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0일의 매니저-183화 (184/261)
  • #183화. Charlie

    나는 눈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윤조야.”

    “응. 나야. 윤조.”

    “네가 찰리 윤이었어?”

    “놀랐지?”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우리가 헤어진 지도 어느덧 구 년이 흘렀다.

    윤조에겐 그동안 몇 번이나 큰 변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그녀의 길고 까맣던 생머리는 밝은 갈색의 짧은 쇼트커트 스타일로 바뀌어 있었고, 옷 입는 스타일도 전과는 매우 달랐다.

    통이 넓은 정장 바지에 편하게 스니커즈를 신은 그녀의 어깨에는 커다란 쇼퍼백이 들려 있었다.

    나를 보며 수줍게 웃던 그녀의 미소는 여전했지만, 이제는 나를 연인이 아니라 클라이언트로 대하고 있었다.

    그녀의 프로패셔널한 모습을 보니 갑자기 안심이 드는 건 무슨 감정일까?

    그때 나와 윤조의 사이로 윤건영이 끼어들었다.

    윤건영은 동생인 윤조를 보며 화를 냈다.

    “너 어떻게 된 거야? 원세강이 왜 여기로 온 건데?”

    “내가 요청했어. 내가 서이렌 씨를 담당할 거야.”

    “미쳤어? 네가 왜? 다시 원세강이랑 엮이고 싶은 거야?”

    “무슨 소리야. 그냥 일로 만나는 건데. 오빠는 여긴 웬일인데? 일 안 해?”

    “앤드류가 좀 보자고 해서 온 거야. 너를 보러 온 건 아니었어. 근데 앤드류도 이 사실을 알아?”

    윤건영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윤조에게 바짝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원세강이랑 너랑 전에 사귀었던 거 앤드류도 알아?”

    “당연히 알지. 나와 앤드류는 숨기는 것 따위는 없어.”

    “쿨하구나. 넌 미국 사람이 다 됐다. 난 여전히 한국 사람이라서 지금 이 상황을 전혀 이해 못 하겠는데?”

    윤조와 윤건영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나는 뭔가를 발견했다.

    윤조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본 것이다.

    당연한 건가?

    구 년이 흘렀는데 당연히 윤조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겠지.

    다행이다.

    네가 잘살고 있어서 다행이야.

    * * *

    한국에서는 오아시스 개봉을 앞두고 경사가 터졌다.

    “그리스 영화제에 우리 오아시스가 초청됐다고요?”

    “방금 연락이 왔어요. 무려 경쟁 부분입니다.”

    박진숙의 말을 들은 강진석의 얼굴이 미소로 물들었다.

    “와. 이게 또 이렇게 풀리네요.”

    “이제 시작입니다. 다른 영화제에도 출품할 생각입니다.”

    “하하. 그럼요. 그렇게 돼야죠.”

    강진석은 한참 웃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이 좋은 소식을 원 대표한테도 빨리 알려 줘야겠지요?”

    “제가 이미 메일로 전달해 드렸어요.”

    “벌써요? 아이고, 잘하셨습니다.”

    강진석과 박진숙이 웃고 떠드는데 레전드 필름으로 흡사 좀비 같은 모습을 한 윤서혁 감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 감독. 얼굴이 왜 그래? 영화도 크랭크 업 했는데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윤서혁은 축 늘어진 어깨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윤 감독님이 지금 블랙마치 후반 작업 때문에 힘드실 거예요.”

    블랙마치는 지금 편집을 마치고 한창 CG 작업 중이었다.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윤서혁 감독 때문에 좀비도 최대한 분장으로 커버하고 CG는 최소한으로 했지만,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작업량이 상당했다.

    윤서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강진석을 보며 말했다.

    “우리 12월에 개봉할 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야? 반드시 연말 시즌에 개봉해야지.”

    “CG 작업이 이렇게 힘든 건지 처음 알았습니다. 저는 컴퓨터가 다 알아서 뚝딱하면 결과물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사람 손을 정말 많이 타네요. 노가다가 따로 없어요. 그래픽 작업을 맡은 스튜디오 엔지니어분들이 정말 고생 중이세요. 어제도 찾아갔다가 어쩌다 보니 그분들과 함께 밤을 새우고 지금 퇴근하는 거거든요.”

    “그래? 밤을 새운다고?”

    강진석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윤서혁을 쳐다봤다.

    박진숙은 불안해하는 강진석과 윤서혁을 보며 말했다.

    “CG 작업이란 게 원래 그렇습니다. 두 분 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분들이 약속은 지키시는 분들이거든요. 우리가 다행히 CG 분량이 많지 않고요.”

    “그래도 가서 직접 보니까 작업 환경이 너무 열악하더군요. 돈은 많이 주시는 거죠?”

    “그럼요. 저희가 이 업계에서는 제일 대우를 잘해 주는 편에 속해요. 진설 대표님도 사람 갈아 가면서 영화 만드는 거 싫어하셨고 원세강 대표님도 마찬가지세요.”

    “그렇군요. 그렇게 고생하시는데 돈이라도 많이 버시면 좋겠네요.”

    “그래도 밤을 새우며 작업하신다니 다시 한번 일정을 확인해 볼게요. 무리하게 작업하고 있다면 우리가 금액을 더 올리고 사람들 더 투입해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럼, 좋을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윤서혁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축 처진 어깨를 폈다.

    강진석은 그런 윤서혁의 어깨를 치더니 말했다.

    “윤 감독. 그런데 절대 개봉 연기는 안 돼. 같은 시기에 TOP 미디어 좀비 영화가 있어서 무조건 우리가 먼저 개봉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저도 먼저 개봉하고 싶어요. 아류작 이야기는 듣기 싫으니까.”

    * * *

    나는 지금 윤조의 사무실에 앉아 있다.

    그녀의 방에 들어와서야 알았다.

    윤조는 아티스틱 에이전시에서 일반 사원이 아니라 간부급 사원이었다.

    내 사무실보다 훨씬 넓은 방에 그녀는 개인 비서까지 따로 두고 있었다.

    “이름이 찰리라서 남자라고 생각했었어.”

    “한국에 사는 지인들도 자주 헷갈리더라. 근데 사실은 찰리가 여자 이름으로도 많이 쓰여.”

    윤조는 내 앞으로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내밀었다.

    “넌 원래 아이스커피 싫어하잖아.”

    “이젠 아이스가 아니면 못 마시겠어. 나이가 드니까 식성까지 달라지나 봐.”

    “좋아 보인다.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윤조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가 꾸며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든지 알 수 있을 거다.

    “아까 건영 오빠 때문에 놀랐지?”

    “유건영 씨는 여전하시더라.”

    “그렇지. 오빠가 한 성깔 하지. 그때 내 스캔들 났을 때도 LOK로 찾아와서 다 뒤집어 놓고 갔잖아. 원 대표님이, 아니. 오빠가 나 그때 나 때문에 힘들었었지?”

    “아냐. 내가 미안했어. 그때는 널 지켜 주지 못했어.”

    “나 오빠라고 불러도 되지? 지금은 일 이야기하는 거 아니니까.”

    “그럼, 편하게 불러.”

    윤조의 책상에는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일 거다.

    내가 그녀의 반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윤조가 웃으며 답했다.

    “나 약혼했어.”

    “그래. 앤드류라는 사람인가 봐. 미국인이야?”

    “응. 맞아.”

    “언제 결혼하려고?”

    “아직은 모르겠어. 지금은 일에 매진할 때기도 하고. 앤드류가 하도 졸라서 약혼만 먼저 한 거야.”

    “이 일이 재미있나 보네. 다행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연예계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아. 난 대중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뒤에서 스타를 키워 주는 일이 더 맞는 거 같아. 오빠처럼.”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니 나도 좋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말해 봐.”

    “서이렌 배우의 매니저가 나라는 걸 알고 있던 거야? 알고도 나와 일할 생각이야?”

    윤조는 내 질문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오빠랑 일하고 싶어서 내가 맡는다고 했어. 나 이제 실무는 안 하거든. 근데 내가 대표님과 담판 짓고 서이렌 씨 담당자로 결정된 거야.”

    “그랬어?”

    “오빠는 요즘 한국에서 잘나가더라.”

    “한국 소식을 좀 듣나 봐?”

    “오빠는 연예인이 다 됐던데?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들 총동원해서 스타메이커에 투표도 했어. 나비랑 구원의 밤은 내가 사는 근처 극장에서 안 해서 몇 시간이나 차를 타고 가서 봤어. 스타탄생 리얼리티 MT는 미튜브 공식 계정 구독자이기도 하고. 나 오빠 팬이야.”

    나는 해맑게 웃는 윤조를 보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윤조의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그녀의 가식 없는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서이렌 씨는 정말 대단해. 언젠가는 할리우드로 올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었어.”

    “그렇게 말해 주니까 고맙다. 서이렌 씨한테도 꼭 네가 한 말 전해 줄게. 조만간 다 같이 봐야지.”

    “그럼 좋겠다.”

    윤조와 나는 본격적인 일 이야기에 앞서 구 년간 하지 못했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눴다.

    * * *

    TOP 미디어 회의실에서는 한지욱이 미간을 찌푸리고 앉아 있었다.

    앞에 앉은 대탈출의 김중성 감독과 박상용 실장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한지욱이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연말 개봉이 어려울 거 같다는 거죠?”

    “후반 CG 작업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차라리 개봉 시기를 늦춰서 내년에 개봉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레전드 필름의 블랙마치보다 늦게 개봉하게 되는 거잖아요? 그쪽은 연말에 개봉하는 게 맞죠?”

    “예.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한지욱은 접힌 미간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생각에 빠졌다.

    고심 끝에 한지욱이 입을 열었다.

    “인력을 더 투입합시다.”

    박상용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지금 한국에 있는 그래픽 스튜디오는 내년 초까지 일정이 꽉 찬 거로 알고 있습니다. 어려울 거 같습니다.”

    “한국에서 못 찾으면 해외로 눈을 돌려 보자고요. 요즘 중국 CG도 볼 만하잖아요. 중국 회사를 컨택해 보자고요.”

    “거긴 너무 복불복이라서요. 중국도 잘하는 곳은 이미 스케줄이 꽉 찼을 겁니다. 자칫 엉뚱한 곳과 계약하면 돈은 돈대로 쓰고 아웃풋은 별로일 확률도 높아요.”

    “그러니까 잘 알아보고 계약하면 되는 거죠. 중국 업체를 추려서 다음 주까지 가지고 오세요.”

    박상용과 김중성 감독은 걱정스러운지 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이렇게 결정을 못 해서야. 쯧. 대표인 내가 한다고 했으니 하는 겁니다. 이제 반년 남았어요. 못 할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랑 한 달 차이로 촬영 들어간 레전드 필름의 좀비 영화도 연말 개봉인데 말입니다.”

    “그쪽은 CG보다는 분장과 특수 효과 위주로 촬영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승산이 있는 겁니다. 어색한 분장과 특수 효과보다는 현란한 CG가 젊은 사람들한테는 더 먹힐 테니까요. 알겠어요?”

    박상용과 김중성 감독은 계속 말해 봤자 안 먹힐 것 같아서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한지욱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다음 달에 이사하는 거 준비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일정에 차질 없이 준비하세요.”

    한지욱이 회의실에서 나가자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박상용은 일정표를 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자기 왜 LOK와 TOP 미디어를 합친다는 건지. 어디로 이사한다고 했죠?”

    “쌍둥이 빌딩이랍니다.”

    “건물은 좋네요.”

    “시티타워랑 마주 보고 있고 워낙에 요즘 뜨는 곳이니까요.”

    박상용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김 감독님. 제가 먼저 중국 업체를 찾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한지욱 대표가 예산은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니까 비싸더라도 잘하는 곳으로 컨택해 주세요.”

    “그래야죠. 돈을 갈아 넣어서 일정 문제를 해결하겠다는데. 그렇게 해야죠.”

    박상용은 말을 마치고 곧바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 * *

    윤조가 안경을 고쳐 쓰며 내게 물었다.

    “그럼, 꽤 중요한 역이라는 거네?”

    “히든 히로인이라고 보면 돼.”

    “어쩐지. 영화 시놉시스를 봤는데 히로인이 없더라고. 그래서 이상하다 싶었어.”

    “트로이의 일부 임원들과 대니 라모로 감독만 알고 있는 이야기야. 너는 이렌 씨를 담당할 에이전트니까 말해 주는 거고.”

    “그거 일급비밀인 거지? 나한테 다 말하고 다녀도 돼?”

    “너는 알아도 돼.”

    “왜? 내가 오빠랑 친분이 두터워서?”

    “이 영화로 서이렌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꿈의 스타가 될 거야.”

    “내가 아는 오빠가 아닌 것 같아. 되게 자신만만하네.”

    “난 확신해. 그러니까 나를 도와줘. 아니 나를 믿고 서이렌에게 투자해 봐.”

    “오빠 진짜 달라졌다.”

    “너랑 일할 때는 이렇게 저돌적이지 못했어. 미안해.”

    “아냐. 나도 그때는 지금처럼 당당하지 못했는걸.”

    나와 윤조는 인생의 암흑기를 함께 보낸 사이다.

    나는 이곳에서 윤조를 만난 것 또한 내 운명이라 생각한다.

    “나와 함께할래?”

    윤조는 내 얼굴을 응시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악수하자고. 정식으로 내 소개를 다시 할게.”

    윤조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는 미래의 대스타 서이렌 씨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할 찰리 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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