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3화 (194/261)
  • #193화. 장례식장에서

    ‘말도 안 돼. 대광그룹 아들이 매니저를 한다고?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지수연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임준학과 임지형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간 지수연의 두 눈이 커졌다.

    ‘잠깐만! 임지형이 대광그룹 아들이면 임준학 배우도 마찬가지라는 거잖아. 두 사람은 형제니까.’

    지수연은 지난번 홍보대사 촬영장에서 임지형과 마찰을 빚었던 일을 떠올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지수연의 매니저가 빈소에서 돌아왔다.

    “지수연 배우님. 저 왔습니다.”

    “…….”

    지수연은 임 씨 형제들을 생각하느라 매니저가 옆에서 말을 거는 것도 몰랐다.

    매니저는 대답하지 않는 지수연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또 저러네. 제발 사람이 말하면 씹지 좀 말아 주라. 자기가 먼저 장례식장에 누가 와 있는지 알아보라고 나를 보냈으면서.’

    매니저는 속으로는 지수연의 욕을 하면서 다시 한번 그녀에게 물었다.

    “지수연 배우님. 한성제 왕대표님은 이미 빈소에 다녀가셨다고 하고요. LOK 소속 배우들이 몇몇 빈소를 지키고 있더라고요. 생전에 박찬영 감독님의 영화에 출연하셨던 배우분들이랍니다.”

    “나 말이에요.”

    “예. 배우님. 말씀하세요?”

    “장례식장에 꼭 들어가야 해요?”

    “당연히 가야죠. 박찬영 감독님이 영화계의 레전드 감독님이시라서 꼭 가야 한다고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지금 한창 드라마 촬영으로 바쁜 배우분들도 촬영을 접고 온대요.”

    “진짜 짜증 나. 들어가기 싫은데.”

    지수연은 장례식장에서 임 씨 형제들과 재회하는 것이 찝찝해서 내키지 않았다.

    “배우님. 빨리 가시죠. 오래 있기 싫으면 헌화만 하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래도 되는 거죠?”

    “그럼요. 우선 장례식장에 갔다는 게 중요합니다.”

    “알았어요.”

    지수연은 손거울을 들고 얼굴을 확인했다.

    “가요.”

    “예. 배우님.”

    매니저는 지수연의 마음이 언제 바뀔까 두려워 재빨리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런데 배우님. 제가 빈소에서 엄청난 걸 봤습니다.”

    “놀랄 게 또 있어요? 그게 뭐요?”

    “예? 또라니요? 뭐가 있었습니까?”

    “됐으니까. 그냥 말이나 해요.”

    “제가 빈소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다가 봤는데요. 상주가 아는 사람이더라고요.”

    “상주요?”

    “저는 박찬영 감독님의 부인이신 진설 배우님이 상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두 분의 아드님이 상주를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게 지금 나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아들이 상주를 하는 게 당연한 거죠.”

    “그게 아니라요. 진설 배우님의 아드님이 일반인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우리 지난번 홍보대사 촬영장에서 봤던 박선호 배우님 아시죠? 그분이 돌아가신 박찬영 감독님과 진설 배우님의 아드님이시더라고요.”

    “…….”

    지수연은 걸음을 멈추고 매니저를 노려봤다.

    매니저는 지수연의 매서운 눈빛을 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그러세요? 배우님?”

    “박선호가 누구라고요?”

    “박찬영 감독님과 진설 배우님의 아드님이요.”

    “아씨. 산 넘어 산이네.”

    지수연은 화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 *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임준학, 임지형 형제와 이야기를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돌아오던 나는 마침 그곳에 나타난 한지욱과 마주쳤다.

    한지욱의 곁에는 TOP 대표인 김승민이 함께였다.

    나는 한지욱은 무시하고 김승민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승민 대표님.”

    “원 대표. 오랜만이야. 지금 미국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왔습니다. 장례식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원 대표가 고생이네. 미국은 어때? 서이렌 씨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소식이 한국에서도 꽤 이슈였던 건 알지?”

    “다들 좋게 봐주시고 응원의 말씀을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한국 사람 중에 서이렌 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자타공인 국민배우잖아.”

    한지욱은 나와 김승민의 대화가 듣기 거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쳇. 국민 배우는 개뿔이.’

    한지욱은 김승민의 팔을 툭 치더니 말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대화들 나누고 오십시오.”

    한지욱은 내게 인사도 하지 않고 쌩하니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를 모르는 척하는데 내가 먼저 아는 척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끝까지 한지욱은 없는 사람 취급하며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한지욱 대표가 쌀쌀맞지? 이해해. 지금 TOP 미디어에 일이 터져서 그거 수습하느라 바쁠 거야.”

    그렇겠지.

    개봉은 해야 하는데 심의에서 떨어졌으니 아마 지금쯤 골치가 아플 거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김승민에게 물었다.

    “TOP 미디어라면 영화 대탈출 때문인가요?”

    “맞아. 그 영화가 홍보 일정 다 잡아 놨는데 심의에서 떨어졌거든.”

    “큰일이네요. 그래서 어쩐다고 합니까? 개봉이 미뤄지는 건가요?”

    “그럴 순 없지. 개봉은 반드시 12월에 해야 한다고 해서 지금 재심의를 넣으려고 편집하고 있나 봐.”

    “그렇군요.”

    결국 문제가 된 부분을 편집해서 15세 관람가로 가려나 보다.

    하긴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거다.

    15세와 18세 관람가는 천지 차이고, 배급사인 UPC의 일정도 있으니 15세로 맞추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게 블랙 마치 심의에 괜히 시비를 걸어서 이 사단을 만드나.

    영화진흥협회에 로비를 넣지 않았다면 대탈출은 지금 상태 그대로 15세 심의를 받은 채 개봉했을 거다.

    괜히 블랙 마치의 개봉일을 늦추려고 수작질을 벌이다가 자기 발등을 찍은 셈이다.

    “그럼, 이제 들어가지. 원 대표.”

    “예. 김승민 대표님.”

    * * *

    박선호 앞에 선 지수연은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박선호는 푸석푸석한 얼굴로 지수연을 맞이했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슬퍼 보였지만, 오신 손님에게 꿋꿋이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수연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박찬영 감독의 영정 앞에 헌화하고 물러난 지수연에게 박선호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LOK의 한지욱 대표님이 다녀가셨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시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예.”

    지수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진설과 박선호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뭐지? 오늘 뭔가 달라 보이네.’

    지수연은 박선호의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슬픈 눈이 자꾸만 떠올랐다.

    자리로 걸어가면서도 박선호를 보려고 계속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의 안내를 받아 안쪽 구석에 자리를 잡은 지수연은 자신 앞으로 나온 육개장을 앞으로 밀었다.

    “오빠가 먹어요.”

    “왜요? 배우님도 드셔야죠.”

    “됐어요. 지금 먹으면 살쪄요.”

    지수연은 다시 고개를 돌려 문상객을 맞이하는 박선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매니저는 그의 앞에 있는 육개장을 다 먹고 지수연이 건넨 육개장을 먹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박선호 배우님도 대단하네요.”

    “뭐가 대단하다는 거죠?”

    “아버지가 박찬영 감독님이고 어머니가 진설 배우님이신데. 뒷배경을 완전히 숨기고 무명부터 차근차근 이 자리에 올라온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요?”

    “그럼요. 저 두 분이 영화계에서 얼마나 유명한 분입니까? 두 분 인맥으로 연기 시작했으면 시작부터 주연 자리를 꿰찼을걸요? 박선호 배우님은 심지어 연기까지 잘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눈앞의 매니저가 침까지 튀어 가며 열변을 토하자 지수연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지금 그 말이요.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예요?”

    “예?”

    육개장을 입에 밀어 넣던 매니저는 놀란 눈으로 숟가락을 내려놨다.

    “배우님이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몰라도 제 말은 그 뜻이 아닌데요.”

    “…….”

    지수연은 아무 말 없이 매니저를 한참 동안 노려봤다.

    매니저는 할 말이 없는지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에 시동 걸어 놓고 있을게요. 따뜻해지면 나오세요.”

    “5분 후에 나갈 거예요.”

    “예. 배우님.”

    매니저는 어깨가 축 처져서 밖으로 나갔다.

    지수연은 방금 매니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빠가 드라마 국장인 게 어때서? 인맥이나 운도 실력이잖아. 박선호 저 사람이 바보 같은 거지. 그걸 왜 숨겨? 결국엔 오늘처럼 만천하에 다 까발려질걸. 웃겨.’

    지수연은 화를 내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물기가 촉촉한 박선호의 옆얼굴을 보자 지수연의 꽉 움켜쥔 손이 풀렸다.

    지수연이 뭐에 홀린 듯이 박선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의 뒷자리에서 그녀의 이름이 들렸다.

    “형. 아까 나가던 사람 말이야. 지수연 로드 매니저 아닌가?”

    “그래? 나는 못 봤는데?”

    “지수연 매니저 맞아. 내가 그때 홍보대사 촬영장에서 인사도 나눴는걸.”

    지수연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을 듣고 놀라서 그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서로 뒤돌아 앉아 있는 지수연과 임지형.

    임지형은 뒷자리에 지수연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형. 그 이야기 들었어? 지수연 아빠가 KBC 드라마국 국장이라며?”

    “응. 들었어.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이야기잖아.”

    “지수연은 진짜 웃긴 거 같아. 그걸 딱히 숨길 생각도 없고 오히려 금수저라고 언플도 하잖아.”

    “그럴 수도 있지. 요즘은 집안이 좋은 것도 인기의 요인이니까.”

    “쳇. 박선호 배우님이나 형도 언플을 안 하는데 자기가 뭐라고? 암튼 난 너무 웃기더라.”

    임지형은 지수연이 고작 그 정도 배경을 믿고 까불고 다니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뒤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지수연은 임지형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지수연의 핸드폰으로 매니저가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

    [배우님. 시트를 따뜻하게 덥혀 놨어요. 어서 오세요.]

    지수연은 입술을 깨물며 분을 삭였다.

    ‘하필이면 왜 내 뒷자리에 앉은 거야? 재수 없어.’

    지수연은 들고 있던 가방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치 몸이 불편한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린 지수연은 가방으로 얼굴을 가린 채 총총걸음으로 장례식장을 가로질러 갔다.

    * * *

    밖으로 나온 한지욱은 김승민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승민 대표님. 안 가세요?”

    [벌써 가시는 겁니까? 그래도 장례식장에 왔는데 조금 더 있다가, 가지 그래요?]

    “얼굴만 비추면 됐죠. 원래는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하도 성화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온 겁니다. 지금 할 일이 태산이에요. 저는 먼저 갈 겁니다.”

    [그렇군요, 어쩔 수 없죠. 저는 조금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그건 김승민 대표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나중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한지욱은 거칠게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자신은 영화 재심의 때문에 짜증이 나서 돌아 버리겠는데 잘나가는 원세강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원세강이 등장하자 장례식장이 술렁거렸고 사람들이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슬금슬금 그의 곁으로 몰려갔다.

    어느새 원세강 주위로 사람들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한지욱은 그 모습이 꼴 보기가 싫어서 더는 이곳에 있기 싫었다.

    주차장으로 걸어가는데 마침 차에서 내린 남녀가 보였다.

    한지욱은 차 키를 꽂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락이잖아.’

    한지욱은 이락의 곁에 서 있는 여고생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했다.

    여고생은 불편한 표정으로 이락에게 물었다.

    “오빠. 나 교복 입고 가도 되는 걸까?”

    이락은 교복을 입은 여고생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학생이 교복을 입어야지. 당연한 거야.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알았어.”

    정희진은 환하게 웃으며 이락의 팔짱을 꼈다.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한지욱의 두 눈이 커졌다.

    “이락 배우 맞는데? 왜 여고생이랑 함께 있지?”

    한지욱은 팔짱을 꼭 끼고 걷는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두 사람 사귀는 사이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여고생인데?”

    한지욱은 아닐 거라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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