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8화 (189/261)
  • #188화. 의문의 주치의(1)

    촬영장 밖으로 나오니 의외의 인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경록이 승합차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일 때문에 왔지. 왜 왔겠어?”

    “일이라고요?”

    나는 미심쩍은 눈빛으로 김경록을 쳐다봤다.

    김경록은 나와 이렇게 대면하는 것이 어색한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답했다.

    “아티스틱에서 정식으로 일하게 됐다. 이제 인턴 아니야.”

    “그럼, 정규직이 돼서 맡은 일이…….”

    “어제 윤조를 만났는데, 나보고 서이렌 씨의 로드 매니저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더라. 이렌 씨는 한국식으로 케어할 거래.”

    “그래서요? 하겠다고 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내가 왜 그걸 거절하냐? 난 아직 영어도 서툴고 다른 팀에 배정받아 봤자 계속 허드렛일만 할 건데. 같은 한국인인 서이렌 씨랑 일하는 게 나한테는 훨씬 낫지.”

    “본인이 일하기 편할 거 같아서 오케이 한 거네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점점 더 뻔뻔해지는 거 같으시네요. 전 싫은데요. 같이 일하기 싫습니다.”

    내가 거절의 뜻을 밝히자 김경록의 눈이 커졌다.

    “미안하다. 내 사정을 좀 봐주라.”

    “그래도 싫습니다.”

    김경록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제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세강아.”

    “대표님이라고 부르세요. 강진석 이사님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저를 대표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자식이.”

    “싫으세요? 그럼, 어쩔 수 없죠.”

    김경록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대표님!”

    “뭐라고요? 대표 누구요?”

    김경록은 체념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말했다.

    “……원 대표님.”

    내게 숙이고 들어오는 김경록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김경록 씨.”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김경록이 얼굴을 들었다.

    “원 대표님. 말씀하시죠.”

    “예전처럼 일하시는 건 절대 안 됩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매니저는 자고로.”

    내 말을 끊고 들어온 김경록이 말을 이었다.

    “매니저는 배우를 위해서 존재한다.”

    나는 순순히 내게 꼬리를 내리는 김경록을 보며 기분이 묘했다.

    “쓸데없이 로비하러 돌아다니고, 인맥으로 캐스팅되려고 하셨던 지난날들은 다 잊어버리셔야 합니다. 저는 그런 거 안 하니까요.”

    “서이렌 씨가 어떻게 스타가 됐는지 이제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오로지 실력과 재능 하나만으로 단역에서 조연, 조연에서 주연으로 뜬 거니까. 나도 예전처럼 허튼짓은 하지 않을 거야.”

    “그런가요?”

    “이미 로비로 만든 인맥은 다 쓸모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 사람이 나야. 나도 이제 너처럼 배우 하나만 보고 달릴 거야. 그러니까 한 번만 믿어 주라.”

    김경록은 절실했다.

    그의 눈빛에서 미국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김경록 씨.”

    “예. 대표님.”

    “그냥 원 대표라고 부르세요. 아니면 세강이라고 부르시든가요.”

    “…….”

    김경록은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저도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나 잘리는 거야?”

    당황한 김경록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요동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서이렌과 미하엘이 진지하게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이렌이 귓속말로 김경록이 누군지 영어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했다.

    “이쪽은 미하엘 쉘러. 이렌 씨의 퍼스널 스타일리스트예요.”

    “하이. 나는 미하엘 쉘러예요.”

    “반갑습니다. 나는 김경록입니다.”

    “경록? 발음이 너무 어렵네요.”

    “루크라고 불러요. 그게 내 영어 이름이니까.”

    “그 이름 잘 어울리네요. 알았어요. 루크. 우리 잘 지내봐요.”

    “잘 부탁합니다.”

    김경록이 서이렌 크루에 합류하다니.

    이 소식을 강진석에게 들려주면 아마 믿지 않을 거다.

    “어차피 계속 얼굴 볼 테니까 차차 알아가죠. 그럼, 경록 형님. 이제 집으로 갑시다. 이렌 씨 집은 어디에 있는지 알죠?”

    김경록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운전석에 타려던 김경록은 지나치는 내 팔을 잡았다.

    “세강아.”

    “왜요?”

    “고맙다.”

    “앞으로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볼 겁니다. 알아서 하세요.”

    “빈말이 아니야. 정말 고마워. 새 사람으로 태어날게.”

    * * *

    스타탄생에서 일을 보던 강진석이 놀란 얼굴로 레전드 필름으로 뛰쳐 내려왔다.

    윤서혁과 박진숙이 굳은 얼굴로 강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등급 심의에서 떨어지다니?”

    강진석의 물음에 윤서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답했다.

    “15세 관람가로 심의를 넣었는데 안 된다네요. 문제가 된 장면을 편집하든지 아니면 18세 관람가로 다시 심의를 넣든지 하래요.”

    “그게 말이 돼? 이제 개봉이 코앞인데 다시 편집하라고?”

    강진석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박진숙을 쳐다봤다.

    “박진숙 이사님. 우리 블랙마치가 그렇게 잔인해요? 아니잖아요. 넉넉하게 15세 관람가로 통과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저도 그게 이상해요. 같은 날 심의를 본 조폭 영화도 15세로 통과했거든요. 근데 우리만 재심의래요.”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닙니까?”

    “저도 그래서 영화진흥협회를 찾아가서 확인해 봤는데 제대로 나온 결과가 맞다고 하네요.”

    “이제 예고편 나오고, 한창 홍보 일정 짜고 있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강진석은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윤 감독. 대체 어느 장면이 문제라는 거야?”

    “좀비와 군인들이 싸우는 장면이요.”

    “그럼 어떻게 하려고? 다시 편집할 거야?”

    강진석의 말에 윤서혁이 발끈했다.

    “절대 안 됩니다. 그 장면을 원 테이크로 찍느라고 배우나 스태프 모두 고생했어요. 장면도 잘 뽑혔는데 어떻게 그걸 편집합니까? 차라리 그건 그대로 살리고 18세 관람가로 다시 심의를 넣어 보면 어떨까요?”

    이제는 강진석이 놀라 활짝 뛰었다.

    “안돼. 윤 감독. 반드시 15세 관람가로 가야 한다고. 우리가 표방하는 게 결국은 가족 영화인데 18세로 가면 어쩌자고.”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강진석이 땅이 꺼질세라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큰일이네.”

    세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회의실에서 우두커니 앉아서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더니 이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원 대표님께 연락해 봅시다.”

    * * *

    김경록은 우리가 지내고 있는 아파트를 구경하고 있다.

    “집에 안 가세요?”

    “옆집은 서이렌 씨가 산다고?”

    “아까 옆집으로 들어가는 이렌 씨를 보셨잖아요. 계속 그러고 계실 건가요?”

    “차도 한잔 안 주고 쫓아내는 거야?”

    “보세요.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 아파트는 빌렸을 당시와 바뀐 것이 없이 똑같았다.

    서이렌이 사는 아파트에는 각종 생활용품을 사다 날랐는데 나는 딱히 필요한 것이 없어서 그냥 놔뒀다.

    차가 마시고 싶으면 옆집으로 가서 서이렌과 함께 마시면 되니까 여기에 물건을 사다 놓을 필요성을 굳이 느끼지 못했다.

    그걸 모르는 김경록은 나를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넌 참 재미없게도 산다.”

    “이제 아셨습니까? 알았으니까. 인제 그만 가세요.”

    “알았어. 갈 거야.”

    김경록이 재킷을 챙겨 들고 문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김경록이 문을 여는데 누군가 문밖에 서 있었다.

    김경록과 마주친 그는 초인종을 누르려던 손을 내렸다.

    김경록을 배웅하던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렉?”

    그는 젠셀에서 보낸 의사인 그렉 루이였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왕진 가방이 들려 있었다.

    “세강아. 손님이 오셨는데? 네 손님이지?”

    나는 화들짝 놀라서 그렉 루이를 우선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렉 루이는 나를 보자마자 한마디를 했다.

    “원세강 씨. 만나기 참 어려운 사람이네요. 병원에 오라고 해도 안 오고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그랬어요.”

    “병이 완치된 것도 아닌데 너무 자신의 상태를 낙관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렉 루이는 나를 불량 환자처럼 대하며 뭐라고 했다.

    나는 김경록이 옆에서 듣고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라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형님은 이제 가 보세요. 내일 봬요.”

    나는 그를 내보내고 문을 확 닫았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 때문에 쫓겨난 김경록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두 사람이 뭘 하려고 날 쫓아내는 거야?”

    엘리베이터 앞에 선 김경록은 아까 방 안에서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방금 병이 어쩌고. 완치가 어쩌고 하지 않았나?”

    김경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원세강의 방이 있는 복도를 바라봤다.

    * * *

    그렉 루이는 청진기를 대고 내 심장 소리를 들었다.

    “어때요? 괜찮은가요?”

    “심장 박동은 문제가 없군요.”

    “이제 다 끝난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는 주사기를 꺼내더니 자연스럽게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내 몸이 그의 앞으로 가까이 갔다.

    그렉 루이는 평온한 얼굴로 내 소매를 걷고 팔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능숙하시네요.”

    “말하지 마세요.”

    그는 방금 뽑은 내 피를 그의 왕진 가방 안에 넣고는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의 눈빛을 받고 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라도 한잔하실래요?”

    나는 일어서서 부엌으로 갔다.

    하지만 이내 이 집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없네요.”

    “물도 없어요?”

    “예. 없어요.”

    “됐습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지금 가시려고요?”

    “아뇨. 우리 집으로 갑시다. 나는 지금 당장 얼그레이를 마셔야겠습니다.”

    “저는 괜찮은데요.”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왕진 가방을 챙긴 그렉이 일어서서 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대체 이 야심한 밤에 집으로 가자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상하게 홀린 것처럼 그를 따라나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그는 복도를 걷더니 서이렌의 옆에 있는 집 앞에 섰다.

    “원세강 씨. 뭐 하십니까? 빨리 오시죠.”

    “여기가 그렉의 집이라고요?”

    “예. 오시죠.”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는 그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다.

    같은 아파트라서 내부 구조는 똑같았지만, 인테리어는 완전히 달랐다.

    침실을 제외하고 집의 모든 것이 마치 연구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혹시 이사를 오신 겁니까?”

    “예.”

    “우연인가요?”

    “아닐 거 같은데요.”

    “그럼, 저 때문에 이사를 하셨다는 겁니까?”

    “왜요?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죠.”

    그는 왕진 가방에서 방금 뽑은 내 혈액을 빼서 이상한 냉장고 같은 기계 안에 넣었다.

    내 피는 그 기계 안에서 회전목마처럼 빙빙 돌아갔다.

    정말로 나를 실험체로 쓸 생각인가?

    무섭게 왜 저러는 거야?

    그렉 루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부엌으로 가서 차를 내렸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걸음질 쳤다.

    “차는 다음에 마시죠.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 잡아먹으니까 그냥 드시고 가시죠.”

    어느새 찻잔 두 개를 들고나온 그렉 루이는 나를 그의 침실로 불렀다.

    거실은 일반 가정집이라고 보기 힘들었으나 침실만은 평범했다.

    침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내가 나가려고 하자 그는 나를 데리고 그의 침실로 향했다.

    나는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침실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침실에 마련된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내게 의자를 건넸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침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렉 루이는 내가 불안해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침실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나는 침대 옆의 협탁 위에 올려진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족사진으로 보이는 낡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에는 젊고 잘생긴 중년 사내와 그의 부인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저 사내아이가 그렉 루이라는 것은 누가 봐도 알아차릴 정도로, 그렉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가족사진인가?

    사진에서 시선을 떼던 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놀란 눈으로 나는 다시 사진을 바라봤다.

    단란한 가족사진의 배경이 내 시선을 빼앗았다.

    작업실인 듯한 그곳에는 옷과 마네킹이 서 있었고 나는 그곳에서 서이렌을 발견했다.

    당황한 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렉 루이를 응시했다.

    “왜 그렇게 보시죠?”

    그렉 루이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 말입니다. 대체 장 루이와 무슨 관계죠?”

    그렉은 웃으며 침대 옆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나를 쳐다봤다.

    “저 사진을 보셨군요.”

    “말씀해 주세요. 장 루이를 아시나요?”

    “당연히 알죠. 제 아버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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