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4화 (185/261)
  • #184화. 두 개의 대본

    나도 활짝 웃으며 윤조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우리 잘해 봐요. 찰리 윤.”

    “예. 원세강 대표님.”

    나와 눈이 마주친 윤조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안 되겠다. 난 그냥 오빠라고 할래요. 도저히 존댓말도 못 하겠고. 대표님도 이상해.”

    “그래. 나도 찰리 윤이라고는 못 하겠다. 그냥 편하게 예전처럼 부르자.”

    나와 윤조가 서로 마주 보고 웃고 있는데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찰리. 들어가도 될까요?”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윤조의 얼굴이 밝아졌다.

    “앤드류? 들어와요.”

    윤조는 나와 맞잡은 손을 떼고 달려가 문을 열었다.

    사무실 문이 열리자 사십 대 초반의 젊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윤조와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사람이 윤조의 약혼자인 앤드류구나.

    여기서 같이 일하는 건가?

    윤조는 앤드류를 데리고 오더니 내게 소개했다.

    “앤드류. 내가 말한 적이 있죠. 한국에서 내가 배우 활동했을 때 나를 케어해 준 매니저예요.”

    “안녕하세요. 찰리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앤드류 러셀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원세강입니다.”

    앤드류는 윤조에게 들은 것이 있는지 나를 친절하게 대했다.

    “앤드류. 서이렌 씨와 함께 일하는 거 말이에요. 그냥 단순한 매니징이 아니라 제대로 일을 해 볼까 하는데요.”

    “찰리. 그게 무슨 말이죠?”

    “서이렌 씨를 아티스틱의 차세대 간판스타로 키워 보고 싶어요.”

    앤드류는 동양에서 온, 할리우드에서는 무명의 배우를 회사의 간판스타로 만들고 싶다는 윤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 역시 윤조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놀랐다.

    업무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앤드류도 아티스틱의 임원급 인사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윤조가 앤드류가 누군지 설명해 줬다.

    “오빠. 앤드류는 아티스틱을 이끌어 가는 대표님이셔.”

    “뭐라고?”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앤드류가 윤조에게 물었다.

    “일 년짜리 단기 계약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과거형으로 답하네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한 거죠?”

    “내가 아는 세상에서 제일 유능한 매니저가 서이렌 씨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했거든요.”

    앤드류는 놀란 눈으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아티스틱의 대표와 직접 마주하게 될 줄은 나도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찾아온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의 의심 섞인 눈빛을 받으며 나는 당당하게 답했다.

    “맞습니다. 서이렌 씨는 그럴 자격이 충분합니다.”

    * * *

    얀 필립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대니 라모로 앞에 서 있었다.

    대니 라모로는 얀 필립이 가져온 의상 콘셉트 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얀. 이렇게는 안 됩니다. 서이렌 씨 의상만 너무 튀잖아요.”

    “대니. 생각해 봐요. 이렌 씨는 뭘 입어도 돋보이는 사람입니다. 이게 왜 안 된다는 거죠?”

    “말씀드렸잖아요. 서이렌 씨는 영화의 중후반까지는 이미지가 흐릿한 조연 중의 한 명입니다. 조연이 이렇게 제일 튀는 의상을 입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냥 주연 네 명의 의상만 얀이 해 주세요. 조연들 의상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길게요.”

    “오 노! 안 돼요. 이렌 씨 의상을 만들려고 이 영화에 참여한 거란 말입니다.”

    얀 필립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니 라모로를 쳐다봤다.

    최애를 세상에서 제일 돋보이게 만들고 싶은 덕후의 심정을 대니 라모로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얀 필립은 뭐가 있나? 싶어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니 라모로를 쳐다봤다.

    대니 라모로는 그런 얀 필립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극의 후반부에 이렌 씨의 분량이 많아질 거예요. 그때 이렌 씨가 멋진 의상을 입어야 하는 스토리로 대본을 조금 손볼게요.”

    “오? 그게 가능해요?”

    “제가 작가이자 감독입니다. 가능해요.”

    “오케이. 그럼, 수긍하죠.”

    “제가 먼저 대본을 수정하고 나중에 어떤 컨셉인지 알려 드릴게요. 그때까지 이렌 씨 의상은 손대지 말아 주세요.”

    “안타깝지만, 알았어요.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이렌 씨한테 그만 좀 신경 쓰세요. 다른 사람들이 이렌 씨가 대단한 역인가? 의심한단 말이에요.”

    “이렌 씨가 히로인이라는 게 비밀인가요?”

    “비밀이죠. 제작사인 트로이 측에서도 개봉까지 함구할 거라고 하더군요.”

    “이렌 씨를 향한 내 진심을 숨기는 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지만 해 보는 데까지는 해 보죠.”

    * * *

    미국의 영화제작사 트로이의 종합 촬영소에 간 나는 압도적인 그곳의 규모에 놀랐다.

    트로이는 세계 5대 영화사에 이름을 올리는 큰 회사에 걸맞게 거대한 종합 촬영장을 가지고 있었다.

    종합 촬영장의 바깥에 있는 주차장에 빌린 차를 댄 나는 문 씨어터 촬영장까지 램프 버스를 타고 가야만 했다.

    문 씨어터 촬영장에 도착하자 에이전시에서 나온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오늘 최종 수정 대본이 나오는 날이라서 그걸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대본을 퀵으로 보내 주는 일도 있지만, 보안 때문에 이렇게 직접 받아 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나는 입구에서 받은 스태프증을 보여 주며 말했다.

    “서이렌 씨 대본을 가지러 왔습니다.”

    “누구요?”

    “서이렌(Seo Iren).”

    “사이렌?”

    내 영어 발음이 못 들어 줄 정도는 아닐 테고 직원은 서이렌이라는 이름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나는 서이렌의 이름을 종이에 크게 써서 직원에게 보였다.

    “오. 세이렌. 알겠어요. 잠시만요.”

    이 사람도 역시 세이렌이라고 부르는구나.

    직원은 서이렌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내게 건넸다.

    대본을 받은 내가 뒤돌아서는데 직원이 나를 불렀다.

    “헤이. 이봐요.”

    “예?”

    나는 놀라서 고개를 돌려 보니 직원이 내게 손짓하며 다시 오라고 했다.

    그에게 다가가니 비닐로 몇 번이나 칭칭 동여맨 뭔가를 내 품 안에 안겨 줬다.

    “이게 뭐죠?”

    “저야 모르죠. 저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겁니다. 세이렌이라는 배우한테는 수정 대본과 함께 이걸 전달하라고 해서요.”

    나는 꽁꽁 싸맨 의문의 물건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대체 이게 뭘까?

    “이봐요. 일 다 봤으면 저쪽으로 가세요. 뒤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예. 실례했습니다.”

    직원은 내게 쌀쌀맞게 대했고 나는 그러려니 하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호텔에 오자마자 나는 오늘 받은 대본을 먼저 서이렌에게 건넸다.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서이렌은 수정 대본이라는 말에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가위를 가져와 오늘 받은 의문의 물건을 개봉했다.

    꽁꽁 싸맨 비닐을 힘겹게 벗겨 내자 드디어 그것이 정체를 드러냈다.

    문 씨어터 대본이잖아.

    대본이 왜 두 개나 되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문 씨어터의 기본 내용은 지난번 내가 봤던 것과 똑같았다.

    하지만 최종 수정 대본이라 그런지 불필요한 장면을 모두 삭제하고 후반 클라이맥스 에피소드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대니 라모로가 힘을 꽤 준 것 같았다.

    대본에 나온 것처럼 그림이 나온다면 분명히 명장면이 탄생할 거다.

    내가 대본을 덮자 서이렌이 나를 불렀다.

    “대표님.”

    “다 봤어요? 어때요? 훨씬 정돈된 느낌이죠?”

    “아뇨.”

    “아니라고요?”

    서이렌은 뾰로통한 얼굴로 읽고 있던 대본을 내게 들이밀었다.

    “제 분량이 모두 사라졌는데요? 중후반부터 분량이 늘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대본이 잘못 나온 걸까요?”

    “그럴 리가요. 내가 본 대본은 그렇지 않은데요?”

    나는 서이렌의 손에 들린 대본을 가져와 내가 읽은 대본의 옆에 올려놨다.

    두 개의 대본을 보는 순간 내 눈이 커졌다.

    그렇구나.

    내가 읽은 게 진짜 대본이고 서이렌 씨가 본 건 반전을 숨기기 위한 가짜 대본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대본을 받아 간 에이전시 스태프들은 모두 이 가짜 대본을 들고 갔다.

    배우들한테도 다 숨기려는 거구나.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한다고?

    ‘I’m Your Father.’이라는 명대사로 유명한 SF영화도 촬영했던 두 배우와 일부 스태프 빼고는 개봉할 때까지 아무도 반전을 몰랐다고 한다.

    나는 할리우드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보안을 철저히 한다면 우리도 그래야겠지.

    나는 서이렌에게 시선을 옮겼다.

    서이렌은 내가 읽었던 진짜 대본을 보고 있었다.

    나는 서이렌이 대본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렌 씨. 대본이 두 개예요. 방금 본 게 진짜 대본이고, 아까 이렌 씨가 분량이 실종됐다고 했던 게 가짜 대본입니다. 오늘 촬영장에 왔던 모든 배우들이 이 가짜 대본을 받아 갔습니다.”

    서이렌은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죠?”

    “일급비밀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함께 촬영할 배우들 모두에게 숨겨야 합니다. 이해했죠?”

    “재미있겠는데요?”

    “뭐가 그렇게 신이 났어요?”

    “나는 동시에 두 가지 연기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문 씨어터의 루나와 내가 진짜 주인공인 걸 사람들에게 숨겨야 하는 조연 배우로요.”

    서이렌은 마치 이것이 첩보 작전인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맞아요. 잘할 수 있겠어요?”

    서이렌은 두 개의 대본을 들어 두 손에 꼭 쥐고 말했다.

    “당연한 걸 물어보시네요. 이미 이 두 개의 대본을 지문까지 완벽하게 다 외운걸요. 난 언제 어디서나 완벽해요. 동시에 두 가지 연기를 하는 것도 식은 죽 먹기라고요.”

    * * *

    일주일 뒤, 트로이의 영화 촬영장으로 배우들이 도착했다.

    오늘은 조연 배우들이 모여 의상을 입고 카메라 테스트와 리허설을 할 거라고 했다.

    한국의 대본 리딩 시간이라고나 할까?

    한국에서도 대본 리딩까지 마쳤는데 배역에서 해고되는 경우가 간혹 있었고 할리우드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 테스트와 리허설을 마치고도 해고되는 경우는 다반사였고 심지어는 영화를 반 이상 찍어 놓고도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며 해고되는 일도 있었다.

    촬영장에 가 보니 오늘 카메라 테스트를 받으러 온 배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가 등장하자 난데없는 동양인의 출연에 잠깐의 시선은 끌었지만, 그들은 이내 우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기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내게 서이렌이 물었다.

    “아티스틱에서 저를 위한 팀을 만들어 준다면서요?”

    “그렇게 됐어요. 아마 다음 주부터 인력이 제대로 붙을 겁니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아티스틱 에이전시면 꽤 큰 회사라면서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작품 하나 한 적 없는 저를 위한 전담팀이 만들어진다는 거죠?”

    “다 내가 잘해서 그런 거죠.”

    “쳇. 잘난 척하시기는.”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잖아요. 진짜로 나만 믿고 따라와요. 이렌 씨가 힘들지 않고 연기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서 서포트할게요.”

    서이렌은 내 말에 감동했는지 볼이 살짝 빨개졌다.

    “그럼, 말해 줘요. 대표님도 나 좋아하죠?”

    “십 분 후에 의상 갈아입으러 가야 한다고 하네요.”

    “대표님은 거짓말을 못 하신다면서요? 빨리 말해 줘요. 나 좋아하죠?”

    “들어가기 전에 물 마실래요?”

    “못 들은 척하지 마세요. 이젠 그것도 안 통해요.”

    주위에 스태프들이 천지에 깔렸는데도 나와 서이렌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닭살 돋는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할리우드가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 * *

    촬영 감독 빈센트 테일러의 곁으로 대니 라모로가 가까이 다가왔다.

    빈센트 테일러는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촬영 감독으로, 대니 라모로가 제일 먼저 스태프로 모셔 온 사람이다.

    “어때요? 대니. 난 나쁘지 않은데요.”

    “저는 이것보다는 색감이 더 밝았으면 합니다. 금속으로 이뤄진 우주 왕복선의 차가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그럼, 조금 더 화면을 조정해 볼까요?”

    젊은 감독과 베테랑 촬영 감독은 서로의 이견을 조율해 가며 카메라 리허설을 진행했다.

    그때 스태프가 대니 라모로에게 다가와 말했다.

    “루나가 준비 중입니다. 감독님.”

    “그래요?”

    큰 소리로 고개를 든 대니 라모로 감독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빈센트 테일러는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문이 열리며 영화 의상으로 갈아입은 서이렌이 촬영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빈센트 테일러는 제복을 입고 걸어오는 서이렌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카메라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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