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2화 (193/261)
  • #192화. 부고

    한지욱의 성난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울려 퍼졌다.

    [곽청기! 심의를 다시 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영화 홍보 일정을 다 잡아 놨는데. 재심의가 말이 돼?]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네가 심의위원이잖아. 그럼, 누구한테 물어?]

    “너 이 새끼는 지금 기사 뜬 거 보고도 나한테 전화질이냐? 이 개자식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인데? 너 말을 참 이상하게 한다. 그러게, 김시원한테는 왜 결혼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해서 이 사단을 만들어?]

    “시끄럽고 넌 당분간 나한테 전화하지 마. 나도 이번 일로 영화진흥협회 내에서 입지가 확 떨어졌어. 더는 너를 못 도와준다고.”

    [유선희는 어떻게 하고? 이번 주에 내가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잖아.]

    “유선희는 개뿔. 우리 아버지가 이번 일을 다 아셨다고. 내가 지금 한가한 줄 알아? 징계받을지도 모르는 판국이라고.”

    징계라는 단어에 한지욱도 움찔했다.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또 한 번 전화하면 바로 네 번호를 스팸에 등록해 버릴 거니까.”

    곽청기는 화를 내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문 씨어터의 촬영은 어느덧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서이렌은 역을 완벽하게 역을 소화했고 한국에서처럼 미국에서도 함께 일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서이렌 씨 왔네요.”

    “이렌 씨는 오늘도 너무 예쁜데요? 대체 무슨 화장품을 쓰는 건가요? 한국 거예요?”

    “늦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오늘도 일찍 왔네요.”

    스태프들과 지나칠 때마다 그들은 우리를 보며 웃으며 인사를 했다.

    뒤따라오던 김경록은 올 때마다 매번 보는 광경이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웠다.

    김경록이 내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세강아. 넌 좋겠다.”

    “뭐가 말입니까?”

    “서이렌 씨가 네 배우라서 좋겠다고. 한국에서도 서이렌 씨의 평판이 좋다고는 들었는데. 이 정도일 줄 상상도 못 했다. 촬영 스태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배우들도 모두 서이렌 씨를 좋아하는데?”

    “형님도 한 달 동안 같이 일해 봐서 아시잖아요. 이렌 씨는 그런 존재예요.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김경록은 지난 한 달 동안 로드 매니저로 따라다닌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대체 저런 마인드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부러워 죽겠다.”

    “이렌 씨의 마인드가 부럽다고요?”

    “아니, 네가 부럽다고. 저런 배우 한 명만 있었으면 나도 스타탄생 같은 회사를 차리고 잘나갔을 텐데.”

    “참나. 서이렌 씨는 온리 원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넌 참. 여전히 재수가 없어.”

    “그걸 이제 아셨어요?”

    김경록이 어이가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한 달 동안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이제는 그와 꽤 친해졌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데면데면했던 관계가 이렇게 한 달 만에 바뀔 줄 상상도 못 했다.

    이 모습을 강진석이 본다면 아마 까무러칠 거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생각하면 할수록 재미있었다.

    김경록과 웃고 떠드는데 내 핸드폰이 두두거리며 진동음을 냈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박진숙 이사였다.

    무슨 일이지?

    블랙 마치 홍보에 또 문제라도 생겼나?

    나는 놀란 얼굴로 전화를 받아 들었다.

    “박진숙 이사님.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한국은 지금 새벽 시간이잖아요.”

    [원 대표님. 지금 당장 한국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으로요? 갑자기 왜요?”

    [박찬영 감독님께서 돌아가셨어요.]

    “예?”

    나는 너무 놀라서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경록은 내가 소리를 지르자 놀라서 따라 일어섰다.

    “언제요?”

    [오늘 밤 자정에요. 저도 지금 병원에 와 있습니다.]

    “진설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대표님은 괜찮으세요. 이미 예상하고 계셨나 봅니다.]

    지난번에 재단 ‘키노’ 일로 진설과 통화했을 때는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걸까?

    “장례식장은 어디인가요?”

    [서울 병원이요.]

    “제가 비행기 표를 구하는 대로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게요.”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박진숙과 전화 통화를 끊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어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가장 빠른 표를 예약한 나는 내 짐을 챙겼다.

    “형님이 우리 이렌 씨 좀 돌봐 주세요.”

    장례식장이라는 단어를 듣고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챈 김경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누군지 물어봐도 돼?”

    “박찬영 감독님이십니다.”

    “아. 그렇구나.”

    김경록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다녀올게요. 이렌 씨를 부탁합니다.”

    “알았어. 네가 없는 동안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 * *

    검은색 드레스를 차려입고 모자까지 쓴 지수연이 의상실 거울을 바라봤다.

    옆에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보다 못해서 한마디를 건넸다.

    “수연 배우님.”

    “왜요?”

    “장례식장에 가는 건데 너무 꾸미고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검은색 드레스로 입었잖아요.”

    “아무리 검은색이라고 해도 너무 디자인이 튀어요. 심지어 그런 화려한 모자까지 쓰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언니 생각에는 그래요?”

    “투머치입니다.”

    “흠.”

    지수연은 거울을 보더니 씁쓸히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스타일리스트는 미리 준비해 놓은 깔끔한 스타일의 검은색 정장을 지수연에게 내밀었다.

    “난 박찬영 감독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차려입고 장례식장에 꼭 가야겠어요?”

    “한국 영화계의 거장 감독이세요. 당연히 가야죠. 가면 영화계 인사들이 많이 올 겁니다. 매니저님도 그러셨잖아요. 기자들도 많이 올 거라서 장례식장 가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야 한다고.”

    “장례식장은 처음이라서 기분이 별로인데.”

    지수연은 스타일리스트가 들고 있는 정장을 채 갔다.

    그녀가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나오자 스타일리스트는 그제야 안도했다.

    “봐요. 단정하고 딱 보기 좋잖아요.”

    “알았어요. 빨리 가요. 대충 사진만 찍히고 나올 거니까.”

    “매니저 오빠가 주차장에 차를 대기 시켜 놨다고 하네요. 지금 내려가면 돼요.”

    * * *

    한국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서울 병원으로 갔다.

    장례식장 주위에는 이미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

    빈소에 들어가 보니 상복을 입은 진설이 보였다.

    검은색 상복을 입고 단아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그녀를 보며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원 대표. 왔어?”

    “진설 대표님.”

    진설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지만, 그녀의 눈에 가득 찬 슬픔과 비애가 느껴졌다.

    “미국에서 오느라 고생했지?”

    “저 혼자 왔습니다. 서이렌 씨는 촬영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었어요.”

    “괜찮아. 이렌 이도 놀라서 전화했더라.”

    “상심이 크시죠?”

    “원 대표는 잘 알잖아. 박 감독님이 이만큼 더 살다 가신 것도 이미 기적이야.”

    진설은 침착하게 말했지만, 평생의 동반자를 잃은 그녀는 한없이 슬퍼 보였다.

    그때 왼쪽 팔에 검은 줄이 두 개가 들어간 완장을 찬 젊은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빈소의 상주인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박선호 배우님.”

    “원세강 대표님. 오셨습니까?”

    박선호는 자연스럽게 진설의 옆에 다가가 섰다.

    “원 대표는 안 놀라네. 다들 선호가 상주인 걸 보고 놀라던데. 혹시 원 대표는 이미 알고 있던 거야?”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지난날 술에 취한 박선호를 데리고 그의 집에 찾아갔을 때 나는 그가 진설과 박찬영 감독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글 쓰는 게 취미라던 박선호의 책상에서 ‘구원의 밤’의 초기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박찬영 감독이 쓴 초기 시나리오를 본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로 극비였기 때문에 바로 그가 박찬영 감독의 아들임을 알아차렸다.

    “박선호 배우님. 상심이 크시죠?”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힘을 내서 어머니를 지켜 드려야죠.”

    진설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박선호를 보니 그제야 조금은 안심이 됐다.

    박선호의 무덤덤하고 곧은 성격이 어디에서 왔나 했더니 인제 보니 박찬영 감독을 쏙 빼닮았다.

    나는 박찬영 감독님께 헌화하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으며 밤하늘을 바라봤다.

    어렸을 때는 장례식장에 갈 일이 드물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 가면서 가족과 지인을 잃고 이렇게 장례식장에 오는 일이 늘어만 간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먼저 보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갑자기 ‘내가 먼저 떠나면 어쩌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병이 완치된다고 하더라도 서이렌은 나보다 오래 살 거다.

    그녀는 늙지 않으니까.

    그녀는 영원한 삶을 사니까.

    나와 서이렌이 맺어진다 해도 우리는 절대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언젠가는 늙어서 죽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심지어 환자라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먹먹한 느낌이 들었다.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원세강 대표님?”

    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부른 사람을 쳐다봤다.

    마침 주차를 끝낸 밴에서 임준학과 임지형이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멀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으로 내 앞으로 다가왔다.

    “미국에서 오신 겁니까?”

    임준학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방금 도착했습니다.”

    임지형은 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기에 곧바로 그의 궁금증을 해소해 줬다.

    “이렌 씨는 지금 미국에서 촬영 중입니다. 일정을 조정할 수 없어서 나 혼자 왔어요.”

    “그러셨군요.”

    임지형은 실망한 듯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왕 이렇게 보게 된 거 임지형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임지형 씨, 이번 일은 고마웠어요.”

    “뭐요.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무리한 부탁인데 들어줘서 고마워요. 임용섭 이사님은 뭐라고 물어보지 않던가요?”

    “원 대표님과 무슨 사이냐고 궁금해하신 정도였습니다. 더는 묻지 않으시더군요.”

    “그랬군요.”

    “그리고 원 대표님과 계속 이렇게 친하게 지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죠. 이미 너무 친하다고요. 제 말이 맞죠?”

    임지형이 저렇게 말해 주니 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임지형 씨는 이제 로드 매니저로 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겠네요. 임준학 씨는 섭섭하시겠어요.”

    “골칫덩어리예요. 지난번에는 촬영장에서 여배우랑 싸우지를 않나.”

    “형. 기억 안 나? 지수연이 먼저 나한테 반말을 찍찍했잖아.”

    “그렇다고 너도 같이 반말하고 싸우고 들면 어떻게 해? 어떤 로드 매니저가 여배우랑 촬영장에서 싸우니?”

    “원 대표님도 지수연 아시죠? 지수연이 알고 보니 왕재수더라고요. 앞으로 대광그룹은 절대 지수연을 광고 모델로 안 쓸 겁니다.”

    나는 웃으며 임지형을 달랬다.

    “지수연 배우님이 큰일 났네요. 대광그룹 둘째 아드님께 완전히 찍혔네요.”

    “제가 뒤끝이 엄청난 놈입니다. 지수연이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치가 떨립니다.”

    나는 마음이 울적했는데 이렇게 임씨 형제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이제 빈소로 가 보시죠. 제가 안내할게요.”

    나는 그들을 이끌고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사라지고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던 검은색 밴에서 누군가 내렸다.

    그는 다름 아닌 지수연이었다.

    지수연은 놀란 얼굴로 장례식장으로 걸어가는 세 사람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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