 할지 몰랐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내가 당장 항해 매뉴얼을 찾아볼게요.”
다이안은 무려 삼천 페이지나 되는 우주 왕복선의 매뉴얼을 모니터에 띄웠다.
그때 루나가 다가오더니 계기판을 만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루나?”
“외부에 설치된 카메라를 끄는 겁니다. 아직도 밖에는 지자기폭풍이 불고 있어요. 승객들이 그걸 보고 동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루나는 계기판 앞으로 다가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눌렀다.
에릭은 루나가 어떻게 카메라를 끄는 버튼을 알았는지 궁금했으나 지금 그걸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에릭과 다이안은 놀란 얼굴로 루나를 바라봤다.
“루나. 네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지구에서 모델 일을 했다고 하지 않았어?”
루나는 여전히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조종실의 메인 모니터가 번쩍이더니 시스템이 부팅되는 소리가 들렸다.
“디오티마가 돌아왔어.”
[제가 돌아왔습니다.]
“디오티마. 밖의 상황은 어때? 폭풍은 지나갔어?”
[다이안. 아무래도 1에서 5구역을 모두 폐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디오티마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디오티마 그게 무슨 소리야? 우주 왕복선의 반을 폐쇄하다니?”
[처음 지자기폭풍이 디오티마를 덮쳤을 때 1구역의 엔진에 손상이 갔습니다. 지금 당장 승객들을 다른 구역으로 옮기고 폐쇄해야 합니다. 사이드 엔진에서 지금 방사성 물질이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엔진이 망가졌다고? 말도 안 돼. 구역을 폐쇄하면 엔진은 어떻게 수리해?”
[수리 로봇을 보내야죠. 에릭. 함장이 공석이니 당신이 승객들에게 공표하세요. 당장 1구역에 있는 승객들을 대피 시켜야 합니다.]
“나 보고 하라고?”
[당신이 함장 대리니까요.]
에릭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에릭의 뒤로 다가온 루나가 그를 슬쩍 밀었다.
앞으로 떠밀려간 에릭이 선 곳은 함장석이었다.
“디오티마.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승객들한테 뭐라고 말해?”
다이안은 곧바로 의자에 앉더니 에릭이 말할 대사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에릭. 내가 대사를 써 줄게. 그대로 읊기만 해.”
다이안이 타이핑한 대사를 디오티마는 조종실의 허공에 띄웠다.
루나는 로렌스의 손을 잡더니 에릭의 뒤에 가서 나란히 섰다.
로렌스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이내 루나의 뜻을 알고 당황한 기색을 얼굴에서 지웠다.
디오티마는 곧바로 에릭의 모습을 전 승객이 볼 수 있도록 했다.
감독의 레디 액션 사인이 시작된 것이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에릭의 눈빛이 돌변했다.
에릭은 제복을 고쳐 입고 앞으로 나서더니 단호하고 안정적인 말투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저는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함장 대리를 맡은 부함장입니다.”
* * *
함장실에 구금되어 있던 토니 역시 함장 대행으로 발표하는 에릭의 방송을 자신의 방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우주 왕복선은 안전합니다. 하지만 저는 함장 대행의 권한으로 1구역부터 5구역을 임시로 폐쇄하려고 합니다.
사이드 엔진이 수리될 때까지 승객들은 안전하게 다른 구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디오티마는 안전합니다.
지금부터 1구역의 승객들부터 차례차례 센트럴로 이동하게 될 겁니다. 승객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승객들의 방문은 수동으로 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안내 로봇이 방문하면 자동으로 열릴 테니 각자의 방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의자에서 일어난 토니는 벽에 걸려 있는 함장 제복과 모자를 챙겼다.
“함장인 내가 없으니 이 사달이 나는군.”
함장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토니는 문 앞에 섰다.
굳게 잠긴 문을 노려보는 토니.
그리고 이내 문이 열리며 안내 로봇이 들어왔다.
“1,863번 승객. 토니 첸. 맞습니까?”
“…….”
“1,863번 승객은 지금 당장 저와 함께 센트럴로 이동합니다.”
“나는 1,863번 승객이 아니야.”
“승객님?”
“나를 함장이라고 불러.”
* * *
나는 지금 대니 라모로의 사무실에 와 있다.
“대니. 그러니까 내일 그 장면을 촬영한다는 거죠?”
“문 씨어터의 평소 촬영장이 아닌 제3 촬영장에서 촬영할 겁니다.”
“보안이 철저하네요.”
“스태프는 촬영 감독님인 빈센트와 저. 단둘뿐이고요. 분장팀은 서이렌 씨 스태프를 빌렸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죠. 미하엘이 실력이 뛰어납니다. 문제없을 겁니다.”
어제까지 영화의 클라이맥스 촬영이 모두 끝났다.
이제 엔딩 장면만 찍으면 모든 촬영이 끝난다.
사이드 엔진의 과부하로 생각보다 많은 방사선이 방출되자 디오티마는 우주 왕복선에서 1구역을 완전히 분리할 계획을 세운다.
1구역은 우주 왕복선에서 분리되어 우주를 떠돌게 된다.
문제는 계속되는 지자기폭풍으로 시스템이 오류를 일으켜 1구역이 디오티마의 시스템과 리모트 연결이 끊겼다는 점이다.
로봇을 보낼 수 없는 극한의 위기 상황 속에서 결국 가짜 승무원들이 나서기로 한다.
그때 격리에서 풀린 토니가 조종실에 난입한다.
지구에서 들고 왔던 총을 가지고 나타난 토니는 조종실을 장악하자마자 디오티마 시스템을 셧다운 시키고 에릭을 홀로 1구역으로 보낸다.
1구역에 간 에릭은 결국 수동으로 분리 장치를 동작시킨다.
1구역의 완전한 폐쇄와 분리까지 남은 시간은 단 십 분.
에릭은 정신병이 도진 토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결국 안전하게 1구역을 탈출해서 조종실에 복귀하며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끝난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반전이 숨겨진 진짜 대본이 들려 있다.
대니 라모로 감독이 일어서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원세강 대표님.”
“저도 내일 참관할 수 있을까요?”
“아뇨. 그건 안 되죠. 워낙에 기밀 사항이라서요.”
“알겠습니다. 저는 내일 제3 촬영장까지 안전하게 우리 이렌 씨를 모셔다드리는 역까지만 하겠습니다.”
* * *
대니 라모로의 사무실에서 나온 나는 전화를 하며 서이렌이 있는 트레일러까지 걸어갔다.
“미하엘이 내일 촬영에 참여하는 다른 배우들도 함께 봐줘야 해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는데요?]
“이거 하나만 당부할게요. 내일 촬영은 일급기밀입니다. 내일 어디로 무슨 일을 하러 가는지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이래 봬도 입이 무겁다고요.]
“그래요?”
[그럼요. 원세강 씨랑 서이렌 씨가 연인 사이라는 것도 비밀로 하고 있는걸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지금 장난해요? 그걸 어떻게 몰라요? 나도 눈이 달렸다고요.]
“혹시 표가 많이 났나요?”
[참나. 촬영장에서 그렇게 진상 커플 짓을 해놓고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트로이 촬영장에는 파파라치가 못 들어오니까 망정이지. 밖에서 그러고 다녔으면 당장에 사진이 찍혔을 겁니다.]
나도 트로이 촬영장이라서 안심하고 편하게 행동한 건 있었지만 이렇게 다 표가 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앞으로 조심해야겠네요.”
[그런데 부인은 하지 않으시네요.]
“진짜로 사귀는 거 맞거든요.”
[너무 보기 좋은 커플이라 뭐라고 욕을 할 수도 없고. 암튼 두 사람은 계속 그렇게 예쁜 사랑 하세요. 예쁘고 잘생긴 선남선녀 커플이라서 너무 보기에 좋아요.]
“내 연애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스케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데로 이야기가 흘렀네요.”
[하하하. 그러게요. 암튼,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꼭꼭 숨기고 올 테니 내일 봐요.]
“그래요. 내일 봐요. 마하엘.”
나는 전화를 끊으며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큰일이다.
미국에서 이렇게 표를 내고 다녔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이러고 다니면 안 되는데.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혔지만 나는 진짜로 국민 역적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야 시한부 인생에서 벗어났는데 전 국민에게 죽일 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책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팡닌?”
“역시 저를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팡닌이 여긴 웬일이에요? 촬영은 지난주에 끝났잖아요.”
“우리 배우님이 트로이 촬영장을 꼼꼼하게 못 봤다고 해서요.”
팡닌은 말을 하며 은근슬쩍 옆에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인형같이 귀엽게 생긴 여자가 나를 보며 새침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