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9화 (190/261)
  • #189화. 의문의 주치의(2)

    그렉 루이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마치 이제야 알았느냐는 듯이 무심하게 답하는 그를 보며 나는 소름이 끼쳤다.

    장 루이.

    세이렌 마네킹을 만든 사람.

    장 루이의 아들이 내 주치의가 되다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루이라는 성이 흔하지 않은데 왜 처음에 공항에서 그를 봤을 때 못 알아챘을까?

    찰나의 시간에 내 머릿속에는 갖가지 시나리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렉 루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희 아버지를 아시나 보죠?”

    “…….”

    “개인적으로 아시나요? 아니면 그냥 아시는 건가요? 제 아버님께서 워낙에 유명하신 분이시라서요.”

    나는 심호흡하고 입을 뗐다.

    “개인적으로는 잘 모릅니다.”

    “그럼, 디자이너 장 루이로 아시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렉 루이는 내 앞으로 비스킷을 건네며 말했다.

    “드시면서 말씀하세요. 들고 계신 차와 잘 어우러집니다.”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우연일까요?”

    “저는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치듯 지나가는 짧은 만남도 결국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명론자시군요.”

    그렉 루이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럼, 우리도 만남의 이유가 있다는 건가요?”

    “저는 젠셀의 연구원이고 원세강 씨를 치료하고 있는 약을 개발한 사람입니다.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건 내가 원한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것 때문에 나를 치료하러 내가 사는 곳 지척에 집을 구하셨나요?”

    “저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서요. 왜 원세강 씨만 그렇게 제가 만든 약이 잘 듣는 건지 이유를 알고 싶거든요.”

    “그래서 제가 사는 곳까지 따라오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이상합니까?”

    “당연히 이상하죠.”

    “제 성격이 좀 그렇습니다. 궁금한 건 절대 못 참거든요.”

    “저의 경우는 온 세상에 오직 저밖에 없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더 궁금합니다. 왜 원세강 씨에게만 그런 기적이 찾아왔는지 말입니다. 아까 저를 운명론자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래서 더 이유를 찾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릅니다.”

    그렉 루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혹시 제 바로 옆집. 그러니까 608호에는 누가 사는지 아시나요?”

    “서이렌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름을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럼요. 공항에서 봤을 때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뭐랄까…….”

    나는 그렉 루이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걱정하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렉 루이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 죄송하지만, 처음 든 생각이 ‘인간 같지 않다’였습니다. 너무 완벽하다고나 할까요?”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그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첫 만남이 제게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배우라고 하시길래 따로 찾아보기까지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본 수많은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우셨어요.”

    “단지 그것뿐입니까?”

    “제가 스토커 팬은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는 마세요. 그런데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그렉 루이는 처음으로 나를 보며 진심으로 웃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 웃음은 아닌 것 같았다.

    “저는 앞으로도 이렇게 바쁠 겁니다.”

    “알아요. 그래서 제가 옆집으로 이사를 왔잖습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만 퇴근하고 우리 집으로 들려서 검진을 받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오직 그것뿐입니다.”

    “할리우드는 오버타임 없이 제때 촬영이 끝나는 편이지만, 서이렌 씨는 촬영 외에도 할 일이 있어서 매주 같은 시간을 뺄 수 있을지 몰라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가 휴직 상태라서요.”

    “휴직이라고요?”

    “올해 말까지 휴직입니다. 제 전화번호는 아시죠? 퇴근하시면 언제든 편할 때 부르세요. 저는 올해 말까지는 원세강 씨만을 전담하는 주치의 노릇을 할 겁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죠?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까 원세강 씨가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원세강 씨 같은 경우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약의 개발자로서 내 약이 진짜 효험을 보인 건지, 아니면 원세강 씨에게 찾아온 기적과 그저 타이밍이 맞은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집요하시네요.”

    “그건 연구자에게 있어 가장 큰 칭찬입니다.”

    내 입에서 그제야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렉 루이와 대화를 해 보니 그는 서이렌 때문에 의도를 가지고 나를 찾아온 것 같지 않았다.

    하긴 공항에서도 처음 보고 놀란 얼굴이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주 단위로 내 일정을 정리해서 보내 줄게요. 한두 시간 정도는 오차가 있을 수 있지만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가늠할 수는 있을 겁니다.”

    “그래 주시면 좋죠.”

    그렉 루이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배웅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당분간은 여기가 우리 집입니다. 오랜만의 휴가라서 그동안 못 읽은 책을 보며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거든요.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빈말 아니니까 제가 필요하면 꼭 연락해 주세요. 혹시 몸에 이상이 생기면 바로 알려 주시고요.”

    * * *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촬영을 한다.

    아파트 아래로 내려가 보니 이미 김경록이 차를 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네요. 이거 받으세요.”

    나는 김경록에게 커다란 보온상자를 건넸다.

    “이게 뭐야?”

    “촬영장에서 먹을 거요.”

    “이런 것도 가져가? 할리우드는 케이터링 시스템도 잘되어 있을 텐데?”

    “그렇긴 한데 이렌 씨가 좋아하는 건 없어서요. 한국에서 공수한 캔 커피 같은 것들이 들어 있어요.”

    “그렇구나.”

    김경록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온 박스를 차량에 실었다.

    “오늘 미하엘인가? 하는 그 친구는 안 와?”

    “한국처럼 스타일리스트가 매일 따라다니지는 않습니다. 영화 공식 분장팀에 맡기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알았어. 내가 자꾸 이것저것 물어봐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이제 천천히 배우셔야죠.”

    서이렌은 뒷자리에서 오늘 촬영할 대본을 읽고 있었고 나는 앞자리에서 김경록과 대화를 나누며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넌 여전히 배우를 잘 챙기는구나. 사실 이런 건 로드 매니저인 내가 해야 했는데.”

    “형님이 챙겨 주시면 저도 좋죠. 제가 하는 거 보고 잘 배우세요. 그동안 형님이 알고 있는 건 싹 다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시고요.”

    “이젠 아주 나를 가르치려고 드는구나.”

    “그럼요. 가르쳐야죠. 형님은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합니다. 아시죠?”

    “나도 알아. 열심히 배울 거야.”

    김경록이 정말 달라지긴 했네.

    나는 몰라보게 변한 김경록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그때 주머니 속에 있던 내 핸드폰이 울렸다.

    “아침부터 누구지?”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나는 급하게 전화를 받아 들었다.

    “진석 형님.”

    [세강아. 새벽부터 미안해. 너 자고 있었지?]

    “아뇨. 오늘은 일찍부터 촬영이 있어서 지금 촬영장으로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웬일이세요? 한국은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됐죠?”

    [세강아. 일 났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오아시스도 잘됐고, 블랙마치도 곧 개봉하는데,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

    [블랙마치 말이야. 심의에서 떨어졌어.]

    “영화 등급 심의를 말씀하시는 거죠?”

    [응. 편집을 해서 15세 관람가로 맞추거나 아니면 18세 관람가로 바꿔야 하나 봐.]

    “블랙마치가 18금이라니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지금 편집해서 다시 재심의받고 개봉 일자 정하고 하면 올해 12월 초 개봉은 무리야. 내년으로 미뤄지게 생겼어.]

    “개봉 연기는 절대 안 되는 거 아시죠? TOP 대탈출은 어때요? 거긴 심의 통과했대요?”

    [거긴 통과했다더라.]

    내 머릿속에 순간 불안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탈출이 먼저 개봉하면 안 된다.

    우리가 먼저 촬영을 시작했지만, 늦게 개봉하면 대탈출의 아류작 같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심의가 깐깐해졌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영화가 문제가 될 만한 요소가 없잖습니까?”

    [나도 그게 이상해. 지난번 김기하 사건 터지고 영화진흥협회 인사들이 대폭 물갈이됐잖아. 새로 부임한 사람들이 깐깐하게 구는 것 같아.]

    “다른 작품들은 다 통과라면서요? 심지어 같은 장르인 대탈출까지요. 뭔가 절차상 문제가 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옆자리에 박진숙 이사님도 계신가요?”

    [옆에 계셔. 그냥 말해. 스피커폰으로 같이 듣고 있으니까.]

    “박 이사님. 접니다.”

    [원세강 대표님.]

    박진숙은 고민이 많은지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윤서혁 감독은 뭐라고 그러나요?”

    [편집은 절대 못 하겠다고 하네요. 최악은 18세 관람가로 재심의를 넣는 걸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그렇군요.”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석 형님. 우선, 제가 여기서 조금 더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알았어. 시간에 구애받지 말고 너 편한 시간에 전화해라.]

    전화를 끊고 보니 우리가 탄 차가 어느새 트로이 종합촬영장에 도착해 있었다.

    서이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블랙마치가 개봉을 못 하나요?”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서이렌은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표정이 안 좋았다.

    나는 서이렌을 촬영장으로 보내고 문자로 안심시켰다.

    [이렌 씨는 내가 누군지 잘 알잖아요. 내가 모두 제자리로 다 돌려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촬영해요.]

    이내 서이렌이 보낸 답 문자가 도착했다.

    [믿어요. 대표님.]

    * * *

    모든 사실을 알게 된 김경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세강아. 내가 뭐라도 도울 일은 없을까?”

    “잠시만요.”

    나는 인터넷으로 영화진흥협회 기사를 검색했다.

    김기하 사건 이후로 영화진흥협회는 대폭 물갈이가 됐다는 기사밖에 보이지 않았다.

    [영화진흥협회 이사진 60% 사퇴.]

    [새로운 심의위원장으로 티켓박스 前 사장, 임용섭 선출]

    [새롭게 태어나는 영화진흥협회. 영화계에서는 걱정 앞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화진흥협회의 심의위원회 명단을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그러나 명단을 찾을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경록이 입을 열었다.

    “세강아. 심의위원회는 명단 공개가 안 되는 거로 알고 있어.”

    “그래요?”

    “몇몇 유명한 영화인이나 평론가만 알려졌지. 모든 위원회 명단은 정보공개를 안 해.”

    나는 영화진흥협회로 검색해 보고 나서야 그동안 등급 심의 때문에 많은 논란이 있었던 걸 알게 됐다.

    [조폭물 ‘지옥’ 15세 등급 논란…… “불편” vs “적합”]

    [줏대 없는 영화진흥협회 등급 논란]

    [심의위원의 전문성 부족…… 계속된 영상물 등급 판정의 기준]

    그때 김경록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를 던졌다.

    “아는 기자가 사 년 전에 심의위원이었는데. 그 사람한테 연락이라도 해 볼까? 내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면 도움이 될 거잖아.”

    순간 내 머릿속에 아까 봤었던 기사의 헤드라인이 떠올랐다.

    나는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이전 페이지로 돌아왔다.

    [새로운 심의위원장으로 티켓박스 前 사장, 임용섭 선출]

    티켓박스의 사장. 임용섭.

    기사에서 이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대광그룹, 티켓박스 그리고 임씨 일가.

    잘하면 연이 닿을 수도 있겠는데?

    “왜 그래? 세강아?”

    “형님. 저도 잘하면 아는 사람이 생길 거 같습니다.”

    “응? 너도 영화진흥협회에 아는 사람이 있어? 그게 누군데?”

    “이번에 부임한 심의위원장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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