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9화 (200/261)
  • #199화. 기적의 이유

    나는 놀라서 가슴을 두 손으로 가렸다.

    하지만 내 몸을 뚫고 쏟아지는 빛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렉!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검증을 하려는 겁니다.”

    “무슨 검증이요?”

    “내 추론이 맞는지 확인하는 검증이죠.”

    그렉은 말을 마치자마자 기계를 움직여 X선의 위치를 조정했다.

    X선이 내 복부 쪽을 향하자 마치 영화처럼 침실 벽을 빛내던 보라색 빛이 사라졌다.

    “검증은 끝났군요.”

    그렉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분광계를 껐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렉을 쳐다봤다.

    그렉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방안을 감싸던 보랏빛 이제 사라졌지만,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내 다시 서이렌을 돌아봤다.

    당신, 대체 내 심장에 뭘 한 거야?

    어느새 내 곁으로 걸어온 그렉이 미묘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제야 기적의 이유가 밝혀진 것 같네요.”

    “…….”

    “표정을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나 보군요.”

    나는 그렉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과거를 떠올렸다.

    서이렌은 얀 필립이 옥션에서 샀던 두 동강 난 마네킹의 심장을 선물로 받았다.

    내가 미국에서 쓰러졌을 때, 그때 내게 심장을 준 건가?

    그렇다면 아샤가 살아 움직이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어.

    모든 것이 이해된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나는 셀 수 없는 기적의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완벽한 배우를 꿈꾸던 내가 서이렌과 재회한 일도 그렇고.

    치료할 수 없다는 불치병이 차도를 보인 것도 그렇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게 기적이 찾아온 게 아니었다.

    서이렌 당신이었어.

    모든 게 당신 때문이었어.

    * * *

    경주 톨 게이트로 커다란 밴 차량이 진입하고 있다.

    경주에 들어서자 지수연은 자신의 화장과 의상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코디는 몇 번이나 얼굴을 확인하는 지수연을 보며 고개를 불안해했다.

    “배우님. 의상과 화장이 마음에 안 들어요?”

    “그냥 본 거예요. 보지도 못해요?”

    “큰 행사도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그냥 홍보대사로 참여한 경주 엑스포 개막식이잖아요. 기자도 안 왔을 텐데요.”

    “내 맘이에요.”

    지수연이 차갑게 말하자 코디는 입을 다물었다.

    운전석에 있던 로드 매니저가 지수연에게 물었다.

    “이따 저녁에 대탈출의 VIP 시사회에 참석해야 하시는 건 아시죠? 오늘 개막식은 얼굴만 비추고 바로 서울로 떠나야 합니다.”

    “알아요. 그만 좀 말해요. 귀에 딱지가 앉겠어요.”

    “그냥 걱정돼서 그러죠. 원래는 이런 행사는 참여 안 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대체 왜 마음을 바꾸신 겁니까?”

    “내가 홍보대사인데. 개막식에 빠지면 되겠어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주최 측에서도 꼭 와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매니저는 갑자기 마음을 바꾼 지수연을 보며 까탈스럽다고 느꼈다.

    “그런데 오늘 개막식에 다른 홍보대사들도 참석하는 거 맞죠?”

    “임준학 배우님은 확실히 참석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박선호 배우님은 잘 모르겠네요. 얼마 전에 부친상을 치르셔서 오늘 이곳까지 오실 경황이 있나 모르겠어요.”

    매니저의 말에 지수연의 표정이 굳었다.

    코디와 매니저는 그런 지수연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오빠. 박선호 배우님 대단하지 않아요? 연예계 금수저 출신인데 그걸 꼭꼭 숨기고 활동했잖아요.”

    “나도 그때 장례식장에 가서 다른 매니저들한테 들었는데. 박선호가 상주로 있는 거 보고 배우들뿐만 아니라 기자들도 엄청나게 놀랐대. 진짜로 아무에게도 말 안 하고 배우가 된 건가 봐.”

    “대단해요. 그 화려한 뒷배경을 버리고 단역부터 시작했다는데. 스타메이커에서는 준우승도 하고. 구원의 밤도 오디션 봐서 붙었다잖아요.”

    “내가 박선호였으면 시작부터 내 엄마가 진설이다. 내 아빠는 박찬영 감독이다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먼저 싣고 데뷔할 텐데 말이야.”

    “그러니까 오빠는 안 되는 거예요. 박선호 배우님처럼 자기 힘으로 성공하고 나중에 배경이 밝혀지는 게 더 드라마틱하죠.”

    “그런가? 하하하.”

    매니저와 코디의 대화를 듣던 지수연은 처음에는 박선호의 칭찬을 듣는 게 기분이 좋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두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그럼, 우리 아빠가 드라마 국장인 걸 밝히고 활동하는 나는 별로란 말이에요?”

    지수연의 한마디에 웃고 떠들던 매니저와 코디는 입을 닫았다.

    지수연은 삐진 채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도착하면 깨워요.”

    “예. 배우님.”

    지수연이 눈을 감자 매니저와 코디는 눈으로 쌍욕을 했다.

    ‘아버지 빽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게 찔리긴 하나 보지?’

    * * *

    그렉은 이렇게 가까이서 서이렌의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미동도 없이 잠에 빠진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렉은 서이렌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 하늘의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처음에 공항에서 봤을 때도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랐지만 이렇게 그녀의 정체를 알고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원세강은 화재로 인한 촬영 일정 연기 때문에 트로이 영화사에 갔다.

    그렉은 이곳을 홀로 지키며 내내 서이렌에게 대해 생각했다.

    “세이렌 마네킹을 다시 보게 되다니.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군.”

    그는 세이렌 마네킹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완성된 마네킹은 곧바로 아버지, 장 루이의 작업실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두 개의 마네킹이 기억에 남았다.

    보석 디자이너였던 어머니가 세이렌 마네킹에 넣을 심장을 그에게 보여 줬던 일도 기억이 난다.

    영롱한 보라색 보석이 마네킹의 심장에 들어가는 걸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그리고는 기억에 없다.

    얼마 후, 어머니는 출장을 가셨다가 비행기 사고가 나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그날 이후 일에 매진하느라 그렉을 돌보지 않았다.

    그렉은 기숙 학교로 보내졌고 아버지와는 담을 쌓은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머리가 비상했던 그는 곧 월반해서 남들보다 일찍 학교를 졸업했고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 일이 손에 꼽을 정도다.

    장 루이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였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불행했던 가족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그렉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만 생각하자. 다 의미 없다.”

    슬픈 기억을 떨쳐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서이렌의 까맣고 긴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렉은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이렌은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그녀의 백옥 같은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렉은 그녀의 미간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가 살짝 눌렀다.

    찡그리고 있던 서이렌의 얼굴이 점차 편안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렉이 손을 떼자 서이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드디어 그녀가 눈을 떴다.

    잠깐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했던 서이렌.

    이내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아왔고 유리알 같았던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

    그렉은 이 모든 것이 생경했다.

    제페토 영감이 피노키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깨어나서 침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이렌은 그렉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었다.

    “나 좀 일으켜 줘요.”

    그렉은 침대로 가서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는 서이렌이 앉아 있는 게 힘들까 봐 고심한 뒤, 물었다.

    “내가 이렇게 뒤에서 안고 있어 줄까요?”

    “내가 병자로 보여요? 쿠션이나 가져다줘요. 나 혼자 앉아 있을 테니까.”

    “죽다 살아난 것치고는 까칠하시네요.”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네요. 그런데 안 가세요? 쿠션이요.”

    “알았어요. 기다려요.”

    그렉은 이 와중에 농담하는 서이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쿠션을 가져다주자 서이렌은 그것에 기대 편히 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죠?”

    “열여섯 시간 정도요?”

    그녀는 그렉이 보고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갈아입은 옷의 단추를 풀더니 그녀의 가슴을 확인했다.

    깊어 보이던 상처는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이봐요. 서이렌 씨. 나는 안 보이나요? 그렇게 옷을 훌렁훌렁 벗으면 어떻게 합니까?”

    “지금 웃으라고 하는 말인가요? 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잖아요. 당신은 나를 인간이 아니라 마네킹으로만 볼 텐데 무슨 상관이에요?”

    “…….”

    그렉은 대답하지 않은 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렌 씨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요?”

    “공항에서 처음 그렉을 봤을 때부터 알았어요. 그때 그 꼬마구나. 장의 아들, 그렉.”

    “나만 기억하지 못한 거였군요.”

    서이렌은 단추를 잠그고 옷을 정리했다.

    “대표님께는 뭐라고 했어요?”

    “뭘 말이죠?”

    “내 몸의 상태가 어떻다고 했어요?”

    “서이렌 씨가 마네킹이라는 사실을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뭘 말해 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요. 치료도 전혀 못 했죠. 인간의 치료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난 가만 놔두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돼요.”

    서이렌은 이 말을 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치유 속도가 점점 길어지긴 하네. 열여섯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다니.’

    서이렌은 이내 고개를 들고 그렉에게 말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요.”

    “뭘요?”

    “내가 왜 살아 움직이는지? 그런 거요.”

    “그건 서이렌 씨도 설명하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나도 내가 왜 생명을 갖게 된 건지 이유를 몰라요. 다만 내 가슴 속에 있는 심장이 그 이유일 거라고 추측하는 거죠.”

    그렉의 시선이 서이렌의 심장으로 향했다.

    원세강과 서이렌. 두 사람이 테티스의 심장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서이렌은 시계를 보더니 그렉에게 물었다.

    “대표님은 혹시 영화사에 가셨나요?”

    “촬영 일정이 조정된다고 하더군요. 꼭 참석해야 하는 회의라서 고민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갔어요.”

    서이렌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대표님한테는 내가 완전히 나았다고 하세요.”

    “보기에는 다 나은 거 같아 보이긴 하네요. 그래도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삼 년 전에도 쓰러졌었다면서요?”

    “내가 잠든 사이에 그런 말도 하셨어요? 두 분이 친해지셨나 보네요.”

    “환자에 관한 이야기인데 의사인 내가 알아야죠.”

    “그래서 말인데. 그렉은 우리 대표님의 주치의시잖아요.”

    “그렇죠. 임시긴 하지만.”

    “나도 같이 맡아 줘요.”

    “이렌 씨를요?”

    “그렉이 나를 챙겨 줘야 대표님이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나도 내 정체를 아는 그렉이 편하기도 하고요.”

    “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원세강 대표가 걱정할까 봐 인가요?”

    “어차피 휴직했다면서요. 내 주치의가 돼서 나를 좀 보호해 줘요.”

    “올 연말까지만 휴직하기로 했었는데요?”

    그렉은 이미 길게 휴가를 쓸 생각이었지만 이상하게 그걸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안 되는데요. 약속을 지켜야죠.”

    “무슨 약속을 지키라는 거죠?”

    “그때 내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울면서 그랬잖아요. 영원히 나를 지켜 주겠다고요. 기억 안 나요?”

    그렉은 떠오르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 안 나는 척하지 말아요. 그때 그렉이 장의 작업실에서 장난감 총을 가지고 놀다가 내 손가락 부러뜨렸잖아요. 난 다 기억해요.”

    서이렌의 말을 들은 그렉은 화들짝 놀랐다.

    가장 오래된 유년 시절의 기억 속에 비슷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 기억 속의 여자가 서이렌 씨였어요?”

    그렉은 아주 어릴 때 누군가를 다치게 했던 적이 있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린 마음에 의사가 돼서 고쳐 주겠다고 울면서 말했던 기억이 난다.

    “당신을 내 주치의로 임명합니다. 거절은 사양이에요.”

    “이렌 씨.”

    “내 곁에서 나를 보호해 줘요.”

    * * *

    야외에서 열리는 개막식이라서 그런지 따로 변변한 대기실도 없었다.

    지수연은 천막으로 만든 간이 대기실에 들어서며 긴장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박선호가 보이지 않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이힐을 신고 있는데 짜증 나네. 왜 흙바닥이야?”

    푹푹 박히는 바닥 때문에 지수연은 걷기가 힘들었다.

    코디와 매니저는 지수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당장 의자를 구해 왔다.

    “여기 앉으세요. 배우님.”

    “하이힐에 흙 묻은 거 안보여요? 당장 바닥에 깔 것도 가져와요.”

    “예. 배우님.”

    먼저 와서 대기 중이던 임준학 일행은 지수연의 그런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임지형이 임준학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쟤는 또 저러네. 와. 캐릭터가 일관성이 있어서 좋겠다.”

    지수연의 매니저는 바닥에 깔 것을 찾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며 대기실을 헤맸다.

    그때였다.

    천막이 열리며 누군가 그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살이 빠져서 한껏 청초해진 모습의 박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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