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90화 (191/261)
  • #190화. 개봉일 전쟁

    젊은 세 남녀가 환하게 웃으며 모니터에 뜬 카피를 읊었다.

    “올가을, 경주로 오세요.”

    말끔히 차려입은 젊은 배우들의 손에는 경주에서 열리는 엑스포를 홍보하는 책자가 들려 있었다.

    “컷! 좋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갈게요.”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고 서로 꼭 붙어서 웃고 있던 세 남녀는 동시에 옆으로 떨어졌다.

    제일 멀찍이 떨어진 지수연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나타난 로드 매니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빠. 지금 11월이야. 지금 장난해?”

    “왜? 이거 아닌가? 넌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먹잖아.”

    “11월부턴 안 마셔.”

    “그래? 몰랐어.”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잖아. 빨리 가서 따뜻한 걸로 다시 사 와.”

    “알았어. 빨리 다녀올게.”

    “쉬는 시간 안에 다녀와. 늦기만 해 봐.”

    지수연의 로드 매니저는 얼굴이 사색이 돼서 촬영장 밖으로 나갔다.

    서로 대화를 나누던 임준학과 박선호는 지수연에게 혼나고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는 매니저를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

    임준학이 쉬고 있는 박선호에게 물었다.

    “박선호 배우님은 CF를 잘 안 찍으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이건 경주 엑스포 홍보 CF잖아요. 제가 경주를 좋아합니다.”

    “그러시구나.”

    임준학은 순수한 박선호를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지수연이 박선호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박선호는 뒤돌아 서 있어서 그걸 못 봤지만, 임준학은 지수연이 박선호를 비웃는 걸 똑똑히 봤다.

    ‘와. 세다.’

    임준학이 안하무인인 지수연을 보며 혀를 차고 있는데 올해까지만 임준학의 로드 매니저 노릇을 하기로 한 임지형이 캔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임지형은 형과 박선호에게 각각 캔 커피를 한 개씩 건넸다.

    “저도 주시는 겁니까?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현장이 고돼서 달달한 커피를 마시면 기운이 좀 날 거예요.”

    임지형은 얼마나 일했다고 고새 베테랑 로드 매니저같이 굴었다.

    임준학은 그런 동생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임지형은 뒤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수연에게 다가갔다.

    지수연은 임지형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뭐야?”

    임지형은 다짜고짜 자신에게 말을 놓는 지수연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캔 커피를 건네는 그의 손을 쳐다보던 지수연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뭡니까? 치우세요.”

    임지형은 지수연의 싹수없는 행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카메라 돌아갈 때랑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네.’

    지수연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코디가 놀라서 임지형에게 다가와 그의 손에 들린 캔 커피를 받고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지수연 배우님이 지금 좀 피곤하셔서요. 제가 받을게요.”

    “그러시군요. 피곤하셨구나.”

    임지형은 캔 커피를 코디에게 건네고 흙 씹은 얼굴로 뒤돌아섰다.

    “인제 보니 싸가지였네.”

    임지형은 자기도 모르게 나직이 속삭였는데 그걸 들은 지수연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야!”

    임지형이 지수연의 익룡 소리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귀는 또 엄청나게 밝아요.’

    임지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뒤돌아서서 지수연에게 말했다.

    “방금 ‘야’라고 하셨나요?”

    “이봐요.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야’라고요?”

    “방금 나보고 먼저 싸가지라고 했잖아요. 내가 못 들었나?”

    “캔 커피가 남아서 집에 싸 가지고 가야겠다고 혼잣말한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요.”

    “댁이야말로 생사람 잡지 마시죠. 그리고 딱 봐도 나랑 동갑 아니면 내가 연장자인데 왜 그렇게 말을 놓으시나요?”

    “내가 언제 반말을 했다고 그래요? 언니. 내가 반말하는 거 들었어?”

    “배우님. 저분이 임준학 배우님 친동생이래요.”

    “친동생이면 어때서? 할 일이 없어서 배우 하는 형한테 기생하는 거잖아요. 내가 이런 경우를 어디 한두 번 봤어야지.”

    일이 커질까 봐 가만히 듣고 있던 임준학이 지수연의 막말에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지수연과 임 씨 형제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보다 못한 박선호가 세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말했다.

    “다들 그만 하세요. 여기는 촬영장이잖아요. 서로 오해를 풉시다.”

    지수연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박선호를 보며 비웃었다.

    “인기도 없는 주제에. 그쪽은 빠지시죠.”

    박선호는 자신에게 막말하는 지수연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인기가 그렇게 많은 스타는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눈앞에서 뭐라고 하는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마침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 온 지수연의 매니저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그는 엉망이 된 촬영장을 보고 놀라서 지수연에게 달려왔다.

    * * *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임준학이 임지형을 큰소리로 혼냈다.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왜 나한테만 그래? 형도 봤잖아. 지수연 걔가 먼저 나한테 반말을 찍찍했다고.”

    “그렇게 성격 나쁜 배우들이 종종 있어. 그렇다고 나서서 싸우면 어떻게 해?”

    “작은 아씨들 촬영장은 천국이었잖아. 이렌 님. 김이솔 씨. 윤이슬 씨. 이자현 씨. 모두 다 스태프들한테 얼마나 잘해 줬어? 그런 천사표들만 보다가 오늘 그 입만 산 지수연을 보니까 짜증이 치밀어 오르더라.”

    “지수연은 이 바닥에서도 유명해. 그냥 안 엮이는 게 상책이야.”

    “금수저 언플로 잘나간다 이거지? 형은 금수저라는 선입견 생길까 봐 꼭꼭 숨기고 활동하는데. 진짜 웃겨.”

    “암튼 너는 내일부터 나오지 마. 괜히 우리 때문에 박선호 배우님만 지수연 배우한테 안 들어도 될 욕을 먹고. 내가 다 미안하더라.”

    임지형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아오. 열받아. 생각 같아서는 다 뒤집어엎고 싶네.”

    임지형이 씩씩거리는데 그의 전화로 문자가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번호였는데 자릿수가 이상했다.

    ‘국제 전화인가? 혹시 스팸?’

    임지형은 문자를 확인도 하지 않고 삭제하려다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문자를 클릭했다.

    문자를 본 임지형의 두 눈이 커졌다.

    ‘어라? 이건?’

    * * *

    나는 임지형이 구해다 준 심의위원회 명단과 최근 심의를 진행한 사람들을 보고 있다.

    “임지형 씨. 그러니까 심의위원회는 임지형 씨 친척을 포함해서 완전히 싹 물갈이가 됐다는 거죠?”

    나와 함께 화상통화 중이던 임지형이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곽청기라는 사람은 원래는 문체부에서 일하던 공무원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임지형이 준 명단을 보니 뭔가 권력의 구도 같은 게 보였다.

    “혹시 문체부 라인과 영화계 인사 쪽 라인이 서로 따로따로 인가요?”

    [바로 알아보시네요. 곽청기가 문체부 라인이 맞고요. 우리 작은아버지를 위주로 영화계에서 온 인사들이고요. 작은아버지 말씀이 자신이 심의위원장이긴 한데 아직 힘이 별로 없으시대요. 문체부 쪽 라인이 워낙에 막강해서요.]

    “그렇겠죠. 곽청기 아버지가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었으니까요.”

    [그것도 알고 계세요? 저도 이번에 처음 들은 건데 영화 쪽에서 넘어온 이사진들이 내는 안은 문체부 쪽 이사들이 듣지도 않고 무조건 반대부터 하는 경향이 있다네요. 작은아버지가 그래서 힘이 많이 드시나 봐요.]

    명단에서 곽청기라는 사람의 이름을 봤을 때부터 알았다.

    왜냐면 나는 이미 곽청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임지형 씨.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무슨 일인데요?]

    “위원장이신 임용섭 씨와 저를 연결해 주십시오.”

    [작은아버지를요?]

    “예. 꼭 만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럽니다.”

    화면 속의 임준학은 잠시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우선 작은아버지께 원세강 대표님이 보자고 하셨다고 운을 띄우고 전화번호를 전달할게요. 아버지가 전화하실지 말지는 저도 모릅니다.]

    “고마워요. 그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로비나 그런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임지형 씨한테나 임용섭 위원장님이나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원 대표님이니까 믿고 해 드리는 겁니다.]

    “알죠. 그래서 더 고마워요.”

    임지형은 그제야 편하게 웃으며 내 주위를 살폈다.

    저화질의 화면에서도 그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보여서 웃음이 났다.

    “뭘 그렇게 찾아요? 서이렌 씨를 찾나요?”

    [그냥 한번 본 거예요. 그런데 여기가 숙소인가요?]

    “예. 촬영장 근처에 집을 얻었어요. 제 옆집이 서이렌 씨 집입니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을 거예요.”

    [거긴 지금 새벽 시간이겠네요.]

    “그렇죠.”

    [이렌 님은 거기서도 잘하시죠?]

    “그게 궁금했습니까?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렌 님의 광팬으로서 궁금하죠. 할리우드로 간 뒤로는 감감무소식이잖아요. 한국에 남아 있는 이렌 님 팬들은 하루하루 말라 가고 있다고요.]

    “곧 작은 아씨들이 공개될 겁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그거라도 있으니까 기다리는 겁니다. 빨리 찍고 한국으로 돌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이렌 님께도 꼭 말해 주세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임지형과 화상통화를 마친 나는 작게 속삭였다.

    “임씨 형제들의 공통점인가? 첫인상과는 참 다르단 말이야.”

    * * *

    트로이 촬영장의 트레일러 안에서 김경록이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뭐? 누구라고?”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김경록을 잡아끌어 자리에 앉혔다.

    “곽청기요. 기억하시죠?”

    “당연히 기억하지. 한지욱 초중고 동창이잖아. 한지욱이 LOK에 놀러 올 때마다 곽청기도 데리고 왔는데 그걸 잊겠냐? 내가 한지욱이 한국 올 때마다 운전기사 노릇을 했는데.”

    김경록은 한지욱의 동창이라며 뻐기고 다니던 곽청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한지욱도 재수 없는 놈인데 초록은 동색이라고 한지욱의 친구인 곽청기도 결이 비슷했다.

    “그때 걔 아버지가 문체부 장관이라서 그걸로 얼마나 뻐기고 다녔는데?”

    “그랬어요? 몰랐네요.”

    “한지욱이 알게 모르게 LOK 신인배우들도 곽청기한테 많이 소개해 줬다.”

    나는 놀란 눈으로 김경록을 응시했다.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한성제 대표님도 아세요?”

    “당연히 모르시지. 한지욱이 그래도 완전히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닌 게. 이름 알려진 배우나 톱급 배우들은 스킵하고 이제 시작하는 신인 배우들만 소개해 줬을 거야.”

    “그런 일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그런데 세강아. 정말로 곽청기가 그랬을까? 곽청기가 한지욱의 사주를 받고 블랙마치만 심의에서 떨어뜨렸을까?”

    “정황을 보면 확실합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수소문해 보니 블랙마치보다 대탈출이 훨씬 잔인한 장면이 많았대요. 그런데 우리는 재심의고 그쪽은 통과했죠. 뭔가 이상하잖아요.”

    “그럼, 어떻게 처리하려고? 한지욱이랑 곽청기랑 둘 사이를 엮어서 기사라도 내려고?”

    김경록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 그건 힘듭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김경록에게 나는 태블릿 PC를 들어서 보여 줬다.

    화면에는 포털 사이트가 떠 있었고 한국 시간으로 아침에 뜬 기사가 보였다.

    [영화진흥협회의 줏대 없는 심의 규정 논란. 같은 시기에 같은 장르의 영화가 하나는 통과, 다른 하나는 반려?]

    김경록은 놀라서 기사를 클릭했다.

    내용은 최근에 나왔던 심의 논란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심의에서 붙고 떨어진 영화라며 블랙마치와 대탈출의 이름을 확실히 밝히고 있었다.

    기사를 본 김경록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낸 기사야?”

    “예.”

    “겨우 이걸로 되겠어?”

    “이걸로 시작입니다. 영화진흥협회에서 자신들의 심의 규정에 문제가 있었다며 재심의를 열게 될 거거든요.”

    “걔들이 그럴 리가 있나? 얼마나 꼬장꼬장한 놈들인데. 이런 기사가 수백 개가 나도 절대 그럴 일은 없을걸?”

    “제가 그때 영화진흥협회에 연줄이 있다고 했잖아요.”

    “…….”

    잠시 고민하던 김경록의 두 눈이 커졌다.

    “설마? 심의위원장이 직접 나설 거란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