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8화 (199/261)

#198화. 아버지의 마네킹, 어머니의 보석

세이렌 마네킹.

그렉은 그 단어를 듣자마자 정신이 아찔해져 왔다.

아주 오랜 옛날이지만 세이렌 마네킹은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세강.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서이렌이 그 세이렌 마네킹입니다.”

“뭔가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서이렌은 살아 숨 쉬는 사람입니다. 마네킹이 아니라고요.”

역시 그렉은 서이렌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서이렌과 마네킹을 연관 짓지 못하는 그를 보며 서이렌을 뒤에서 안아 들었다.

내가 안아도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인형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이렌 씨.

창피해도 조금만 참아요.

나는 서이렌의 가슴팍을 열고 그녀의 상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내가 손으로 상처를 벌리자 서이렌의 몸속에서 신비로운 보라색 빛이 새어 나왔다.

뒷걸음질 치던 그렉은 그 자리에 멈추고 트레일러 안을 황홀하게 비추는 보라색 빛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장 루이는 당시에 세이렌 마네킹을 만들면서 마네킹에 보석으로 만든 심장을 넣었어요. 이게 바로 세이렌의 심장입니다.”

그렉은 조금씩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서이렌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렉은 무릎을 굽혀 서이렌에게 가까이 갔다.

나는 상처를 열어 서이렌의 심장을 그에게 보여 줬다.

그렉의 손이 이끌리듯 서이렌의 심장으로 향했다.

“테티스(Tethis)의 심장.”

그의 손으로 신비로운 보라색 빛이 투과되어 사라졌다.

심장을 본인 눈으로 확인한 그렉은 힘없이 손을 내려놨다.

“하.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그렉은 허탈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세이렌 마네킹이 확실하군요.”

“이제야 믿으시는 겁니까?”

“서이렌 씨의 심장 말입니다. 저건 테티스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보석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가지고 계시던 겁니다.”

“어머니라고요?”

“어머니는 보석 디자이너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가 만든 보석을 세이렌 마네킹의 심장에 넣으셨죠.”

서이렌의 심장을 그렉의 어머니가 만든 거라니.

나는 너무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그렉은 의자를 가져와 가까이에 앉았다.

나는 그사이 서이렌의 옷깃을 여미고 자리에 눕혔다.

“제가 알기로 아버지가 만든 세이렌 마네킹은 총 열 개였어요. 그 열 개에 모두 어머니가 만든 보석이 들어갔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만든 두 개에만 좀 더 특별한 보석이 들어갔죠.”

“그게 방금 말씀하신 테티스의 심장인가요?”

“맞습니다. 테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타늄의 여신이죠. 또한 토성의 위성의 이름이기도 해요. 어머니는 니켈드라운이라는 토성에서 온 운석의 추출물로 테티스의 심장을 만드셨어요. 그래서 방금 본 것처럼 눈이 멀 것 같은 선명한 보라색을 띠는 거죠.”

“운석이라면 별똥별이라는 건가요?”

“그런 셈이죠. 어머니의 보석을 다시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물론 마네킹도요.”

나는 서이렌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의 이름을 들으면 기뻐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마네킹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상처는 또 뭔가요?”

“아까 촬영장 천장에서 석고보드가 떨어졌어요. 이렌 씨는 그걸 피하려다가 바닥을 굴렀고요.”

“그때 난 상처라는 겁니까? 그렇다고 이렇게 의식 불명 상태까지 가는 건 이상합니다. 당장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죠.”

나는 일어서는 그렉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렌 씨를 데리고 병원에 가라고요? 어떻게요? 미국의 의사들에게 테티스의 심장이라는 보석을 자랑이라도 할까요?”

그렉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실수를 했군요.”

“삼 년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어요. 그때도 이렇게 가슴에 상처가 났고 심장 안의 보석이 보였죠.”

“그때는 어떻게 치료하신 건가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몇 분도 안 돼서 상처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보시다시피요.”

그렉은 서이렌에게 다가가 내가 여며 놨던 옷을 풀었다.

상처를 살피던 그렉의 동공이 커졌다.

길게 뻗어 있던 상처가 아주 조금씩이긴 하지만 줄어들고 있었다.

“오늘 제가 본 모든 일이 제가 의사란 사실을 잊게 만드는군요.”

“상처가 낫고는 있지만, 너무 더딥니다.”

“걱정되나요?”

“그럼요. 사람이 이렇게 누워 있는데 당연히 걱정되죠.”

나는 서이렌의 옷을 여며 주고 이불을 목까지 올렸다.

그녀의 눈 아래에 눈물 자국이 살짝 보였다.

아까 화재를 보고 놀라서 울었나 보다.

나는 화장실로 가서 수건을 따뜻한 물에 적셔 왔다.

돌아와 보니 그렉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젠셀 연구실에 좀 다녀올게요. 우선 내 아파트로 가 있어요.”

“알았어요.”

“혼자 할 수 있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서이렌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 있던 그녀의 두 뺨에도 조금씩 붉은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런데 그렉. 혹시 연구실에 우리 이렌 씨에게 필요한 약이 있을까요?”

“글쎄요. 뭐가 됐든 도움이 될 만한 건 다 가져올게요.”

그렉이 밖으로 나갔고 나는 서이렌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는 서이렌에게 다가가 그녀의 얼굴과 손을 수건으로 닦아 줬다.

아까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그녀의 손은 점차 온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서이렌만 생각하면 항상 든든했다.

재능이 넘치며 세상 앞에 당당하게 나서는 걸 좋아하던 그녀였다.

그녀가 이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걸 왜 나는 잊고 있었던 걸까?

나는 항상 내가 죽는 것만 고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가 내 곁을 떠날 거라고 의심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그녀는 당장이라도 물방울로 변해 내 곁에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내 뺨을 타고 그녀의 손목 위로 흘러내렸다.

* * *

오랜만에 젠셀의 연구실에 나타난 그렉을 보며 연구소 직원들이 놀랐다.

“올해 말까지 푹 쉬신다고 하셨잖아요. 절대로 연구실에는 안 오실 것처럼 하더니 무슨 바람이 불었나요?”

그렉은 다급하게 연구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언제나 얼음처럼 차갑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렉의 당황한 모습을 처음 보는 직원들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그렉. 괜찮아요? 대체 뭘 그렇게 찾고 있는 겁니까?”

비품실을 나온 그렉은 연구소 직원을 붙잡고 물었다.

“제이슨. 연구실에 X-선 형광 분광계가 있지 않았어?”

“X-선 형광 분광계가 왜 우리 연구실에 있어요? 그건 광석 같은 걸 분석할 때나 쓰는 거잖아요.”

제이슨이라는 연구소 직원은 전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티나라는 직원이 그렉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있어요. 2년 전에 제2 연구소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순간 그렉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렉이 이렇게까지 환하게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티나는 모든 것이 어색했다.

“제2 연구소에 있다는 거지?”

“예. 거기 비품실에 있을 겁니다.”

“알았어. 고마워 티나.”

그렉은 다급하게 연구실 바깥으로 내달렸다.

티나는 당황해서 그렉을 향해 외쳤다.

“소장님. 이렇게 그냥 가시는 겁니까?”

그렉은 그새 연구실 문밖으로 나갔고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그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휴직 기간을 연장할 거야. 그렇게 알아 둬.”

“예? 기간을 연장하신다고요? 언제까지요?”

“당분간 쭉!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 나를 찾지 마.”

그렉의 마지막 말이 멀리서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연구실에 남은 제이슨과 티나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슨은 티나 곁으로 다가와서 물었다.

“티나. 아까 말한 X-선 형광 분광계는 대체 뭐야? 우리 연구소에 왜 그런 게 있어?”

“기억 안 나?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돌을 달인 물을 마시고 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져서 그걸 연구하려고 구매한 거잖아.”

“아니.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모르면 가만히 있어.”

티나는 자신을 찾지 말라는 그렉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 * *

그렉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침실로 돌진했다.

서이렌은 여전히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수상한 장비를 들고 온 그렉을 보며 나는 놀라 물었다.

“그렉. 대체 그게 뭡니까?”

“X-선 형광 분광계라는 겁니다.”

“이렌 씨를 치료하는 물건입니까?”

“그건 아니고 이렌 씨 가슴에 있는 테티스의 심장을 좀 확인해 보려고요.”

“대체 뭘 확인하려는 거죠?”

“삼 년 전에도 이렌 씨가 오늘처럼 쓰러졌었다면서요?”

나는 그렉에게 내가 알고 있는 서이렌의 모든 것을 다 상세히 말해 줬다.

그렉이 서이렌의 비밀을 지켜 줄 아군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테티스의 심장이 멀쩡한지 확인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게 이렌 씨한테 도움이 될까요?”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어차피 이렌 씨는 일반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가 봤자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없습니다.”

내가 그렉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서이렌을 데리고 병원에 갈 수 없어서였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렉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렉은 내가 덮어 놓은 이불을 내리고 서이렌의 옷을 다시 펼쳤다.

그녀의 심장 상처는 눈에 띄게 줄어 있었으나 여전히 깊게 팬 상태였다.

“여기 좀 잡아 줘요.”

“잠시만요.”

나는 그렉의 곁으로 다가가 X-선 형광 분광계라는 이름도 어려운 기계를 뒤에서 받치고 들어 올렸다.

“이건 소형 분광계라서 아주 상세히 분석해 주지는 않을 겁니다. 기계를 작동시키면 소리가 좀 클 테니까 알아서 귀를 막으세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렉은 내가 기계를 꽉 잡은 것을 확인하고 전원을 켰다.

모터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내가 잡은 분광계가 떨렸다.

그렉은 서이렌의 가슴을 벌리더니 그 안으로 X선을 투과시켰다.

그러자 심장의 보석과 반응한 X선이 반사되어 침실 안이 온통 보랏빛으로 빛났다.

그렉은 기계와 연결된 노트북으로 전송되는 자료를 노려봤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숫자들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한참이나 광선을 쐬던 그렉이 손을 들었다.

“이제 됐어요. 그만 끕시다.”

나는 기계를 끄고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렉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렉은 모니터를 보며 알 수 없는 기호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었다.

“뭐가 보여요?”

“확실히 보석의 결정이 약해졌어요.”

“그 말은 보석이 깨질 거라는 건가요?”

“테티스의 심장은 강도가 남달라요. 다이아몬드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죠. 결정이 약해졌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만, 심장이 깨지지 않을 거라니 다행이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서이렌을 살폈다.

아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졌다.

이제 곧 깨어날 것만 같았다.

그렉은 연구소에서 가져온 X-선 형광 분광계를 들고 침실을 나섰다.

‘내일 제이슨보고 잠시 이곳에 들르라고 해야겠군.’

순간 그렉의 눈이 커졌다.

침실을 나서던 그렉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는 서이렌의 곁에 꼭 붙어 앉아 있는 원세강이 보였다.

‘설마. 하늘이 내려 준 기적이 아니었나?’

눈을 가늘게 뜬 그렉은 원세강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들고 있던 기계를 꽉 움켜쥐었다.

‘확실히 아는 방법이 있지.’

나는 그렉이 성큼성큼 내게 걸어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서이렌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커다란 기계음이 울리더니 번쩍거리는 광선이 내 가슴을 통과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렉이 X-선 형광 분광계를 들고 내 심장을 향해 X선을 쏘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가락을 들어 벽을 가리켰다.

방금 본 것처럼 사방에 보라색 빛이 번쩍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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