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1화 (192/261)
  • #191화. 전쟁의 승리자

    이사실에 들어온 심의위원장 임용섭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군. 영화 하나를 세상에 내놓는 일인데. 심의를 진행하면서 심의표 하나 제대로 못 챙긴다는 게 말이 되나?”

    티켓박스 사장으로 이십 년간 대한민국의 대표 영화를 투자하고 배급해 온 그로서는 지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다가온 비서가 임용섭에게 말했다.

    “블랙 마치를 심의했을 때 채점했던 표뿐만 아니라 함께 기사에 났던 대탈출도 채점표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합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수기로 작성하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으로 하지 않습니까?”

    “원세강 대표의 말대로 뭔가 뒤가 구린 구석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미 채점표도 사라졌고 재심의를 보는 수밖에 없지. 이미 회의에서도 그렇게 결정이 났어.”

    “그럼, 문제가 된 블랙 마치와 대탈출만 재심의를 보는 겁니까?”

    “그래야지. 심의에 붙은 다른 영화들은 지금쯤 한창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을 텐데. 그 영화들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티켓박스의 사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던 임용섭은 영화 하나를 세상에 내놓는데 어떤 험난한 과정을 거치는지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정상적인 심의를 거친 영화는 건드릴 생각이 없었다.

    “곽청기 이사 쪽이나 좀 알아봐. 원세강 대표 말로는 대탈출을 만든 한지욱과 곽청기 이사가 초중고 동창이라는데.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회의실에서 나온 곽청기는 씩씩거리며 영화진흥협회의 옥상 정원으로 올라갔다.

    옥상 정원에 도착한 곽청기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핸드폰을 들었다.

    “야. 한지욱.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그런 기사가 뜬 건데? 그것도 영화 이름이 딱 박혀 나와서 지금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한 줄 알아?”

    한지욱도 갑자기 뜬 기사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지금 알아보는 중이야. 왜 이렇게 화를 내?]

    “내가 지금 화를 안 내게 생겼어? 어떻게 할 거야? 방금 회의에서 문제가 된 두 영화를 재심의한다고 결정이 났어.”

    [재심의는 무슨 재심의야? 곽청기. 너 거기서 그렇게 힘이 그렇게 없어? 너희 아버지 빽은 어디에다 두고 재심의를 한다는 거야?]

    “네가 여기 사정을 몰라서 그래. 영화계 늙다리 임원들이 자기들 카르텔 챙기느라고 똘똘 뭉쳤어.”

    [그럼, 진짜로 재심의한다고? 블랙 마치만?]

    “대탈출도 같이할 거야.”

    [미쳤어? 대탈출은 이미 개봉 날짜 박아서 홍보 돌리고 있다고.]

    “회의에서 결정된 거야. 난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건 아니지. 그까짓 거 쉽게 처리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너야. 기억나지?]

    “그럼, 네가 똑바로 했어야지. 오늘 뜬 기사는 대체 뭔데?”

    [그건 내가 알아보고 있다니까.]

    “암튼, 전화 끊어. 내가 전화하기 전에는 네가 먼저 전화하지 마. 지금은 몸 사릴 때야.”

    [야. 곽청기. 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곽청기는 한지욱의 다음 말을 듣지도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에이씨. 괜히 엮였네. 신인 배우들 소개해 준다는 말에 홀려서.”

    곽청기는 육두문자를 내뱉고는 옥상에서 내려왔다.

    * * *

    재심의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강진석이 놀라서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세강아. 블랙 마치 말이야. 재심의하기로 했어.]

    “그렇군요.”

    [너 뭐야? 왜 그렇게 감정 없이 대답하는데? 안 기뻐?]

    “기쁘죠. 다행입니다.”

    강진석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잔잔하고 평온한 목소리에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강아. 혹시 그 기사. 네가 낸 거야?]

    “무슨 기사요? 심의 규정이 이상하다는 기사 말씀이신가요?”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거 제가 깡기자님께 부탁해서 낸 거 맞아요.”

    [정말 너였어? 근데 깡기자 이름이 아니던데?]

    “깡기자님이 쓰신 기사인데 다른 기자 이름으로 냈어요.”

    [그렇지. 깡기자와 스타탄생이 친한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근데 이렇게 빨리 해결이 될 줄은 몰랐다. 네가 미국에 있어서 나 혼자 어떻게 해서든 처리 해 보려고 했거든.]

    “이제 겨우 재심의에 들어간 거고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요. 지켜봐야죠. 블랙 마치와 대탈출 모두 재심의하는 거죠?”

    [응. 기사에 나온 두 작품만 재심의한다고 해서 지금 난리가 났다. 영화진흥협회가 원래 깐깐하기로 소문난 곳인데 신기해. 어떻게 논란 기사가 나자마자 딱 두 작품을 재심의한다고 결정했을까?]

    나는 기뻐하는 강진석을 보며 기분이 좋았다.

    “우선 지켜보죠. 홍보 일정은 그냥 원래 계획대로 진행해 주세요.”

    [기사까지 떴으니 이번에는 통과하겠지?]

    “반드시 그래야겠죠.”

    [그래 알았어. 바쁜데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다. 그만 전화 끊을게. 수고해라.]

    “형님도 그만 들어가세요.”

    * * *

    재심의가 시작되자 한지욱이 그새를 못 참고 다시 곽청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지욱. 이 새끼야.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

    [재심의 시작했지?]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이번에는 네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야. 심의위원회도 새로 구성됐어. 내 라인 인물들은 하나도 없다고.”

    [왜 이래? 너희 아버지 끗발이면 새로운 심의위원들을 구워삶는 건 일도 아니잖아.]

    곽청기는 끝까지 자신을 이용하려는 한지욱을 보며 기가 막혔다.

    “한지욱. 너 이제 완전 사업가가 다 됐다.”

    [칭찬이지?]

    “암튼 이번에는 못 도와줘.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그럼, 이것만 부탁할게.]

    “뭔데 그래?”

    [대탈출만 심의만 먼저 빨리 끝내주고 블랙 마치는 시간 좀 끌어 줘.]

    “언제까지?”

    [이 주 정도만.]

    “정말 그 정도면 되는 거야?”

    [심의가 안 나서 개봉 일정을 확정할 수 없으니 홍보 일정에 차질이 생길 거야.]

    “진짜 너도 독하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이번 작품은 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만든 작품이야.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해야지. 네 말대로 나도 이제 사업가가 다 됐어.]

    “그래. 너 잘났다.”

    [그럼, 도와주는 걸로 알고 있을게. 그리고 다음 주에 유선희랑 만나게 해 줄게.]

    유선희라는 말에 곽청기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유선희라는 LOK의 신인 배우 중에서도 제일 인기가 많은 배우다.

    그동안 이름 없는 신인들만 소개해 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게 정말이야? 드라마 찍느라 시간을 못 낸다며?”

    [친구 좋은 게 뭐겠니? CF 촬영하느라 촬영을 하루 뺐어. 그날 CF 촬영장으로 와.]

    “야. 고맙다. 또 이렇게 신세를 지네.”

    [그럼, 내 부탁 들어주는 거나 잊지 말아.]

    “오케이. 그깟 심의 결과 미루는 거야 일도 아니지.”

    [그럼, 조만간 얼굴 보자.]

    “잘 들어가라.”

    한지욱과의 전화 통화를 끊은 곽청기는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유선희와 만날 생각에 들떠 있는데 비서가 놀란 눈으로 들어왔다.

    “뭡니까?”

    “이사님. 이상한 기사가 떴습니다.”

    곽청기는 또 심의 규정 논란 때문이겠거니 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무슨 기사요? 또 심의 논란입니까?”

    “그게 아니라요.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뭔데 그렇게 떨어요? 줘 보세요.”

    곽청기는 비서가 건네는 태블릿을 손에 들었다.

    포털에 뜬 기사는 헤드라인부터 심상치 않았다.

    [신인 배우 K 씨의 고백. 前 장관의 아들에게 혼인 빙자 사기당해]

    곽청기는 놀라서 기사를 클릭했다.

    K라 불리는 여성의 얼굴에 모자이크가 칠해져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가 익숙했다.

    ‘제기랄. 망했네. 김시원이잖아.’ 기사에 난 K 씨가 한지욱에서 소개를 받아서 잠시 만났던 신인 배우 김시원임을 확인한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서가 곽청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시원 씨가 고소하겠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무슨 고소야? 걔 진짜로 미친 거 아니야?”

    “그래도 대응은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기사도 실렸습니다. 아버님이 아시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비서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곽청기도 감정적으로 나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라는 게 밝혀지면 영화진흥협회는 물론이고 전 문체부 장관이던 아버지께도 누가 된다.

    “김시원은 지금 연락되나요?”

    “예. 곽 이사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전화를 안 받고 피하셨다고요.”

    “걔가 물귀신처럼 나를 잡고 늘어지는데. 그럼, 그 전화를 다 받고 있나요? 전화번호 좀 알려 줘요.”

    “예. 이사님.”

    자리에서 일어서던 곽청기가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심의 일정이 당장 내일이다.

    한지욱의 말을 들어주려면 오늘 심의위원들을 만나서 미리 판을 깔아 놔야 한다.

    “제길. 지금 남의 사정 봐주게 생겼어?”

    “이사님?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일주일간 휴가를 써야 할 거 같으니까 휴가 좀 미리 받아 줘요.”

    “알겠습니다. 이사님.”

    * * *

    핸드폰 벨 소리에 나는 잠에 깼다.

    알람인 줄 알았는데 알람이 아니라 벨 소리가 맞았다.

    “예. 여보세요.”

    [세강아. 나야. 강진석.]

    “지금 몇 시죠?”

    잔뜩 가라앉은 내 목소리를 들은 강진석이 놀라 말했다.

    [너 자고 있었어?]

    나는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올려진 시계를 확인했다.

    “예. 자고 있었어요.”

    [미안하다. 세강아. 내가 너무 기뻐서 미국 시각도 확인 못 하고 전화했어.]

    “괜찮아요.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일이세요?”

    [블랙 마치가 심의에서 통과했어. 예정대로 12월 초에 개봉할 거야.]

    “잘됐네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일찍 전화하신 겁니까?”

    [내가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넌 좀 더 자라. 전화 끊을게.]

    “아니에요. 어차피 일어날 시간이긴 합니다.”

    나는 서랍에서 약을 꺼내 들고 부엌으로 갔다.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려는데 강진석이 블랙 마치가 심의해서 통과했다는 소식보다 더 큰 소식을 말해 줬다.

    [우린 심의에서 통과했는데 대탈출은 떨어졌어.]

    “대탈출이 왜요? 무슨 문제가 있답니까?”

    [영화 중간에 인육 먹는 장면이 나온대. 꽤 길게 나와서 18세 관람가로 바꾸거나 아니면 그 장면을 편집해야 하나 봐. 웃기지 않냐? 대탈출은 원래 15세 관람가로 심의에서 통과한 거였는데 말이야.]

    대탈출에 그런 장면이 있다고?

    그런데도 15세 관람가로 심의를 넣어서 통과했다니.

    “심의 규정이 정말 개판이었네요.”

    [그렇다니까. 이러니 영화진흥협회가 욕을 먹는 거지.]

    “그럼, 우리가 세웠던 개봉 일정과 홍보 일정에는 차질이 없는 거죠?”

    [응. 그대로 밀고 나가면 돼.]

    “대탈출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TOP 미디어는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거다. 편집해서 재심의를 넣거나 18세 관람가로 가겠지.]

    “15세 관람가로 잡아 놓은 걸 18세로 바꾸지는 못할 거고, 편집해서 재심의를 넣을 확률이 높네요.”

    [그러든 말든. 그쪽은 알아서 하라고 하지. 하하하. 참, 너 방금 일어났다고 했지? 나 이제 전화 끊을게. 좀만 더 자라.]

    “아니에요. 너무 좋은 소식이라서 잠이 확 달아났습니다. 이미 일어났어요.”

    [미안해, 세강아. 다음에는 시간을 꼭 확인하고 전화할게. 다음에 또 통화하자.]

    “예. 들어가 보세요.”

    강진석과 통화를 마친 나는 거실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멀리 떠오르는 해가 보였다.

    나는 아침 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한편, 한국의 곽청기는 밤이 늦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김시원과 만났지만 제대로 합의가 안 돼서 결국 김시원이 곽청기를 고소했기 때문이다.

    곧 그들의 이야기가 기사로 퍼졌고 그는 궁지에 몰렸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공적으로 쓰는 핸드폰은 이미 기자들의 전화 때문에 전원을 꺼 놓은 상태고, 지금 온 전화는 그가 사적으로 쓰는 전화였다.

    곽청기는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야. 한지욱! 내가 전화하지 말라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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