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문 씨어터(달빛 극장)
김경록과 함께 화장실에서 나오니 윤조의 사무실에서 서이렌이 나오고 있었다.
서이렌은 김경록을 알아보고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서이렌 배우님은 여전히 아름다우시네.”
“뭐라는 겁니까?”
나는 황당한 눈으로 김경록을 쳐다봤다.
윤조는 내게 다가오더니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 먼저 만나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김경록 씨가 이곳에서 일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김경록은 자신이 쳐다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있는 윤조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윤조가 한창 무명에서 벗어나 이름을 알릴 때쯤에는 김경록은 이미 치프급 매니저였다.
김경록은 그 당시 윤조 같은 신인 배우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으니 신기한 일이다.
그때 우리의 뒤에서 누군가 김경록을 불렀다.
“헤이. 킴!”
김경록은 놀라서 고개를 돌렸고 이내 우리에게 인사를 고했다.
“다음에 또 봅시다. 나는 일 때문에 가야 할 것 같으니까.”
김경록은 그를 부르는 직원에게 달려가면서도 서이렌을 향해 눈인사를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와 김경록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 알고 있는 서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경록 이사님이 이곳에서 일하실 줄은 몰랐네요. 대표님은 아셨어요?”
“저도 오늘 알았습니다.”
윤조의 사무실에서 오늘 만난 팀 서이렌의 멤버들도 우르르 몰려나왔다.
윤조는 우리를 보며 말했다.
“자, 그럼 한국식으로 첫 만남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져 보죠. 갑시다. 회식입니다.”
“좋네요. 한국식이면 한식당에 가는 겁니까? 이 근처에 유명한 한식당이 있는데 아세요? 거기 갈비가 엄청 유명하다고요.”
미하엘 쉘러의 말에 우리는 피식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그 식당으로 예약을 해 뒀어요. 갑시다.”
“오우, 좋습니다. 갑시다.”
* * *
달콤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는 빈선예는 미국에서 온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얀이 보낸 거네? 갑자기 웬 메일이지?”
빈선예는 핸드폰으로 얀이 보낸 메일을 열었다.
메일 속에는 서이렌이 참여한 영화의 의상 피팅 영상과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렌 씨다!”
깜짝 놀란 빈선예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곧바로 노트북을 켰다.
커다란 모니터에 방금 봤던 영상과 사진이 뜨자 빈선예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리 이렌 씨 미국에서도 다 찢고 다니는구나.”
서이렌은 우주 왕복선의 승무원 복장을 하고 긴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동양인들이 영화에서 주로 하는 뱅헤어나 보라색 브릿지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서이렌은 자연 갈색의 약간 펌이 들어간 긴 머리를 하고 있었다.
화장도 한국 스타일로 자연스러웠다.
서이렌은 백인보다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는데 혹시나 동양인이라고 해서 톤다운 메이크업을 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다크 블루의 제복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빈선예는 시계를 확인했다.
미국 시간으로는 늦은 오후.
전화해도 문제가 없을 시간이다.
빈선예는 당장 핸드폰을 들어 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얀. 나야. 써니.”
[너라면 사진을 보고 바로 연락해 올 줄 알았어. 잘 지냈어? 결혼 생활은 어때?]
“지금 내 결혼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우리 이렌 씨 환상적이더라. 그 복장이 메인이야?”
[승무원들은 다 이 옷을 입을 거야.]
“너무 예쁘더라. 제복 같기도 하고.”
[일부러 그런 느낌을 내려고 고민했지. 괜찮은 거 같아?]
“괜찮은 정도가 아니야. 보자마자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질렀어.”
[하하하. 써니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진짜 좋은데?]
“그런데 지금 어디야? 방금 촬영한 영상 같던데?”
[맞아. 지금 트로이 종합 촬영장에 와 있어.]
“촬영 시작한 거야?”
[아니. 다음 주부터 촬영이고 오늘은 주요 배역들이 의상을 입어 보고 리허설하는 자리였어.]
순간 두 눈을 빛낸 빈선예가 물었다.
“우리 이렌 씨는 거기서도 넘사벽이지? 주연배우 들이랑 비교해도 하나도 안 꿀리지?”
[당연하지. 우리 이렌 씨가 최고야.]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얀이 의상을 맡으니까 너무 좋아. 안심돼.”
빈선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서이렌이 이상한 브릿지를 달고 오거나 동양인 특유의 메이크업을 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얀이 있어서 그런지 너프 없이 서이렌의 본래 외모 그대로 나왔다.
[써니. 너와 대화를 더 나누고 싶은데 안 되겠다. 이제 촬영 끝나고 나가야 한대.]
“알았어. 오늘 사진이랑 영상 보내 준 거 정말 고마워.”
[그거 유출되면 안 되는 거 알지?]
“당연하지. 이렌 씨는 내 배우이기도 해.”
[그럼, 다음에 또 전화하자. 결혼 생활 행복하게 잘 보내.]
“고마워. 얀.”
전화를 끊은 빈선예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노트북에 내려받은 영상과 사진을 곧바로 지워 버렸다.
“이제 시작이구나.”
빈선예는 웃으며 노트북을 옆구리에 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그럼, 나도 일하러 가 볼까?”
* * *
2150년, 지구로부터 약 3억 3,500만 광년이나 떨어진 AG31 은하로 이주하는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는 드디어 AG31 은하에 진입했다.
우주 왕복선에 탑승한 이천 명의 승객들은 무려 팔십 년간 동면 상태로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인 AG31의 유레나 행성까지는 앞으로 육 개월의 비행이 남아 있는 상태.
우주 왕복선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시스템 ‘디오티마’는 승객들이 깨어나기 전에 몇몇 사람들을 먼저 동면에서 깨웠다.
팔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동면해 있던 이들은 잠에서 깨어나 정신이 혼미했다.
디오티마는 그들에게 신경안정제를 투여했다.
동면에서 깨어난 지 이틀째가 돼서야 동면실을 벗어난 이들은 그들이 이미 도착지인 AG31 은하에 진입한 것을 알게 됐다.
각자의 동면실에서 나온 이들은 인공지능 디오티마의 안내에 따라 우주 왕복선의 조종실로 모여들었다.
조종실에 하나둘 나타나는 사람들.
그들은 디오티마가 준비해 놓은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승무원 제복을 입은 총 다섯 명의 사람들은 서로를 보며 당황하고 있었다.
아무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고 서로를 탐색하고 있는 그때 침묵을 깨고 인공지능 시스템 디오티마가 말을 걸어왔다.
[모두 완벽하게 동면에서 깨어나셨습니다. 신체 리듬을 확인해 보니 정상이네요.]
모인 다섯 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토니 첸이 허공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야? 누군데 우리를 여기로 끌고 온 거지?”
[나는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를 관리하는 AI 시스템 디오티마입니다. 내가 곧 이 우주 왕복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우리를 이곳에 데려온 거지? 다른 승객들은 어디에 있어?”
토니 첸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2의 삶을 기대하고 우주 왕복선에 탑승한 것이 팔십 년 전이다.
그런데 동면에서 깨어나자마자 알 수 없는 시스템에 의해 이곳에 끌려오고 보니 걱정이 앞섰다.
토니 첸의 바로 옆에 서 있던 오십 대 중년의 여인, 다이안 콕스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디오티마. 내가 누군지 알죠?”
[다이안 콕스. NSC의 우수한 과학자이자 우주 왕복선 디오티마의 설계자 중의 한 분이십니다.]
다이안 콕스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디오티마에게 물었다.
“AG31 은하에 진입했다고 했는데 왜 우릴 먼저 깨운 거죠? 우리는 다른 승객들과 함께 깨어나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다이안 콕스는 그들 다섯 명밖에 없는 조종실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승무원들은 어디에 있죠?”
[없습니다.]
“없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분명 탑승할 때 다섯 명의 승무원이 함께 탑승한다고 들었는데요.”
[맞습니다. 다이안. 하지만 아시죠? 저는 인간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우주 왕복선의 모든 시스템의 저를 통해 통제되고 있습니다.]
“지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요. 승무원들은 어디에 있는 거죠?”
조종실에 모인 모두가 다이안과 디오티마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경청했다.
그런데 디오티마는 그들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다.
[디오티마에 탑승했던 승무원 다섯 명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말에 조종실에 모인 다섯 명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디오티마는 그들에게 곧바로 어떻게 된 일인지 사정을 설명했다.
[승무원들의 동면 캡슐이 있던 동면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죠? 시스템 오류인가요? 내가 설계한 동면 시스템은 절대 오류를 일으키지 않을 텐데요.”
다이안 콕스는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며 흥분했다.
[이것은 시스템 오류가 아닙니다.]
“그럼, 뭐죠?”
[인간의 실수와 설계 오류가 만들어 낸 문제였습니다.]
디오티마의 말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동면실에 들어온 선장이 문틈에 그의 머리카락 두 가닥을 흘렸다고 했다.
[머리카락 때문에 문이 완전하게 닫히지 않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말도 안 돼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분명 경보가 울렸을 거라고요.”
[머리카락 두 가닥. 시스템은 200㎛(마이크로미터)의 머리카락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200㎛(마이크로미터)는 지난 팔십 년 동안 미세한 틈을 만들어 냈고 동면실의 온도가 0.2도가 상승했습니다.]
“그럼, 승무원들은 모두 죽은 건가요?”
[제가 오십 년 만에 0.2도의 기온의 변화를 감지하고 동면실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승무원들은 사망한 지 오래였습니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이럴 리가 없어.”
다이안 콕스가 휘청이자 옆에 있던 젊은 남자 에릭 레인스가 뒤에서 부축했다.
에릭은 다이안을 의자에 앉히고 디오티마에게 따져 물었다.
“그런 중차대한 일을 우리한테 다 털어놓는 이유가 뭐지? 왜 우리를 먼저 동면에서 깨웠는지 말해.”
격앙된 목소리로 따져 물었지만, 감정이 없는 인공지능은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여기 모인 다섯 분이 사망한 승무원의 역할을 대신해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 지금 장난해? 우리는 일반인이라고. 우리가 어떻게 이 큰 우주선의 승무원을 한다는 거야?”
[여러분들은 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디오티마 운행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당신들은 그냥 승무원 복장을 하고 승무원인 척하면 됩니다.]
에릭 옆에 있던 토니 역시 흥분하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가 그걸 왜 해야 하는데?”
역시나 아무 감정 없는 인공지능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디오티마 시스템은 완벽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죠. 하지만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라서 승무원이 모두 사망했다는 걸 발표하면 승객들이 패닉 상태에 빠질 겁니다. 바로 당신들처럼 말이죠.]
의자에 앉아 있던 다이안은 디오티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실 이 왕복선에 승무원은 필요 없는 존재지요. 하지만 인간에게 필요해서 승무원이 탑승했을 겁니다. 승객이 이천 명인데 승무원이 고작 다섯 명뿐이었잖아요.”
“난 패닉 상태가 아니야.”
토니 첸이 자신은 멀쩡하다고 외쳤다.
하지만 디오티마가 분석한 그의 뇌파는 극도의 흥분 상태였다.
조종실에 모인 다섯 명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긴 침묵이 흐르고 다시 디오티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들은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라니 놀란 다섯 명이 서로를 바라봤다.
[토니 첸. 당신은 지구에서 영화감독이었습니다.]
토니가 깜짝 놀라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지구에서 분명히 영화감독이었다.
하지만 앞에 ‘망한’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야 한다.
[다이안 콕스. 당신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위대한 과학자로 디오티마 설계까지 참여했습니다.]
다이안 콕스는 디오티마의 칭찬에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로렌스 모한. 당신은 지구에서 오랜 시간 톱스타로 살아왔죠.]
토니와 에릭과 달리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남자가 움찔했다.
모두의 사랑을 받는 톱스타였으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얼굴이 망가졌고 지금은 성형 수술로 다른 사람이 되어 살고 있다.
[에릭 레인스. 당신은 스타는 아니었지만 배우 지망생이었습니다.]
에릭은 앞서 소개했던 로렌스의 얼굴을 뜯어보다 그의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만년 배우 지망생으로 연기라고는 영화와 드라마의 대사 없이 스쳐 지나가던 보조 출연이 다다.
[마지막으로 배우는 아니지만, 지구에서 청바지 모델을 했던 루나.]
자신은 지금 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루나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모인 그대들만이 해 줄 수 있는 일입니다. 디오티마의 승무원인 것처럼 연기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