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5화 (186/261)
  • #185화. 서이렌 전담팀

    몸에 꼭 맞는 푸른색 제복을 입은 서이렌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우주 왕복선 승무원들이 입는 제복을 완벽하게 소화한 서이렌의 자태에 그 자리에 모인 스태프들이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리허설 촬영장에는 대니 라모로, 빈센트 테일러를 포함해서 스태프가 총 열 명 안팎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카메라 앞에 선 서이렌의 모습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와우. 장난 아니네. 모델인가?”

    “다리 길이 좀 봐.”

    “나는 다리보다 얼굴이 더 신기하다. CG 같은데?”

    빈센트 테일러는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온 서이렌의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서이렌은 방금 카메라 테스트를 끝내고 나간 다른 배우들처럼 똑같은 제복을 입고 있었지만 마치 전혀 다른 옷을 입은 것처럼 그녀만 존재감이 남달랐다.

    대니 라모로는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서이렌에게 연기를 주문했다.

    “카메라를 보며 준비한 대사를 읊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대니.”

    서이렌은 대니 라모로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주고는 이내 연기를 시작했다.

    빈센트 테일러는 루나로 변해 연기를 하는 서이렌을 보며 충격을 금치 못했다.

    ‘영어도 완벽하군. 미국에서 태어난 건가?’

    그는 카메라 옆의 책상 위에 올려진 서이렌의 프로필을 힐끔 바라봤다.

    ‘모델인 줄 알았는데 배우인가 보군. 데뷔 사 년 차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연기하면 어색할 수도 있는데, 왜 이렇게 잘하지?’

    빈센트 테일러는 슬쩍 대니 라모로를 돌아봤다.

    대니 라모로는 서이렌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저 어린 천재 감독이 이렇게 대놓고 좋아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

    ‘뭔가 있나 보군. 이따 촬영이 끝나면 물어봐야겠어.’

    * * *

    문 씨어터의 1차 카메라 테스트와 리허설이 끝나고 촬영장의 문이 닫혔다.

    서이렌을 기다리며 윤조와 전화하던 나는 리허설을 마치고 의상을 갈아입고 나온 서이렌을 반갑게 맞이했다.

    “잘 끝났어요?”

    “별거 없던데요?”

    “그래요? 할리우드는 카메라 테스트 때 뭘 하던가요?”

    할리우드에 온 건 나도 처음이기에 모르는 것 천지다.

    “그냥 카메라 보고 대본 읽었어요.”

    “그것밖에 없었어요?”

    “저는 한 번에 오케이가 나서 바로 끝났는데 촬영 감독님께서 저를 좀 더 찍으시겠다고 해서 카메라 앞에서 눈빛 연기 좀 했죠.”

    서이렌이니까 한 번에 오케이가 났을 거다.

    서이렌이 준비한 루나의 말투와 연기를 대니 라모로가 마음에 안 들어 할 리가 없지.

    “피곤할 테니 이만 가죠. 오늘이 호텔에서 묵는 마지막 밤입니다. 내일부터는 미국에서 지낼 집에서 자게 될 겁니다.”

    “대표님. 호텔 식당 음식이 맛있던데 오늘 저녁은 거기서 먹어요.”

    “그럴까요? 그럼, 빨리 가죠. 이제 모자랑 선글라스 써요.”

    “알았어요.”

    서이렌은 웃으며 선글라스와 모자를 썼다.

    나는 서이렌의 손에 든 가방을 빼앗아 내가 대신 들고는 그녀를 에스코트해서 촬영장을 빠져나왔다.

    촬영장 밖에는 배우와 스태프들을 태우고 갈 램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톱스타는 촬영장 안에서도 본인 차를 탈 수 있지만 조연이나 단역 배우는 다르다.

    촬영장 안에 차를 가지고 올 수가 없었다.

    나는 서이렌을 먼저 태우고 짐을 들고 램프 버스에 올라탔다.

    오십 명 정도 들어가는 작은 램프 버스는 우리까지 타고 나니 자리가 꽉 찼다.

    차가 떠나려는데, 누군가 램프 버스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트로이 영화사 직원 같아 보였다.

    직원 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그들은 꽉 찬 버스를 보며 운전사에게 뭐라고 따져 물었다.

    이내 버스 문이 열리고 운전기사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트로이 직원분이 먼저 타고 나가야 한답니다. 마지막에 타신 분들은 내려 주세요.”

    운전사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우리가 먼저 탔는데.

    직원이면 이렇게 자리를 막 빼앗아도 되는 건가?

    하지만 아직 촬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옆자리에 앉은 서이렌을 보며 말했다.

    “이렌 씨. 우리 내릴까요?”

    “그래요. 대표님. 다음 거 타고 가면 되죠.”

    나는 서이렌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우리가 내리자 기다리고 있던 트로이 영화사 직원 두 명이 냉큼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직원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맙다는 말도 안 하네.”

    한국말로 해서 그런지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직원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버스를 탔다.

    서이렌은 내 곁에 찰싹 붙더니 나를 대신해 욕을 했다.

    “매너 꽝이네. 입은 어디에다 두고 고맙다고 말도 안 해?”

    “버스 떠났어요. 안 들릴 거 같은데요?”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닌데요. 그냥 화나서 한 말이죠.”

    “미안해요. 내가 여기선 힘이 없네요. 한국에선 그래도 좀 괜찮았었는데.”

    “난 그래도 미국이 좋은데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니에요. 진짜예요. 미국에선 이렇게 마음대로 대표님 손을 잡을 수 있으니까.”

    서이렌은 말을 마치자마자 내 손에 깍지를 끼었다.

    우리가 서 있는 촬영장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곳은 파파라치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나는 서이렌의 손을 피하지 않고 나도 같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아 줬다.

    오히려 놀란 건 서이렌이었다.

    “저기 다른 버스가 오네요. 가요. 이렌 씨.”

    내가 깍지를 낀 손으로 그녀를 잡아 이끌자 서이렌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표님.”

    * * *

    아티스틱 에이전시에 서이렌을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윤조는 나와 서이렌에게 서이렌을 전담할 팀원들을 소개해 줬다.

    “우선 퍼블리시스트인 토니 윤을 소개할게요.”

    토니 윤이라고 소개받은 남자가 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얼마 전 내 멱살을 잡았던 윤조의 오빠인 윤건영이었다.

    “일로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네요. 반갑습니다. 윤건영 씨.”

    윤건영은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나간 일은 잊어버립시다. 이제 함께 일하게 됐으니.”

    “한국에서는 제중 일보에서 기자를 하셨던 걸로 아는데 미국에 이민 와서 그래도 비슷한 일을 하시네요.”

    “언론을 상대하는 일이니 오히려 그 반대죠. 한국처럼 여기도 기레기는 넘치거든요.”

    “오빠가 이렇게 시니컬하게 말해도 실력은 있어요. 걱정하지 마요.”

    윤조는 내가 윤건영을 싫어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나는 상관없다.

    윤건영이 능력만 있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한국의 연예계 상황도 잘 알기에 서이렌을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 거다.

    윤조는 이어서 눈에 띄게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자를 소개했다.

    “이분은 미하엘 쉘러예요. 이렌 씨의 퍼스널 스타일리스트죠.”

    “하이. 미하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대표님이 너무 잘생기셨네. 반가워요.”

    미하엘 쉘러는 서이렌과 동갑인 젊은 남자였는데 그가 입은 화려한 의상만 봐도 실력이 있어 보였다.

    내가 그에게 악수하려는데, 미하엘은 나를 밀치고 내 옆에 선 서이렌에게 다가갔다.

    “와우. 영상은 서이렌 씨의 외모를 반도 담아내지 못하는군요. 반가워요. 내가 앞으로 서이렌 씨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게 꾸며 만들어 줄게요.”

    “고마워요. 미하엘.”

    마지막으로 윤조는 키가 백구십은 되어 보이는 검정 정장을 쫙 빼입은 사람을 소개해 줬다.

    “이분은 경호원인 제인 클락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제인 클락입니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하며 흠칫 놀랐다.

    이곳에 모인 사람 중 제일 덩치가 큰 그는 다름 아닌 여자였다.

    제인은 그녀를 남자로 알아보는 것에 익숙한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윤조는 웃으며 제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인과 함께 일했던 배우 중에 제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인이 톱스타의 보디가드는 하기 싫어해서 서이렌 씨와 일해 보겠느냐고 권유했더니 바로 오케이를 하더군요. 제인과는 아마 영화를 다 찍고 홍보 행사를 할 때 함께하게 될 겁니다.”

    제인 클락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서이렌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윤조를 보며 귓속말을 건넸다.

    “이렇게 빨리 전담팀이 만들어질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힘 좀 썼지. 알잖아. 나도 권력이란 게 있는 여자라고.”

    “그래. 너 힘세서 좋겠다. 암튼, 고마워.”

    “무슨 소리야? 나 좋자고 하는 일이야. 오빠 말대로 서이렌 씨는 스타성이 충분해. 이 작품이 아니라도 곧 뜨게 될 거야.”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웃는 윤조를 보니 기분이 남달랐다.

    항상 남들 눈치를 보며 자신이 실수한 건 없을까? 걱정하던 윤조가 어쩜 이렇게 달라졌을까?

    “자, 그럼 ‘팀 서이렌’을 위해 축배를 들까요?”

    윤조는 미리 준비한 샴페인을 따라 각자의 잔에 채워 줬다.

    팀 서이렌.

    서이렌만을 위한 전담팀이 만들어지고 나니 이제야 그녀가 미국에 진출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자, 여러분. 미래의 슈퍼스타 서이렌 씨를 위해 치얼스!”

    “치얼스!”

    허공에서 잔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이 벅차오르는 걸 느꼈다.

    순간의 분위기에 취해 손에 든 샴페인 잔을 입에 가져다 데려는데 손이 쑥 하고 들어오더니 내 손의 샴페인 잔을 채 갔다.

    “에이. 그래도 이건 아니죠. 대표님.”

    서이렌은 내 잔을 빼앗더니 그대로 샴페인을 그녀의 입에 가져갔다.

    샴페인을 단숨에 마셔 버린 서이렌이 나를 보며 웃었다.

    * * *

    윤조의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향했다.

    아티스틱은 상주 직원이 백 명이고 팀 서이렌처럼 외부 프리랜서 인력까지 계산하면 삼백 명이 넘는 큰 회사였다.

    화장실도 마치 백화점처럼 근사하게 꾸며져 있었다.

    내가 손을 씻고 나가려는데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보고 너무 놀라서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김경록? 록 이사님?”

    “어?”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에 놀란 김경록이 커진 눈으로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원세강,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미국에 와 계셨어요?”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네.”

    “우리가 아직도 원수인가요? 오히려 그 반대 아닌가요?”

    “뭐라고?”

    “김경진 매니저의 녹취록을 제가 경찰에 고발하지 않아서 고맙다면서요? 그럼, 제가 은인 아닌가요?”

    “원세강. 너 이제 잘나간다고 막 나간다.”

    김경록은 나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말을 하며 그의 목에 걸린 직원 카드를 확인했다.

    카드에 ‘인턴’이라는 글자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김경록은 내가 그의 인턴 카드를 본 걸 눈치채고 잠시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그를 비난하거나 조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대단하시네요. 다시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한국에선 소문이 어떻게 난 건지 도무지 이직할 수가 없더군.”

    “그렇겠죠. 횡령하셨다고 소문이 돌았거든요.”

    “한성제 대표가 소문을 냈겠지. 내가 언제 횡령을 했다고 그러는지. 확 고소해 버릴까도 생각해 봤는데 접었다. 그렇게 다 접고 미국으로 온 거야. 한국보다는 스타의 산실인 미국에서 일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김경록은 올해 3월에 미국에 와서 힘들게 이곳 아티스틱 에이전시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됐다고 했다.

    말이 인턴이지 아직은 잔심부름이나 한다며 나를 보며 하소연을 했다.

    김경록과 십 년 넘게 알고 지냈지만 나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진짜 너는 여기 웬일이냐?”

    “한국 소식은 전혀 안 보세요?”

    “안 봐. 재기하기 전까지는 한국 음식도 안 먹기로 했다.”

    “그러다 해장도 햄버거로 하시겠네요.”

    “이미 그러고 있어. 야. 말 돌리지 말고 말해. 넌 여기에 왜 온 거야?”

    “글쎄요. 제가 왜 이곳 아티스틱 에이전시에 와 있을까요?”

    “너 설마……?”

    김경록의 고민도 잠시 그의 입에서 내 배우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서이렌 배우님이 미국에 진출했어?”

    “예. 맞습니다. 한국에서는 다들 그 이야기뿐일 겁니다.”

    김경록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돌려 화장실 밖을 쳐다봤다.

    “그럼, 서이렌 배우가 여기 어딘가 있다는 말이야?”

    나는 갑자기 긴장하는 김경록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망하라고 고사를 지낼 때는 언제고.

    이제는 팬이라는 건가?

    어이가 없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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