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7화 (188/261)
  • #187화. 촬영장의 진상

    촬영이 끝나고 우리는 트레일러로 돌아왔다.

    트로이에서 우리에게 배정한 트레일러는 작지만 있을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한국은 배우들이 밴 차량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차 안에서 옷도 갈아입고 식사도 하며 부족한 잠을 자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은 촬영하는 동안 트레일러에서 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모두 같은 트레일러를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연급 배우들이 받는 작은 사이즈의 트레일러를 받았지만, 주연 삼인방의 트레일러는 이것보다 훨씬 크다.

    나는 서이렌에게 생수를 건네며 물었다.

    “촬영은 어때요? 할 만해요?”

    “시스템이 달라서 조금 헷갈리긴 했는데 이젠 괜찮아요. 연기하는 건 세계 어디를 가나 똑같으니까요. 대신 한 가지는 불만입니다.”

    “뭔데요?”

    “대표님이 옆에서 제가 연기하는 걸 안 지켜보시잖아요. 그건 좀 기운이 빠지더라고요.”

    “스태프 카드를 하나밖에 못 받았어요. 나보다는 미하엘이 들어가는 게 나을 거 같아서요.”

    “그럼, 계속 못 들어오시는 거예요?”

    “트로이에 정식으로 스태프 카드를 하나 더 내 달라고 요청했어요. 내가 어떻게 해서든 하나 더 받아서 촬영장에 따라 들어갈게요.”

    “트로이 놈들. 처음부터 두 개 줬으면 됐잖아. 흥.”

    서이렌이 콧방귀를 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와 서이렌이 한국어로 대화를 하자 옆에 있던 미하엘이 하소연했다.

    “이봐. 왜 두 사람은 한국어로 말하는 거야? 나도 끼워 달라고.”

    나는 그제야 소외당한 미하엘을 보며 미안하다고 했다.

    “미하엘.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나왔어요.”

    “앞으로 영어로 말하는 겁니다. 근데 방금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그냥 촬영 어땠냐고 물었어요. 근데 미하엘 다른 배우들은 어땠어요?”

    “다른 배우 누구요?”

    “오늘 촬영했던 모두 다요.”

    미하엘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B급 감독 토니 역을 맡은 이안 밀러는 꽤 신사적이더라고요. 연기도 잘하고요.”

    “그리고요?”

    “과학자 다이안 역의 일레인 제이는 할리우드에서도 인성 좋기로 평판이 좋았던 사람이라, 소문 그대로였고요.”

    “그럼, 주인공은 콜린 스미스는요? 그 사람은 어땠어요?”

    콜린 스미스는 최근에 할리우드에서 크게 활약하는 배우로 잘생긴 외모에 연기까지 잘하는 라이징 스타다.

    콜린 스미스 이야기가 나오자 미하엘의 얼굴이 밝아졌다.

    “콜린이 최고예요. 어쩜 제복을 그렇게 잘 소화하는지 모르겠어요.”

    서이렌도 미하엘의 의견에 동의했다.

    “콜린이 멋지긴 하더라고요. 원래 모델 출신이래요.”

    “그래요?”

    “저한테도 친절하게 대해 줘요.”

    “이렌 씨한테요?”

    “에이. 이렌. 콜린은 모두에게 잘해 줘. 나한테도 잘해 준다고.”

    “그렇긴 해요. 미하엘.”

    서이렌과 미하엘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콜린 스미스의 칭찬을 했다.

    듣고 있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스태프 카드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아무래도 날을 잡아서 대니를 닦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젠셀 연구실의 그렉 루이가 그의 비서에게 물었다.

    “원세강 씨한테는 아무 연락이 없었나요?”

    “촬영이 시작돼서 바쁘다고 합니다.”

    “약은 보냈고요?”

    “연구소 직원을 시켜서 보냈고, 직접 받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흠. 연구소에 언제 온다는 이야기는 없었나요?”

    “아뇨. 그런 말씀은 전혀 없으셨어요.”

    “알겠어요. 나가 봐요.”

    비서가 나가자 그렉 루이는 모니터의 차트를 확인했다.

    한국에서 원세강의 주치의가 보내 준 자료였다.

    병이 발명하고 계속 안 좋아지던 심장은 약을 바꿨던 이 년 전부터 눈에 띄게 좋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최근 찍은 심장 사진을 보면 섬유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이 깨끗한 모습이었다.

    그렉 루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없는데. 신약에 가장 효과를 보인 환자도 30% 정도 수치로 좋아졌을 뿐, 원세강 환자처럼 완전히 병이 완치된 수준은 아무도 없었어.”

    그렉 루이는 손에 든 팬을 책상 위에 두드렸다.

    ‘탁. 탁. 탁. 탁.’

    조용한 그의 사무실에는 책상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갑자기 팬 두들기는 소리가 멈췄고 그렉 루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밖으로 나간 그는 비서를 향해 말했다.

    “촬영장이 어디라고 했죠?”

    “캘리포니아에 있는 트로이 종합 촬영소입니다.”

    “원세강은 지금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 알아 왔어요?”

    “촬영장 근처에 아파트를 빌렸다고 들었습니다. 촬영장과 아파트 주소를 바로 문자로 보내 드릴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하십지요.”

    “원세강이 산다는 그 아파트에 집을 구해 줘요. 그 아파트가 안 된다면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요.”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게 말하지 말고 찾으면 바로 계약하고 내 집에 만들어 놓은 연구실 장비를 그쪽으로 보내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할 말을 모두 마친 그렉 루이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자신의 사무실을 나갔다.

    * * *

    드디어 나도 촬영장에 들어왔다.

    나는 어제 받은 따끈따끈한 스태프 카드를 들고 서이렌, 미하엘과 함께 촬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스태프 카드가 생각보다 늦게 나와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럴 바엔 내가 직접 메이크업과 헤어를 배울까?’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촬영장은 생각보다 너무 초라했다.

    왜냐면 아무것도 없는 그린 스크린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내가 빈약한 촬영장을 보며 당황하고 있자 내 곁으로 대니 라모로가 다가왔다.

    “오셨나요?”

    “대니.”

    나는 대니 라모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스태프 카드가 너무 늦게 나왔죠? 제가 부탁해도 안 되더라고요. 절차가 있다면서 그걸 따라야 한다나? 제가 아직 이곳에서는 이방인이라서 힘이 없네요.”

    “이번 작품으로 힘이 생길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대니.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촬영하고 나중에 CG를 입히는 건가요?”

    “그건 옛날 방식이고요. 요즘은 촬영하면서 곧바로 그래픽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지?

    나는 대니 라모로가 말한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궁금증은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풀렸다.

    촬영을 시작하자마자 아무것도 없던 배경 스크린에 갑자기 영상이 떴다.

    CG로 구현된 배경이 뜨자 마치 그곳이 우주 왕복선의 조종실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 * *

    인공지능 디오티마에게 승무원 역을 제의받은 승객들은 혼란스러웠다.

    배우 지망생이자 배관공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에릭은 걱정이 앞섰다.

    승객들이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연기를 하라니.

    하지만 이내 디오티마가 그에게 건네준 배역 프로필을 보자 걱정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부함장? 그럼 아무리 못해도 조연이라는 거잖아.’

    지금까지 대사 몇 줄짜리 단역만 해 오던 그에게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부함장 역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까칠한 B급 영화감독 토니 역시 감독 겸 함장 역을 부여받자 꽤 놀란 눈치였다.

    우주 왕복선의 설계자인 다이안은 디오티마 시스템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승객들의 동면은 언제 해제되죠?”

    [앞으로 한 달 후, 1구역부터 순차적으로 동면이 해제됩니다.]

    “승객이 이천 명이죠?”

    [당신들 5명을 빼면 1,995명입니다.]

    다이안은 누구보다 더 디오티마의 걱정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디오티마. 내가 연기를 잘하지 못하는 건 알지?”

    [괜찮습니다. 다이안은 이 연극의 시나리오를 맡아 주시면 됩니다.]

    “시나리오라고요?”

    [대본을 써 주면 연기는 옆에 모인 사람들이 해 줄 겁니다. 디오티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기 때문에 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흠. 그렇군요.”

    다이안은 직접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일단 안심했다.

    [토니.]

    디오티마가 부르자 토니가 고개를 들었다.

    [토니. 당신은 영화감독이었던 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이 연극을 이끌어 가 주셔야 합니다.]

    토니는 그동안 홀로 생각한 것이 있는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대본만 잘 나온다면 못 할 것도 없지.”

    그때 대중에게 잊힌 톱스타 로렌스 모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을 거요. 난 톱스타니까.”

    디오티마는 차가운 기계 음성으로 로렌스의 걱정에 답했다.

    [당신은 사고로 성형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뒤, 인기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디오티마의 무섭도록 차가운 발언에 로렌스의 얼굴이 붉어졌다.

    보다 못한 에릭이 나서서 로렌스를 감쌌다.

    “이봐. 아무리 기계라지만 너무한 거 아냐?”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말한 건 모두 사실입니다.]

    에릭이 발끈하자 로렌스가 그를 말렸다.

    “놔둬요. 사실은 사실이니까.”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로렌스가 결심이 섰는지 입을 열었다.

    “저는 하겠습니다. 연기를 못 한 지 십 년이 흘렀어요. 다시 해 보고 싶어요.”

    이미 다섯 명 중에 세 사람이 하겠다고 나선 상황.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다.

    단역만 전전해 왔던 배우 지망생 에릭과 연기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청바지 모델 루나.

    무표정한 표정의 루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말했다.

    “할게요.”

    토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루나가 불편했다.

    “지금 이건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나도 알아요.”

    루나가 토니를 향해 툭 내뱉자 토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봐. 난 감독이라고. 감독 말을 잘 따라야지.”

    “알았다고요.”

    계속 단답형으로 답하는 루나가 불편했는지 토니는 그녀를 흘겨봤다.

    에릭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저도 하겠습니다.”

    이로써 다섯 명 모두 오케이하자 디오티마가 조종실의 메인 화면에 일정을 띄웠다.

    승객들이 동면에서 깨어나기 전까지 한 달이 남았고.

    목적지인 유레나 행성에 도착할 때까지 총 육 개월이 남았다.

    디오티마는 기꺼이 이 연극에 동참하겠다고 말해 준 다섯 명의 감독, 작가, 배우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 *

    촬영이 끝나고 나는 대니 라모로에게 다가와 오늘 촬영했던 장면을 확인했다.

    배경 스크린에 뜬 CG는 어색함이 없이 녹아들었고 꽤 괜찮은 그림이 나왔다.

    대니 라모로의 말을 들어보면 후반 작업까지 하면 전혀 어색함을 찾아볼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또한 이 스크린을 도입한 뒤로 후반 작업 일정이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다고 했다.

    문 씨어터도 예상보다 빠르게 개봉할 거라며 대니 라모로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대니와 대화를 끝낸 나는 촬영장을 가로질러 나를 기다리는 서이렌과 미하엘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 내 주위를 걷던 스태프들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렸다.

    “루나 팔 봤어? 완전 백인이야. 엄청 새하얘. 동양인은 원래 노랗지 않나?”

    “너 그거 인종차별적인 발언이야.”

    “미안해.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네.”

    “네가 몰라서 그렇지 동양인들도 피부가 하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피부도 되게 좋다고. 나 대학교 다닐 때 룸메이트가 한국인이라서 알아. 그리고 루나는 보니까 메이크업을 한국 스타일로 했더라.”

    “한국 스타일? 그게 뭐야?”

    “자연스러운 피부 톤에 화려하지 않은 화장법. 내 룸메이트도 그렇게 화장했거든.”

    스태프들은 서이렌의 곁에 서 있는 미하엘을 바라봤다.

    “저 사람이 해 주는 건가 본데.”

    “근데 루나 역의 배우가 워낙 예뻐서 그런 거 같아. 다리 길이 봤어? 진짜 길어.”

    “진짜 청바지 모델이라도 했나? 생뚱맞게 웬 동양인인가? 했는데 캐스팅 진짜 잘한 거 같아.”

    나는 스태프들의 서이렌 칭찬을 들으며 웃으며 걸어갔다.

    내가 환하게 웃고 있자 서이렌이 물었다.

    “대표님. 왜 그렇게 웃어요?”

    나는 또 한국어로 대화를 할까 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는 미하엘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이렌 씨. 영어로 해요.”

    “아. 깜박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대표님?”

    “그냥 좋아서요.”

    “갑자기?”

    “그냥요. 우리 이렌 씨가 너무 예뻐서요.”

    “뭐 그렇게 당연한걸. 가지고 그래요. 참나. 어이가 없네.”

    서이렌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피식 웃었다.

    “오. 방금도 너무 예뻤어요.”

    “알아요. 대표님이 내가 머리 넘기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래서 했죠.”

    “알고 있었어요?”

    “알고서 일부러 대표님 앞에서 자주 한 거예요.”

    서이렌은 말을 하며 다시 어깨 너머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본 내 얼굴이 빨개졌다.

    나와 서이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미하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국어로 나누고 있던 거예요? 참나. 이럴 거면 그냥 한국말로 해요. 난 안 들을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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